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호 2017년 2월호 살림,살림

[ 책방 주인장의 책과 삶-책을 읽다가, 일기를 쓰다가 ]

삶이라는 퍼즐 맞추기

글 윤성근

새해가 되면 사람들은 이런저런 결심을 한다. 담배를 끊겠다거나 운동을 열심히 하겠다, 계획하던 공부를 시작하겠다는 얘기를 요즘 자주 듣는다. 헌책방에서 일하다 보니 책에 관한 계획도 손님들로부터 종종 듣는다. 올해는 1년에 책 100권을 읽겠다는 사람부터 실제로 작품을 써서 문학상에 응모하겠다는 예비 작가까지 다양하다.

 


“이제 나는 아무런 꾸밈 없이…”
그런데 일기를 쓰겠다는 사람은 만나 보지 못했다. 올해는 물론이고 지난해에도, 그 전해에도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일기를 써 왔기 때문에 지금은 거의 습관처럼 날마다 무언가를 쓴다. 이렇다 보니 일기 쓰기가 너무 좋아서 기회만 되면 사람들에게 권한다. 그러나 내 말을 들은 사람들 반응은 시큰둥하다. 어렸을 때는 학교에서 쓰라고 하니까 썼을 뿐, 어른이 되어서까지 일기를 쓰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내 경우는 참 다행인 게 일기 쓰기를 처음부터 좋아했다. 하루 동안 일어난 일을 가만히 앉아서 다시 생각해 본다는 것 자체가 즐거웠는데, 어른이 되어서 생각해 보니 그때 재미있게 읽었던 소설책들도 대개는 일기나 수기 형식으로 쓰인 것들이었다.
예를 들어 《걸리버 여행기》나 《로빈슨 크루소》 같은 모험소설이 그렇다. 청소년이 읽을 수 있도록 짧게 요약된 《모비 딕》도 주인공 이슈메일의 수기처럼 쓰인 소설이다. 한동안 애거서 크리스티의 추리소설에 빠져 있던 때도 있었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이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이다. 탐정 푸와로의 수사를 돕는 역할을 자청하며 사건일지를 적어 나가는 화자가 만들어 내는 극적인 대반전 결말 부분은 지금 생각해도 오금이 저릴 정도다.
이상은 어렸을 때 읽은 책들 얘기고, 읽기 형식으로 쓴 소설 중 요즘 즐겨 읽는 것은 에드거 앨런 포의 작품이다. 포는 일기 형식을 빌려 짧고 괴기스러운 작품을 많이 써냈는데 그중에서도 단연 으뜸은 〈검은 고양이〉다. 내친김에 얼마 전에는 포의 소설 전집인 《우울과 몽상》(하늘연못 2002)이라는 커다란 책을 구입했다.
일기라고 하는 것은 어떤 사건을 겪고 난 뒤에 그것을 회상하며 쓰는 것이다. 포의 〈검은 고양이〉는 이렇게 시작한다. “이제 나는 아무런 꾸밈 없이 이 이야기를 써내려갈 것이다. (…) 그 사건들은 나를 공포에 질리게 했고, 고통스럽게 했고, 그리고 나를 파멸시켰다.”(《우울과 몽상》, 644쪽) 즉 주인공이자 이 수기를 쓴 당사자는 지금까지 어떤 엄청난 일을 겪었으나 죽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일로 파멸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런 일을 직접 겪은 당사자가 들려주는 이야기처럼 시작하니
독자들은 기대감을 더욱 크게 갖는다. 포 전집에 들어 있는 다른 소설〈그림자 ―한 편의 동화〉도 비슷한 식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열기구 보고서〉는 아예 작품 후반부 전체가 일기 형식으로 되어 있다. 이 밖에도 〈병 속에서 발견된 수기〉, 〈윌리엄 윌슨〉 등 비슷한 형식으로 쓰인 단편이 전집에 여럿 들어가 있다.
말하자면, 어떤 엄청난 일을 겪었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글로 남겨진 이상 주인공은 그것을 기록할 마음을 먹고 시간을 냈다는 뜻이 된다. 이것이 일기의 핵심이다. 소설에서뿐 아니라 현실에서도 마찬가지다. 어떤 일을 겪고 나서 그것을 돌아보며 정리해 볼 수 있는 마음가짐은 신이 인간에게 선물한 축복이라고 할 만하다. 우리는 그것을 얼마큼 누리고 있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우울과 몽상 – 에드거 앨런 포 소설 전집
홍성영 옮김|하늘연못 펴냄|2002년

 


한두 문장이 마음속 시냇물이 되어

브램 스토커의 유명한 장편 소설 《드라큘라》(열린책들 2000)는 이야기 전체가 일기, 수기, 편지로 돼 있다.
특히 이 소설의 핵심이라 할 초반부 ‘조너선 하커의 일기’는 영국인 변호사 하커씨가 드라큘라 백작의 초대를 받아 루마니아로 향하는 여정을 담고 있는데, 극도의 공포심을 이겨 내고 매번 일기로 그날의 일을 기록해 두는 장면이 압권이다.
하커 씨는 드라큘라 백작의 성에 도착하고 나서 과하다 싶을 정도로 자세한 내용까지 일기에 적어 둔다. 이런 일기에 독자들마저도 조금 지쳐 있을 무렵, 5월 8일에 쓴 일기를 통해 마침내 그 이유를 밝힌다. “일기를 쓰면서 얘기가 너무 산만해지는 건 아닌지 걱정을 했었는데, 이제는 처음부터 세세한 것까지 기록해 두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드라큘라》, 49쪽) 이곳에서 일어나는 기괴한 일들이 결국 자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곧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확신이 생긴 것이다. 이런 확신 역시 지금까지 일기를 썼기에 가능한 일이다. 일기를 통해 지난 일들을 종합해서 검토해 보면 드라큘라 백작이 사실은 사악한 괴물이라는 퍼즐 그림이 완성된다.
나는 사람들에게 일기 쓰기를 권할 때마다 자연스럽게 포와 브램 스토커의 소설 이야기를 곁들인다. 사람들은 미래를 향해 살아가지만 그 미래라는 것은 수많은 과거들이 겹쳐서 생긴 나이테다. 매일 즐거운 기분으로 사는지, 반대로 괴로움 속에 하루하루를 보내는지는 상관없다. 죽음이 닥치기 전까지 우리는 매일 새로운 날을 맞이해야 한다. 오늘 아침 잠자리에서 깨어난 사람은 어제라는 과거가 있었다는 걸 기억한다. 아무 것도 아닌 얘기 같지만 아침에 깨어서 이런 생각을 해 본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마음이 풍요롭다. 직접 쓰지는 않았지만 마음속 한 곁에 일기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일기를 쓴다는 건 마음의 밭을 가꾸는 일이다. 돌아보고 반성하며 지난 일들을 조금 떨어진 곳에서 넓게 볼 수 있다면 기름진 밭이 될 것이고, 거기에 뿌린 씨앗은 시간이 지난 다음 건강한 열매로 돌려받는다. 그리고 결국 그것은 자기 혼자만 누리는 이로움이 아니라는 걸 안다.
생활에 여유가 없고 마음속부터 메말라 있다고 생각된다면 지금부터 일기를 써 보도록 하자. 처음부터 거창하게 할 필요도 없다. 하루를 돌아보며 한두 문장 간단히 적어 보면 그 순간 이미 마음속에 가느다란 시냇물이 흐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드라큘라
브램 스토커 지음|이세욱 옮김|열린책들 펴냄|2000년

 

 

↘ 윤성근 님은 서울 은평구에서 ‘이상한나라의헌책방’을 운영하며 책을 쓰는 작가입니다. 작가 루이스 캐럴을 좋아해서 앨리스 관련 자료를 수집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심야책방》, 《헌책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探書의 즐거움》, 《나는 이렇게 읽습니다》 등을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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