제02호 2008년 가을 [특집] 물이야기

[ 동양사상과 물 ]

물에서 배우는 삶의 지혜

글 윤형균

프로메테우스가 하늘에서 불을 훔쳐 사람들에게 가져다주면서 인류 문명이 시작되었다는 서양의 신화와 달리 동양 문명의 출발은 물과 연관되어 있었다. 맹자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요 임금 때 물이 역행하여 큰물이 나자 사람들은 둥우리를 치거나 동굴에 거처를 마련하여 누추하게 살았다. 이에 순이 우에게 홍수를 다스리게 하니, 우는 땅을 파서 물을 바다로 흐르게 하였다. 물의 길을 만들어 사람들로 하여금 농사를 짓게 함으로써 비로소 평지에 정착 생활을 할 수 있게 하였던 것이다. 수로와 관개를 통해 농경을 시작하면서 중국 문명은 창조되었다. 활활 타오르며 자기를 내세우다 한 순간 스러져가는 불. ‘더 높이, 더 빨리, 더 세게’를 지향하는 현대 문명은 확실히 불의 문명으로부터 유래하였다. “물은 다투지 않고 가장 낮은 곳을 구하므로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것으로 가장 단단한 것을 이긴다.” 만물을 낳고 살리면서도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물을 본받으려 했던 동양의 문명이 걸어온 길은 불의 문명과는 확실히 달랐다.

 

 

물의 길, 인간의 길

물은 신비스러우면서 성스러운 것이었다. 모든 생명을 양육하면서도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강압에 양보하는 듯하지만 조그마한 틈도 뚫고 바위도 닳게 하며, 끊임없이 샘솟아 스스로 맑아지며 아래로 아래로만 흘러 바다를 이룬다. 동양의 정신세계에서 물은 삶과 우주의 상징으로, 또 세상의 근원으로 표상되고는 하였다. 수많은 형상과 다양한 이미지를 생성하는 놀라운 성질을 갖고 있는 물은 자연의 이치뿐만 아니라 인간의 행위에도 적용되는 일반적인 우주 원리들을 개념화하는 주요한 모델을 제공했던 것이다.

「순자(荀子)」의 <유좌(宥坐)>편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물끄러미 강을 바라보는 공자를 보고 제자였던 자공이 그 이유를 묻자 공자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모든 곳으로 퍼져 나가고 모든 것에 생명을 주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물은 덕(德)과 같다. 아래로 흐르면서 꾸불꾸불 돌지만 항상 같은 원리를 따르는 물의 흐름은 의(義)와 같다. 솟아올라 결코 마르지 않고 흐르는 것은 도(道)와 같다… 물을 거치거나 물에 들어가 선명해지고 정화되는 것은 마치 선하게 되는(善化) 것 같다. 만 번이나 꺾여 흐르지만 항상 동쪽으로 흘러가는 것은 마치 지(志)와 같다. 이것이 군자가 큰 강물을 바라볼 때 항상 관조하는 이유이다.’ 공자가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삼았던 군자(君子)도 물을 모범으로 삼았다.

 

스스로 맑아지는 물의 속성

 

동양에서는 치수(治水)가 정치의 근본이었다. 농사짓는 데 물을 조절하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 있었을까. 물의 길을 만들어 물을 다스림으로써 풍농(豊農)하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정치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또한 풍농을 가져다주는 물의 길은 정치가들이 마땅히 따라야 할 도리와 같았다.

 

맹자는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처럼 백성은 인(仁)으로 모여든다’며 세상과 함께 하고 백성들과 더불어 하는 정치의 근본을 물에 비유하고는 하였다. 또한 인간의 선한 품성을 아래로 흐르는 물에 비유하기도 하고, 군자의 품성은 끊임없이 솟아나는 샘과 같아야 한다고 말한다.

 

노자는 ‘백성들 위에 군림하고 싶은 성인이 항상 말을 겸손하게 하여 자기를 낮추는 이유’는 강과 바다가 백 개의 계곡 물을 지배할 수 있는 것과 상통한다고 말한다. 노자와 장자는 의도하지 않으면서도 만물에 생명을 주는 물에서 무위(無爲)의 이상적 인간상, 내지는 인간의 행위규범을 발견한다. ‘물이 선함은 만물을 이롭게 하지만 다투지 않고 만인이 싫어하는 곳에 거처하는 것이다. 그래서 물은 도에 가깝다.’

 

동양사상은 자기를 닦는 일을 시작이요, 끝으로 삼았다. 스스로를 갈고 닦는 모습으로 물만한 상징을 찾을 수 있을까. 남의 오물을 닦아주며 스스로 더러움과 함께 하고 또 그 더러움마저 스스로 맑아지게 하는 물의 속성은 삶의 태도로부터 치세(治世)의 원리에까지 사람이 마땅히 걸어야 할 길(道)이었던 셈이다.

 

물은 삶의 표준, 기준을 상징하는 데 쓰이기도 하였다. 물이 고요할 때 완전한 수평이 되므로 목수들은 이 점을 이용해 수평을 재는 척도로 사용했다. 순자는 물의 평평함과 법의 공평성을 동일시했다. 맑고 고요한 물은 청정한 마음을 상징하기도 하였으며, 세상을 비추는 거울로 삼기도 한다. 「장자(莊子)」의 <잡(雜)>편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물이 고요할 때에는 사람의 수염과 눈썹을 또렷하게 비춘다… 성인의 마음이 맑으면 그것은 하늘과 땅의 거울(鑑)이 되고 만물의 거울(鏡)이 된다. 비어 있고(虛) 고요하며(靜) 무미건조하고(恬) 담담하며(淡) 특색이 없으며(漠) 아무것도 하지 않는(無爲) 것은 표준으로 행동하는 하늘과 땅의 척도이고 도와 덕의 정점이다.’

 

 

생명의 탄생, 그리고 물의 우주론

 

생명은 물에서 탄생했다. 따지고 보면, 우리 몸과 지구상의 뭇 생명들은 물의 순환 체계이다. 물로부터 삶의 지혜를 구하던 동양의 정신세계는 물의 우주론으로 확장된다. 「관자(管子)」의 <수지(水地)>편의 우주론은 이렇게 탄생하였다.

 

‘땅은 만물의 근원이요, 모든 생명이 태어나는 뿌리요, 터전이다. 아름다움과 추함, 선과 불선, 어리석음과 현명함이 모두 여기서 생겨나는 것이다. 물은 땅의 피요, 기다. 그것은 우리의 몸에 근육과 혈맥이 있어 모든 것을 소통시키고 흐르게 해주는 것과도 같다. 그러므로 물이야말로 모든 가능성을 구비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깊은 물을 쳐다보면 검푸르지만 손바닥에 떠서 보면 무색투명하다. 이것이 물의 청순하고 정미한 성질이다. 물을 됫박에 잴 때는 위를 고르는 막대기를 쓰지 않아도 됫박에 차면 스스로 멈춘다. 이것이 물의 바른 미덕이다. 물은 차이가 있을 때는 흐르지 않는 법이 없다. 그러나 평균에 이르게 되면 스스로 멈춘다. 이것이 물의 의로움이다. 사람은 모두 한결같이 위로 가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물은 자기 홀로 항상 밑으로 간다. 이것이 물의 겸양(낮춤)이다. 낮춤이라는 것이야말로 도가 깃드는 그릇이다. 수평(재는 기구)이야말로 모든 형량의 으뜸이다. 물의 무색이야말로 모든 색깔의 바탕이다. 물의 담박함이야말로 모든 맛의 중용이다. 그러므로 물이야말로 만물의 기준이며, 모든 생명을 살리는 체액이며, 모든 시비와 득실의 바탕이다. 그러하므로 물은 채우지 아니함이 없고, 가지 않는 곳이 없다. 물은 하늘과 땅에 가득 차며, 만물 어느 것에도 깃들지 아니함이 없고, 쇳덩이, 돌, 바위에도 생하지 아니함이 없고, 모든 생명을 활성화시키지 아니함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물을 물 하느님(水神)이라 부르는 것이다.’

 

풍수사상도 물을 중심으로 한 자연 이해의 산물이었다. 풍수란 바람과 물을 일컫는다. 풍수란 다름 아니라 바람과 물의 길을 따져 밝힘으로서 만물과 사람살이의 생기를 구하는 삶의 지혜라 할 수 있다.

 

동양의 또 다른 우주론, 음양오행 사상에서 음과 양, 물과 불은 세계를 구성하는 두 개의 기둥이었다. 불은 밝음, 뜨거움, 열정, 상향적인 것이고, 물은 맑음, 차가움, 이성, 하향적인 것을 의미한다. 동의학에서는 이 두 상징체계를 소우주인 인간의 몸에 적용한다. 횡경막 아래는 불, 위는 물로 보아, 위는 차고 아래쪽은 뜨거워야 말썽이 없다고 한다. 차야 할 곳이 뜨거워지면, 즉, 물이 들어갈 자리에 불이 움직이면 열병, 결핵, 뇌수막염 등이 생기고, 횡경막 아래 수족은 물 때문에 냉증, 치질 등의 병이 생긴다. 인간이 건강하기 위해서는 위, 아래의 물과 불이 상생하고 상호 순환해야 한다. 아래는 따뜻하게 하고, 위는 차갑게 하는 온돌은 이런 동의학의 체계를 집의 형태로 확장한 동양 과학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다. 김지하는 인간 생명력의 근거인 ‘밥’을 짓는 행위도 물과 불의 상호작용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물을 붓고 불로 끓이는 모습, 다시 말해 아래에서는 상향적인 성질의 불이, 위에서는 하향적인 물이 서로 얽히면서 쌀을 변모시켜 밥을 지어 먹는 행위는 일종의 제사라는 것이다. 이 제사를 통해 인간은 물과 불의 상호 순환 체계인 몸의 생명력을 얻는다. 다시 말해 우리가 밥을 먹는 행위는 물과 불의 조화, 통일, 상생 하는 우주를 모시는 행위요, 대우주가 소우주인 인간의 몸으로 집약되는 과정이라 볼 수 있는 것이다.

치유의 길, 생존의 지혜

 

인류의 제전이라 불리는 올림픽의 ‘더 빠르게, 더 높게, 더 세게’라는 슬로건에는 서양문명의 결정판인 현대 과학기술의 특성이 압축되어있다. 속도와 경쟁을 최고의 선으로 여기는 이러한 현대문명 관점에서 바라볼 때, 다툼을 피해가고 낮은 곳으로만 흐르며, 자신의 모습을 변형시켜 어떤 모양의 그릇에도 담기는 물의 속성이 한가하기 짝이 없고 한심스러워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속도와 경쟁이 자연의 파괴로 귀결되어 전 지구적 생존의 위기를 초래하고 있는 현재, 물의 문명을 중심으로 불의 문명을 끌어안는 돌봄과 나눔, 공생에 인류와 뭇 생명의 길이 있는 것은 아닐까.

 

자연에 순응하고 공생하는 정신은, 특히 동양의 산수화(山水畵)에 잘 표현되어 왔다. 산수화에서 산과 강은 짝을 이루어 시간과 공간, 우주 전체를 표현한다. 산은 공간과 영원을, 강은 일시적으로 변화하나 영속적인 흐름을 상징한다. 그 시공 속에 때로는 나룻배와 더불어, 때로는 초가삼간에 인간이 기대어 있는 모습을 그려내 인간의 삶이 우주와 자연에 깃들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생전에 무위당 장일순은 세간에 이름깨나 알려진 제자들에게 ‘문을 활짝 열고 낮은 곳으로 흘러라(開門流下)’고 이야기했다. 낮은 곳으로 흘러 사람들과 더불어 뭇 생명과 함께 하는 것, 겸허하게 자신을 낮추어 자연 속의 존재로 돌아가는 것, 물과 같이 한없이 자신을 낮추는 태도에 현대문명의 치유와 인류 생존의 지혜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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