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호 2017년 3월호 [특집] 환절기

[ 소설가의 환절기 단상 ]

안녕의 계절이여, 안녕

글 박정애

제주에서 환절기를 생각한다. 환절기. 가는 계절과 오는 계절이 각기 한쪽 발을 걸친 시간.
제주의 2월은 생짜배기 환절기다. 샛노란 유채꽃 하늘거리는 언덕에 영화 <겨울왕국>(2013)의 올라프를 닮은 눈사람이 서 있다. 푸르른 무청과 대파, 브로콜리가 자라는 밭고랑마다 흰 눈이 쌓였다. 따가운 햇볕과 세찬 바람이 뒤섞여 있다. 춥다가도 덥고 덥다가도 춥다. 풍경과 기후의 복합적 중층성이랄까, 비동시성의 동시성이랄까. 무지 불안정한데, 눈이 번쩍 뜨이도록 아름답다.
제주에 정착한 후배 소설가가 외국 여행을 간다기에 빈집으로 들어와 산 지 스무나흘째다. 오일장에서 장을 봐서 음식을 해 먹고 해변을 하염없이 걷고 오름을 오르내리고 도서관에 다니고 바람 소리, 파도 소리를 들으며 글을 썼다. 이제 나흘만 더 살고 떠날 작정이다. 할 일을 적어 둔 체크리스트를 보면 마음이 바빠진다. 도서관에서 빌려 온 책 반납하기, 다랑쉬오름 오르기, 우도 다녀오기, 새로 시작한 역사소설 초고 마무리하기, 집 대청소하기…. 후배 부부가 먼 여행에서 돌아올 집이다 보니 내 짐만 달랑 꾸려서 떠날 수도 없다. 이불, 베갯잇 등속을 깨끗이 빨아 놔야 하고 내가 먹어서 없앤 참기름, 고춧가루 같은 양념류와 대파, 무, 감자 따위 채소들을 사다 냉장고를 채워 놓아야 한다.
정들자 이별이라더니. 야트막한 현무암 돌담, 꽃보다 예쁜 열매를 주렁주렁 단 하귤나무, 도서관 가는 길, 해변 산책로, 단골 빵집과 국숫집. 많이 그리울 거야. 안녕, 안녕. 나만 보면 쫓아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고 앞다리를 쭉 뻗는 이웃집 개들. 안녕, 예쁜이들아. 한 포대 사다 놓은 사료, 아직 반도 못 줬는데 벌써 이별이로구나. 응, 응. 많이 먹으렴. 우리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다시 못 보더라도 언제까지나 안녕, 안녕.
안녕은 ‘아무 탈 없이 편안하다’는 의미인데 인사말로서 참 묘하다. 영어와 비교하자면, ‘Hi’와 ‘Bye’가 이 한마디에 다 들어 있다. 환절기에는 유난히 “안녕”이라는 인사를 많이 하게 된다. 환절기에 별 탈 없이 안녕하신지요, 환절기에 감기 조심하시고 안녕히 계십시오. 가는 겨울이여, 안녕. 오는 봄이여, 안녕. 내가 2005년도에 발표한 청소년 소설 <환절기>도 그러하다. 주인공 소녀가 겪는 절망의 시간이 결코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라는 메시지를 담고자 소설 제목을 ‘환절기’로 정했었다. 솔로몬의 통찰과 같이 이 모든 것은 지나가나니, 아팠던 시간이여, 안녕. 새로운 시절이여, 안녕.
요즘 내 입가에서 후렴구처럼 맴도는 안녕, 안녕. 떠날 날을 받아 두어서만은 아닐 테다. 제주 한 달 살이, 뜨내기 삶이어서도 아닐 테다. 내 집에선들 날마다 매 순간마다 안녕, 안녕이 아니었으랴. 구태여 예를 들자면, 일 년 전에는 어
깨가 아프고 한 달 전에는 팔꿈치가 아프더니 며칠 전부터 손목이 그렇게 아프다. 함부로 굴려도 별달리 아픈 데 없었던 시절이여, 안녕. 몸뚱어리를 아끼고 받들고 달래 가며 조심조심 써야 하는 시절이여, 안녕.

소설가는 직업적 특성 때문에라도 환절기의 감각을 예민하게 벼려야 한다. 안정된 감정을 지닌 어떤 사람이 안정된 삶을 사는 이야기는 소설이 되지 못한다. 소설이란 불안정한 몇 가지 성질(성격일 수도 있고 사건일 수도 있고 사회 제도일 수도 있다)들이 충돌하거나 폭발하여(환절기를 겪고) 어떤 결말(새로운 계절)에 이르는 과정인 것이다. 안녕히 살 수 있는 내 집 놔두고 불편할 수밖에 없는 남의 집에 와서 안녕, 안녕을 외는 까닭이 바로 이것이리라. 내 집에서는 어지간해서 예민해지지 않는다.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도 어제 같아서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것처럼 지루한 일상을 살기 일쑤다. 환절기의 감각이 오롯해지는 시간은 역시나 집 떠나 낯선 시공간에 몸뚱이를 부렸을 때가 아닐까. 그렇다고 직장 때문이든 가족 때문이든 삶터에 매인 사람이 시도 때도 없이 집을 떠날 수는 없다. 집과 직장에서 환절기의 감각을 벼리려면 환절기의 본질인 불안을 눈여겨보고 귀 기울여 들어야 한다.
“친구를 못 사귀면 어떡하지? 대학교에도 왕따가 있을까?” 올해 대학에 입학하는 딸아이가 불안해한다. 중학생 때 왕따를 당한 적 있는 딸아이한테는 리포트나 학점보다 교우 관계가 제일 큰 걱정거리다. 엄마로서 최대한 도움의 손길을 내밀고 싶지만, 명백한 한계가 있다. 결국 이것은 딸아이 인생의 과제인 것.
“영영 취업을 못 하면 어쩌죠? 최고은 씨처럼 굶어 죽을 수도 있잖아요?” 졸업과 동시에 ‘천하무적’(天下無籍, 하늘 아래 소속이 없다)이 되는 제자들이 불안해한다. 무어라 위로할 말이 없는 무력한 선생은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1974)라는 영화 제목을 떠올리며 정말이지 제자의 영혼까지 불안에 잡아먹히지는 않기를 빌 뿐이다.
“제주도에서 한 달을 산다고? 너는 참 재미있게 사네. 나는 언제 회사 잘릴지 몰라서 벌벌 떠는데. 이 나이에 공무원 시험을 준비할 수도 없고.” ‘사오정’(45세면 정년이라는 뜻)은 겨우 피했지만 은근히 명예퇴직 압박을 받는 또래 친구가 불안해한다. 친구는 제 불안에 짓눌려 축구 좋아하는 늦둥이 아들을 코딩 학원으로 내몬다.
“인공지능(AI) 시대에는 코딩이 만국 공통어란다. 말 못하는 바보가 되고 싶니?” 우리 인생도 불안해 죽겠는데 아이들 미래는 더 불안하다.
이 불안이 저 불안을 낳고 한 불안이 다른 불안을 부채질하는 형국이다. 단군 이래 가장 풍요로운 시대를 산다는 ‘헬조선’ 사람들의 속내가 이러하다.
지금 우리 시대에 제목을 붙인다면 ‘환절기’가 적당하리라. 적폐는 여전하고 현재는 고통스러운데 아직 오지 않은 미래까지 얽히고설켜 불안하게 꿈틀거리는 시간. 온몸의 땀구멍을 열고 그 시간을 느끼다 내 입이 제풀에 인사를 한다.
안녕, 안녕. 오래된 불안이여, 안녕. 어린 희망이여, 안녕.

 

 

 

↘ 박정애 님은 소설가입니다. 지은 책으로는 《에덴의 서쪽》, 《물의 말》, 《덴동어미전》, 《용의 고기를 먹은 소녀》 등이 있으며 강원대학교에서 소설 창작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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