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호 2017년 3월호 살림,살림

[ 책으로 떠나는 인문학 여행-문화예술 탄압과 자유의 진전 ]

싸워야 할 때

글 하승우

블랙리스트의 폭력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지는 과정에서 ‘블랙리스트’라는 말이 우리 사회에 다시 등장했다. 예전에는 노동운동을 하는 노동자들을 찍어 내는 문서가 블랙리스트였는데, 이번에는 정부 정책을 반대하거나 비판하는 문화예술계 인물이나 단체를 정부 지원 사업에서 배제하는 문서였다. 사실 이명박정부 때부터 정부 공모 사업에서 특정 인물이나 단체가 사업 내용과 무관하게 계속 떨어진다는 이야기가 돌았고, 그런 문서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이번에 처음 확인된 것이다. 이 리스트를 작성한 사람들이 대통령, 청와대 비서실장,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처럼 권력을 가진 자들이라니 한숨이 나온다.
더 놀라운 건 이들의 인식이다.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자 전 법무부 장관은 검찰 조사에서 반성은커녕 “좌파 예술인이나 단체에 대한 정부 지원을 줄이는 일은, 문체부 장관이 당연히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고 진술했다. 해군 기지 건설이나 4대강 사업, 송전탑 건설을 반대해도 좌파로 내몰리는 세상에서 이런 인식은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탄압해도 문제없다는 논리를 담고 있다.
정부가 공공의 질서와 안녕을 위해 개인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다고 하지만, 이런 논리는 한국 역사에서 개인의 자유를 일방적으로 침해하곤 했다. 그리고 예술 활동에 대한 논쟁은 언제나 가능하고 때론 필요하지만 논쟁으로 기준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세속적인 기준에 예술을 맞추려는 것은 폭력이다.

 


법정이 예술에 관한 판결을 내릴 수 있을까?
예술의 자유에 대한 정부의 억압은 지난 역사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채형복의 《법정에 선 문학》(한티재 2016)은 사회의 주목을 받았던 필화 사건 일곱 건을 다룬다. 필화란 작가의 글이 법을 어기거나 사회적 논란을 일으켜 제재를 받는 일을 가리키는데, 주로 기성 권력이나 도덕규범 등을 비판하거나 풍자한 작품들이 대상이 되었다. 채형복은 많은 필화 사건들 중에서 남정현 단편소설 〈분지〉(1965), 염재만 장편소설 《반노》(1969), 김지하 시 〈오적〉(1970), 양성우 시 〈노예수첩〉(1977), 이산하 서사시 〈한라산〉(1987), 마광수 장편소설 《즐거운 사라》(1991), 장정일 장편소설 《내게 거짓말을 해봐》(1996)로 일어난 사건을 다룬다.
과거 판례와 법률에 의존해 판결을 내리는 법관들이 문학작품에 대한 판결을 내릴 수 있을까? 채형복은 법관들이 이런 판결을 내리려면 ‘법적인 정의’를 넘어 ‘시적인 정의(poetic justice)’의 관점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의 《시적 정의》(박용준 옮김, 궁리 2013)를 인용해서 채형복은 “문학적 상상력에 바탕을 둔 공적 합리성”(27쪽)을 주장한다. 시적 정의는 이성적인 사고와 판단에 따르는 법률과, 감성과 상상력에 따르는 문학의 결합을, 인문학적 상상력과 공적인 상상력의 결합을 추구한다. 누스바움은 이런 관점에서 ‘시인-재판관’, ‘재판관-시인’ 개념을 제안하는데, 채형복도 법관이 시적 정의의 관점을 가져야 작품에 대한 판결이 가능하다고 본다.
필화 사건 일곱 건 중 이 시적 정의의 관점에 가장 잘 부합하는 사건은 남정현의 〈분지〉 사건이다.
남정현은 소설에서 미국에게 지배당하는 한국의 현실을 제목처럼 ‘똥 덩어리의 땅’[糞地]으로 묘사했고, 북한은 작가의 허락 없이 이 소설을 조선노동당 기관지에 무단 전재했다.(지금이라면 이 작품은 여성에 대한 폭력적인 내용 때문에 논란이 일었을 텐데, 당시에는 최초로 문학작품의 반공법 위반 사건으로 기소되었다.) 검찰은 1심에서 작가에게 법정 최고형인 징역 7년에 자격정지 7
년을 구형했고, 법원은 반공법 제4조, 제16조와 국가보안법 제11조, 형법 제57조를 적용해 징역 6월에 자격정지 6월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시적 정의는커녕 사법 정의조차 실현되지 못했다.
흥미로운 건 당시 재판정에 제출된 한승헌 변호사의 변론서다. 이 변론서의 결론은 “한국의 헌법과 법률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작가로서의 창작 활동 및 그 발표의 자유를 행사하였을 뿐이고 달리 공소장 기재와 같은 범죄 사실을 인정할 증거가 없으므로 피고인은 ‘무죄’라고 확신하는 바이다. 한 작가의 ‘憤志’를 곡해함은 ‘糞紙’의 위험을 초래할 뿐이다.”(68쪽)라는 말로 글을 맺는다.
변호인은 작가가 쓴 ‘분지’라는 제목을 활용해 작가의 ‘억울하고 분한 뜻’[憤志]을 왜곡하면 정말 ‘황색 찌라시’[糞紙]가 될 뿐임을 강조했다.
재판관은 아니었지만 변호인은 시적 정의의 관점을 가진 셈이다. 한국처럼 법관의 정의(正義)가 권력자와의 정의(情誼)만을 고려하는 곳에서, 시민의 자유는 억압될 수밖에 없다.

 

 

법정에 선 문학 - 한국 현대문학 7건의 필화 사건
채형복 지음|한티재 펴냄|2016년

 

 

자유란 싸우는 과정
물론 자유가 무조건적인 선(善)은 아니다. 현대 사회에서 자유는 선물이자 저주다. 노동자에게 굶어죽을 자유가 있고, 인간에게 자신의 삶을 망칠 자유가 있다. 그렇지만 타인의 생명을 빼앗을 자유는 없고, 타인의 삶을 망치는 것은 자유가 아니다. 그리고 동학의 교리처럼 ‘내 마음이 곧 네 마음(吾心卽汝心)’이라 생각한다면, 우리의 자유는 누구도 다른 이의 생명을 빼앗아서는 안 되고 그 삶을 비하하거나 망치면 안 된다. 자유에도 지켜야 할 선(線)이 있다.
사이토 준이치는 자유란 “사람들이 자기/타자/사회의 자원을 이용하여 달성·향유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스스로 판단한 것을 달성·향유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단, 타자의 동일한 자유와 양립하는 한에서 그 자유는 옹호된다.”(21쪽)고 정의한다.
곧 자유의 실현은 당사자만이 아니라 타자와 사회를 필요로 한다. 장애인이 자유를 실현하려면 자신의 노력만이 아니라 타자의 도움과 사회의 지원이 필요하듯이 사회적 약자는 기본권이 보장되어야 자유를 실현할 수 있다. 때로는 남성의 목소리를 막아야 여성이 이야기를 할 수 있듯이, 다른 사람의 자유를 제한해야 자유가 보장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자유는 권력에서 배제된 사람들이 권력으로 접근하기 위해 싸우는 과정이기도 하다. 자유로운 시민은 사회가 위험해질수록 안전을 위해서라면 감시를 강화하고 기본권을 제한해도 좋다는 생각과 싸워야 한다. 자유는 개인의 사생활을 침해할 수 있는 CCTV가 계속 설치되고 개인정보들이 쉽게 거래되거나 통제되는 현실, 언론 통제나 이동권 제한, 평화와 안전을 내세운 개인의 억압과 싸워야 한다. 우리의 자유를 위해 지금은 싸워야 한다.

 

 

 

 

자유란 무엇인가 - 벌린, 아렌트, 푸코의 자유 개념을 넘어
사이토 준이치 지음|이혜진·김수영·송미정 옮김|한울 아카데미 펴냄|2011년

 

 

↘ 하승우 님은 녹색당 공동정책위원장, 풀뿌리자치연구소 이음 운영위원으로 풀뿌리민주주의와 아나키즘, 자치와 공생의 삶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사회의 모순과 잘못을 지적하기 위해 날카롭고 까칠해야 하지만 삶의 방향은 우정을 향해야 한다고 믿는 ‘까칠한 로맨티스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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