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호 2017년 1월호 [특집] 특집-살리는 말

[ 핵발전소 사고를 그린 영화 〈판도라〉를 보며 탈핵의 희망을 ]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다

글_사진 정미영

지진이 일어나 핵발전소 사고로 이어지는 내용의 영화 <판도라>(2016)가 조용히 인기를 끌고 있다. 최근 경주를 비롯하여 지진이 잇따르면서 영화 내용이 더욱 현실감 있게 다가온 것. 지난해 12월 16일, 환경오염으로부터 아이들을 지키는 시민들의 모임 ‘차일드세이브’에서 영화 제작진, 핵발전 문제 전문가들과 함께하는 간담회를 마련했다.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을 위해 불을 훔쳤다. 이에 제우스는 노했다. 제우스는 인간을 벌하기 위해 지상에 인류 최초의 여자를 보낸다. 판도라. 판도라는 호기심 때문에 제우스가 들려 보낸 상자를 열어서 더 많은 불행을 만들었다. 인간의 손으로 인간을 벌하는 신의 노련함. 그 상자 안에 ‘희망’만이 마지막으로 남았다는데, 우리는 지금 희망을 보는가. 2016년 12월, 영화 <판도라>가 개봉했다.

 

 

현실이 되고 있는 디스토피아
나는 한국 영화의 신파적 요소를 아주 싫어하는 편이다. 신파가 가족·국가 등을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두고 옹호하는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가족은 원래 불화하며, 국가는 개인을 억압하기 일쑤이다. 신파는 이것을 감춘다. <판도라>에도 신파적 요소가 있다, 분명히 말하지만. 구성도 전형적이다. 하지만 감정이입을 안 할 수가 없다. 만약 주제가 ‘핵발전소’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 영화를 <해운대>(2009)와 같은 그저 그런 재난 영화 목록에 올리길 주저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몇 년 전부터 ‘핵 사고’는 나에게 그저 그런 재난을 의미하지 않는다. 일본 후쿠시마 핵발전소 폭발 사고가 내게 준 선물은 암 발생에 대한 공포, 그리고 돌이킬 수 없는 재난을 마주하는 데서 오는 절망이었다. <판도라>는 실제로 핵발전소 사고가 일어났을 때 발생할 일들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잘 보여 준다. 까짓것 신파쯤은 상쇄하고도 남을 ‘리얼리티’가 이 영화에 있다.
영화를 보는 내내, 핵발전소를 지은 이상 우리가 유토피아를 꿈꾸는 것이 지나친 낭만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지금 우리는 최악으로 상상한 것은 무엇이든 이루어지는 디스토피아의 세계를 몸소 통과하는 중이지 않은가. 한국수력원자력이나 원자력안전위원회의 거짓말을 통해서 정부의 무능과 조작을 실감해 온 터라 <판도라>가 오히려 너무나 현실 같은 느낌이 들어서 영화 보는 내내 나도 도망치듯 영화 속 시민들처럼 달리고 달렸다. 영화적 구성이니, 구조니, 색감이니 들이대는 것이 소용없는 이유는 이 영화가 ‘허구적 장치’가 아니라 정말로 일어날 수 있는 ‘현실적 세계’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차일드세이브 회원들은 간담회 후 피켓을 들고 탈핵 의지를 모았다.

 

 

반경 20~30km 안에서는 사실 대책이 없어
차일드세이브와 환경운동연합이 공동 주최한 <판도라> 상영 후 간담회에는 김혜정 환경운동연합 에너지기후위원회 위원장, 한병섭 박사, 백경숙 프로듀서, 오동진 영화평론가가 패널로 참여했다. 패널들은 핵발전의 안전은 누구도 확언하지 못하며, 체르노빌과 후쿠시마의 핵발전소 사고로 지금까지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가고 있고, 현재 한국에는 허술한 대피 매뉴얼만 존재한다고 이야기했다. 한국은 지진에 거의 무방비 상태이며 실제 사고가 났을 때 대피 시나리오조차 제대로 없기 때문에, ‘지금’ 사고가 난다면 30분에서 1시간 사이에 반경 20~30km 안의 사람들은 대부분 피폭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 20~30km 안에 350만 명이 살고 있다. 영화 간담회에 온 많은 사람이 <판도라>가 현실이 될 수 있다고 느꼈는지 불안에 찬 물음들을 날카롭게 터트렸다. 실제로 방사능 영향은 3천 년을 가고, 체르노빌의 방사능은 사방 2천 km까지 날아 갔다. 한국 어디에도 방사능 안전지대는 없다. 환경운동 단체들은 정부와 지자체에 대피 시나리오를 마련하라고 촉구하고, 노후한 핵발전소 재가동 승인을 취소하기 위해 재판을 벌이며, 정부의 신규 핵발전소 건설에 반대하는 운동을 펼치고 있다. 관객들의 희망이 불안을 뚫고 나오는 지점이다.
인류는 원자력을 발견하고 핵발전소를 세웠다. 우리는 이제 우리 스스로를 시험에 들게 하고 있다. 30년 이상된 노후 핵발전소 월성 1호기를 재가동하라는 승인이 떨어졌다. 모두가 광화문에 나가 있는 동안에 쥐도 새도 모르게. 그리고 신고리 5·6호기 건설이 진행되고 있다. 1979년 미국 스리마일에서, 1986년 우크라이나 체르노빌에서, 2011년 일본 후쿠시마에서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고 우리는 끝없이 펼쳐질 불행의 자기장 안으로 들어 섰다. 미국과 프랑스, 일본, 러시아에 이어 한국. 핵발전소 보유 개수에 따른 순위에 따라 상자는 차례로 열렸고, 다른 나라들도 같은 지구권에 있기 때문에 불행을 사이좋게 공유했다. 지구는 나쁜 의미에서 하나다. 탈핵운동이 국가를 넘어설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영화 <판도라>
박정우 감독 | 김남길, 김주현, 정진영, 김영애, 문정희 출연
 | 136분 | 12세 관람가

 

 

“희망하라, 탈핵하라”
내가 참여하는 차일드세이브는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모인 곳이며 탈핵을 주된 방향성으로 한다. 한번 가동하면 단숨에 멈출 수 없는 핵발전소, 그리고 그곳에서 발생하는 각종 방사성 폐기물을 오랫동안 안전하게 처리할 방법을 현재의 인간은 모른다. “값싸고(장기적으로는 가장 비싸다!), 환경을 오염시키지 않고(꾸준히 오염시키고 심지어 치명적이다!), 꼭 필요하며(전력은 남아돈다!), 안전하다는(설계·시공·유지에서 모두 여러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이유로 국가의 미래와 아이들의 삶을 저당잡혀서는 안 된다. 내 아이와 우리 가족의 먹거리만 조심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한국은 삼면이 바다이기도 하지만 삼면이 핵발전소이기도 한 나라이므로. 한국에서 산다는 것은 한국의 핵발전소뿐만 아니라 일본과 중국의 핵발전소 영향권에 있다는 말과 다름 아니므로.
더는 새 핵발전소를 짓지 말아야 한다. 가동하고 있는 핵발전소들도 점차 폐로해 나가야 한다. 재생에너지는 실용성이 없다는 편견은 독일을 비롯한 여러 선진국들에서부터 깨지고 있다. 이윤을 추구하는 대기업들도 재생에너지 사업의 실용화에 적극적일 정도다. 당장 환경운동연합, 시민방사능센터 같은 여러 탈핵운동 단체의 목소리에 잠시만 귀 기울여 보자. 보면 해야 할 일이 보인다. 들을 수 있는 강의가 있고, 기부할 수 있는 계좌가 있고, 참여할 수 있는 재판이 있으며, 작성할 수 있는 서명지가 있다. 판도라의 상자는 열렸다. 열렸다는 사실도 모른 채 그렇게 열렸다. 우리에게 지금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 이외의 ‘희망’이 있는가. 그러므로 탈핵운동만이 답이다.

 

 

↘ 정미영 님은 미세먼지와 GMO, 환경호르몬, 방사능에 대한 유난으로 스스로 삶을 피곤하게 만들고 있는 세 아이의 엄마이며, 이런 유난과 예민함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동력이라고 믿는 차일드세이브의 운영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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