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03호 2008년 겨울 살림,살림

[ 가까운 먹을거리 ]

한적한 시골, 작은 농장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들

글/사진 김현경

 

안토니노 코센티노 씨는 품종을 지키는 것이 농부의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한 해 동안 전 세계를 누비며 떠돌고 있는 농산물은 800만 톤. 이러한 먹을거리는 복잡한 유통경로를 거치면서 신선도와 안전성 문제에 끊임없이 노출되고, 먹을거리의 이동거리가 늘어날수록 정작 소비되는 곳에서는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생산하기 어렵다. 또한 먹을거리가 비행기, 배, 트럭을 타고 먼 거리를 이동하게 되면 많은 화석연료를 사용하게 된다. 이러한 먹을거리는 이제 서서히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한 석유 고갈을 부채질하고, 많은 온실가스를 배출하여 지구온난화를 더욱 앞당기는 결과를 낳는다. 지역의 먹을거리를 살리지 못하면 우리의 경제도, 사회도 구하기 어렵다. 온실가스를 줄이지 못하면 끓고 있는 지구를 살려내기도 힘겹다.

「살림이야기」에서는 우리가 처한 이러한 현실 속에서 뚜렷한 지역색을 가지고 지역 먹을거리의 생산과 소비가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는 이탈리아의 시칠리아 섬을 기획 취재하여 지난 02호부터 연재를 시작했다. 머나먼 이국 땅에서 우리와 똑같이 농사를 짓고 있는 그곳의 농부들은 우리의 고민에 진심어린 연대의 뜻을 보내 왔다. 이번 호에서는 토종 종자를 지키면서 지역 고유의 특산물을 만들어내는 농장을 방문해 보고, 우리의 실정과 그 대안점도 모색해 보고자 한다.

 

 

 

 

 

언덕마다 굽이굽이 펼쳐진 포도밭에는 넝쿨 사이사이 투명한 햇살과 함께 말라붙어 거의 건포도에 가까운 포도송이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정면으로는 쪽빛 지중해가 내려다보이는 가운데 포도밭의 주인은 진흙에 가까운 밭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뱃속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이 포도들도 저처럼 이렇게 햇볕을 쬐면서 바람을 느끼고 이 아름다운 장면을 만끽하고 있을 테죠. 그런데 어떻게 포도가 잘 자라지 않을 수가 있겠어요?”

 

유기농 포도 농사의 비법을 재차 묻자 일 년에 한 번 콩과 식물을 재배하여 뒤엎어 주는 것을 빼고는 특별히 하는 일이 없다며 안토니노 코센티노(Antonino Cossentino) 씨가 말문을 열었다. 포도 자체가 연작 피해도 별로 없는 작물이라 농장의 최고 수령인 포도나무가 25년 정도 되었는데 아직까지도 주렁주렁 포도 맺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고 한다. 또한 포도 농사로는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원래부터 농약이나 화학비료를 안 쳤고 1995년부터 근방에서는 가장 처음으로 유기농 국제 인증을 받아 꾸준히 관리를 해오고 있다.

 

가무잡잡한 얼굴과 울퉁불퉁한 거친 손을 보니 지금은 영락없는 농부지만 젊은 시절 그는 이탈리아의 대기업인 이탈텔(Italtel)에서 25년간 책상을 지켰던 도시 근로자였다. 그러던 그가 거의 노후를 계획하는 단계가 되어서야 포도와 와인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사실 저희 아버지가 포도 농사를 짓고 계셨어요. 포도가 약간 높은 지대에서 잘 되거든요, 또 공기가 잘 통하고 일조량이 높으면 금상첨화예요. 시칠리아가 바로 그런 곳입니다. 그래서 아버지 말고도 시칠리아에서는 와인용 포도를 많이 재배하고 또 그 질도 아주 좋은데 이상하게도 시칠리아산 와인은 잘 찾아볼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그 포도들이 어디로 가는지 따져보았죠. 일단 포도를 딴 후에 농장에서 인위적으로 농축액으로 만들어 도매상에 넘기면 그 농축액이 다시 몇 단계를 거쳐 뭍이나, 더 멀리는 외국까지 나가서 전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와인 제조업체로 들어간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많이 안타까웠습니다. 여러 나라, 여러 지역의 각기 다른 풍토 속에, 또 다른 사람의 손에 의해 재배되었을, 하나하나마다 모두 다른 맛과 향을 품고 있을 그 포도들이 농축액으로 뒤바뀌고 또다시 섞여서 개성을 잃은 채 공장에서 매번 ‘똑같은’ 와인으로 양산된다는 것이 슬펐습니다.”

 

코센티노 씨는 이렇게 조금은 낭만적인 이유로 고향 땅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시작은 낭만적이었으나 현실에 대한 대비는 철저했다. 시칠리아의, 그중에서도 그의 손을 거친 포도의 특성을 그대로 담아낼 지역 와인 생산이라는 소명을 가지고 경영자의 관점으로 땅을 일구었다. 우선 오랫동안 직장생활을 하면서 모아놓은 재산이 얼마만큼 있었기 때문에 초기에는 투자의 개념으로 포도밭을 일궜고, 직장생활의 경험을 되살려 와인 제조시설도 하나씩 갖추게 되었다.

 

“포도밭이나 와인 제조시설 모두 투자가 뒤따라야 합니다. 또 회사를 다닐 때보다 일로 따지자면 지금이 더 고되죠. 그런데 비교할 수 없는 보람이 있어요. 돈으로는 살 수 없는 행복을 포도밭에서는 찾을 수 있으니까요.”

 

이렇게 시작한 그의 포도 농사는 와인 만들기까지 성공적으로 이어졌다. 그의 포도는 더 이상 먼 거리를 떠돌지 않고, 또 농약이 묻어있을 수도 있는 다국적 포도들과 마구잡이로 한데 섞이지 않아도 된다.

 

“와인 제조업체에 포도를 넘기면 편하기야 하죠. 그저 생산량과 당도 정도만 신경 쓰면서 수확만 하면 되니…. 하지만 그렇게 되면 내 손으로 길러낸 포도는 사람이 먹는 순간까지 영영 그 고유의 얼굴을 가질 수가 없어요. 큰 회사들의 다국적 와인은 거대 유통구조 때문에 매년 언제나 늘 같은 맛을 유지합니다. 그것이 그들의 품질경영일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진짜 와인은 그렇지 않아요. 자라나는 밭에 따라서 다르고, 그 해의 기후에 따라 다르고, 또 길러내는 사람에 따라 같은 품종이나 라벨이라도 모두 달라야 합니다. 그게 당연한 건데 사람들은 잘 몰라요. 기업들의 마케팅과 광고가 더 큰 영향을 주기 때문인 것 같아요.”

 

 

어느 곳에서나 토종이 가장 이롭다

 

 

 

“한국에서도 요즘은 와인을 많이 드신다고요? 처음에는 어디서나 인기가 좋은 카베르네 쇼비뇽, 메를로, 샤또네이 같은 외국 품종을 많이 길러 유명한 주류회사에 납품했으니 어쩌면 벌써 한국 분들 중에는 저희 포도를 맛보신 분이 있을 수도 있겠군요. 물론 프랑스 와인이라는 라벨이 붙어 있었겠지만요.(웃음)”

 

코센티노 씨가 이런 외국 품종을 더 이상 기르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지금은 이탈리아 고유의 품종에 가장 큰 정성을 들이고 있다. 이렇게 해서 그가 주로 기르고 있는 품종은 까또라토, 그릴로, 네로다볼라와 같은 시칠리아 전통 포도들이다. 이런 포도들은 당도도 높고 향이 좋아 와인 만들기에도 제격이라고. 와인을 담그는 포도는 당도가 중요하기 때문에 수분이 많이 날아간 후에야 수확을 하는데 그중에 그나마 통통해 보이는 송이를 따서 한 알을 먹어 보니 너무 달아서 목이 따가울 정도다. 그런데도 계속 포도송이로 향하는 손은 멈추지 않으니 그 향기가 입안에 가득 퍼져 기분까지 좋아지기 때문인 것 같다.

 

“토종 종자를 재배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여기에 있는 것이 여기에서 제일 잘 되기 때문입니다. 또 나는 이곳에서 살기 때문에 이곳의 품종을 팔고 싶어요. 반대로 이곳의 품종을 먹고 싶기도 한데요, 그건 고유의 품종이 농사가 잘될 뿐만 아니라 우리 몸과 땅에도 가장 좋기 때문이에요. 본능적으로 그런 믿음이 있고, 그렇기 때문에 농부인 제가 품종을 잘 살려야 한다는 사명감도 있습니다. 가능한 많은 품종을 살려내야죠. 그럼 저는 또 와인으로 그런 토종 포도를 담아낼 겁니다.”

 

같은 이유로 그는 지역의 먹을거리를 지키는 것도 중요하다고 한다. 자기가 원하는 맛은 바로 자기가 발을 내딛고 있는 그곳의 먹을거리가 가장 잘 채워줄 수 있기 때문이고, 가까운 곳의 먹을거리가 무엇보다 더 안전하기 때문이라고. 멀리서 오는 먹을거리일수록 긴 유통 과정을 버텨내기 위해 많은 후처리가 필요하다. 또한 아무리 인위적인 처리과정을 거친다고 하더라도 신선도 면에서는 지역 먹을거리를 따라올 수 없는 것이 당연지사.

 

 

와인 속에 들어있는 포도를 보세요

 

 

양조장에서 본격적으로 와인을 만드는 과정을 보니, 갑자기 그동안 다른 곳에서 마셨던 와인들이 눈앞을 스쳐간다. 넝쿨에서 손으로 따낸 포도송이는 세척 등 어떤 전처리 없이 그대로 분쇄기에 들어가는데 전 세계 공통적으로 와인은 모두 똑같은 과정을 거친다고 한다.

 

“그래서 유기농 와인을 마셔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시중에서 유기농 인증을 받은 와인들이 어디 큰 인정을 받고 있나요? 잔류농약 검사 정도야 받았을 수 있겠지만, 글쎄요 저라면 그런 와인들은 마시지 않을 거예요.”

 

그러고 보니 그의 사무실에는 유전자 조작 포도로 만든 와인을 반대한다는 내용의 포스터가 붙어 있다. 아뿔싸, 그렇다면 그런 포도로 만든 와인도 있다는 얘기인 것이다.

 

“현재 이탈리아에서는 GMO 포도의 재배와 수입을 법으로 금지하고 있습니다. 다른 나라는 잘 모르겠지만 충분히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큰 기업 입장에서야 수익 창출에 도움이 된다면 시도하지요. 더구나 그게 내가, 혹은 우리가 마시게 될 것이 아닌 어디 붙어 있는지도 모르는 먼 나라로 보내는 것이라면 더 쉽게 선택할 수 있겠지요.”

 

코센티노 씨는 유기농업을 하는 사람이라면 당장 자기 입에 들어가는 것만을 생각하면 안 된다고 딱 잘라 말한다. 나와 내 가족뿐 아니라 이웃과 지역, 또한 환경까지 돌볼 수 있는 농업이라야만 유기농업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 당장은 어렵더라도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자신이 발을 딛고 있는 곳의 특성을 잘 살려 지역 고유의 농업과 음식문화를 살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러한 믿음을 끝까지 지켜내는 사람들은 대개가 작은 농장의 농부들이에요. 전 세계의 작은 농부들은 모두 한 배를 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소비자 분들도 이런 농부들을 뒤에서 응원한다면 그들은 꼭 어떤 식으로든 보답해내리라 믿습니다.”

 

그 순간 갑자기 포도밭 사이에서 양과 염소 떼가 밖으로 몰려 나왔다. 이 고마운 가축들은 포도밭의 잡초를 먹이 삼아 김도 매주고, 또 밭에는 그네들의 배설물을 거름으로 돌려주고 있었다. 그러한 거름을 밑천 삼아 이 기름진 땅은 내년에도 또다시 단내 나는 시칠리아 와인을 많은 이들에게 선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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