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호 2017년 1월호 [특집] 특집-살리는 말

[ 사회를 살리는 말 ]

정의롭고 공정하게

글 박금자

나쁜 일에서도 교훈은 얻어진다. 최악의 국가 정치 상황을 만든 박근혜 대통령 사태 안팎에서 그가 한 말과 사용한 단어를 음미하면 ‘이런 사람이 대통령이었나!’ 싶고 교훈이 절로 새겨진다. “이 사람처럼 사고하고 이 사람같이 말해서는 안 되겠다!”

 

 

호흡하는 만큼 많이 쓰는 단어
‘하나의 단어로도 그 단어를 사용한 사람이 어떻게 사고하는가를 판단할 수 있다’고 사회언어학자들은 말하는데, 박근혜 대통령이 국회 탄핵소추안 가결 직후에 했다는 말 속에 쓰인 단어 ‘시녀’는 바로 그 적절한 사례일 것이다.
“최순실은 내 시녀 같은 사람인데, 그런 사람 때문에 나라가 이렇게 됐다.” 박 대통령은 측근들에게 이렇게 토로했다고 한다. 지금은 2017년, 21세기다. ‘시녀’라니, 이 무슨 엉뚱한 표현인가? ‘시녀’라는 단어 사용은 자신은 ‘청와대=왕조’의 공주이며 ‘최순실은 시중드는 여자’라는 사고 단면을 보여 준다. ‘시녀’를 비유적으로 사용한 것 같지는 않다. “통일은 대박”이라는 식의 수준 낮은 비유를 해 온 데다가, “그런 사람 때문에 나라가 이렇게 됐다”고 표현한 것을 보면 ‘난 책임이 없어’라는, 그의 특기라고 할 회피관점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새해에는 우리 모두 시간을 내어, ‘사회적으로 내가 하는 말’에 대해 열린 생각으로 개념도 정리해 보고 공부도 조금 해 보자. 목표는 ‘열린 생각을 하여 사고 역량을 늘리고 사회에서 정의롭고 공정하게 말하기’로 정하면 어떨까?
말은 사회생활에서 정말로 중요한 도구이다. 첫째, 사용하는 빈도로 보아도 중요하다. 우리는 호흡이나 심장 고동만큼이나 말을 빈번하게 사용한다. 사람의 맥박은 하루 평균 10만 번 뛰고 호흡은 하루 평균 2만 3천 번 한다. 그런데 하루에 1시간씩만 대화하고 1시간씩만 독서하고 1시간씩만 TV 뉴스를 본다고 쳐도, 2만 5천~3만 개의 단어를 처리하고 산다는 계산이 나온다. 둘째, 사회에서의 다툼 대부분이 말싸움에서 비롯됨을 돌아보면, 말이 얼마나 중요한 인간관계의 도구인가 깨닫게 된다. 사람은 침묵으로 의사표현을 할 때도 가끔 있지만, 말로써 서로가 소통한다. 말이 있어서 ‘나’와 ‘너’는 화자와 청자로 바꿔 가며 의사소통하고, ‘지금’이 아닌 과거와 미래, 그리고 ‘여기’가 아닌, 여기서 가깝거나 먼 다른 곳에서 일어난 일을 서술한다. 뿐인가. 말로써 문화특징적인 유산을 공유한다.
그렇지만 우리 대부분은 학업을 마친 뒤부터 말에 대해 공부를 거의 하지 않는다. ‘사회적인 말’ ‘사회적 의사소통’의 개념을 찾아본 적도 거의 없다. 자유로이 구사할 수 있는 나의 모국어 실력을 믿고 사회에서 나와 다른 남을 내 잣대로 이름 부르거나 규정하며 존중과 배려는 없이 말해 오지 않았던가? 사실, 어휘가 빈곤하다면서 어휘력 늘리기 공부하는 어른을 본 적도 거의 없지만, 적합한 사회적 의사소통 방법을 궁금해하며 공부하는 어른도 본 기억이 드물다.
세상은 달라졌다. 우리나라 국민도 이제는 경제발전과 개발만을 중시하지 않는다. 국민들은 경제 못
지않게 정의와 공정성을 중요시하고 있다. 그래서 ‘너와 나는 다르다’고 구별하면 동의하지만, ‘너는 틀렸고 나는 옳다’고 차별하면 저항한다. 우리가 자주 보아 온, “‘틀린 것’을 고르시오. ‘옳은 것’을 고르시오”라는 객관식 시험문제는 세상에는 틀리고 맞는 것 두 가지만 있는 것처럼 보여 주지만, 세상은 그렇지 않다. 한국은 단일민족임을 자랑했던 단일성 위주의 사회에서, 다양성과 다문화를 적극적으로 아우르지 않고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사회로 바뀌었다. 국제결혼 인구가 10만 명, 이주노동자 수가 100만 명이 넘고 수많은 국민과 외국인이 나라를 수시로 넘나든다.
정의와 공정성, 다양성과 다문화가 중요해진 현재의 우리 사회에서는 ‘사회적 의사소통’ ‘사회적인 말’을 정의롭게 공정하게 할 필요가 있다. ‘무심코’, ‘본의 아니게’ 말했다 변명하면서 차별하는 말, 비객관적인 단어로 다른 시민을 부르거나 규정하는 말은 다른 이에게 상처를 주고 다른 이를 차별하고 다른 집단을 소외한다. 차별적인 말로는, 아름다운 ‘더불어 사는 세상’은 요원하다.

 

 

차별적인 말은 상처를 입히는 무기가 된다. 정의와 공정성, 다양성과 다문화가 중요해진 현재의 우리 사회에서 사회적인 말을 공정하게 해야 한다. 사진은 지난해 8월 언론중재위원회의 정기세미나 ‘사이버 공론장에서의 혐오와 모욕표현, 이대로 괜찮은가?’ 출처 블로터앤미디어

 

 

정치적 올바름 운동의 말하기
어떻게 말하는 것이 정의롭고 공정한 말하기일까? 현재로서는 최적의 말하기로 1970년대에 미국과 영국에서 시작된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 운동의 말하기를 제시하고 싶다.
용어가 익숙하지 않지만 ‘정치적 올바름’이 주장하는 정의롭게 말하기의 개념을 이해해 두자. “도덕적으로 공정하게 타자의 이름을 부르자는 진보적인 언어운동”이라고. ‘정치적’이라는 단어가 들어 있지만 현실정치와는 전혀 관련 없는 이 언어운동이 제안하는 것은 주로 단어에 집중된다. 예를 보면 ‘불구자’, ‘병신’이란 단어 대신 ‘장애인’을 사용하고, ‘고령자, 노인네’란 단어보다는 ‘어르신’을 사용하며, 늘어 가는 다문화가족 2세를 ‘혼혈’ ‘잡종’ ‘하프코리안’ ‘튀기’라고 비하하지 말자는 운동이다.
정치적 올바름은 여성주의자들이 남성 중심의 성차별적인 단어들을 중립적인 단어들로 바꾸어 쓰자고 외치면서 출발했다. 결혼을 했든 안 했든 여성을 남성 통칭어 ‘미스터(Mr)’와 수평적으로 여성 통칭어 ‘미즈(Ms)’로 부르자는 첫출발 때문에 여성주의운동이라고 오해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성별뿐 아니라 인종·장애·성적 지향·나이·문화 등 모든 측면에서 차별과 편견과 증오가 실린 단어와 표현을 공정한 단어와 표현으로 바꾸어 쓰자, 환경문제·식민지 역사·동물권리 등과 관련해서도 언어를 바꿔 쓰자는 것이 이 운동의 현재 흐름이다. 한국에서도 ‘온실효과’, ‘탄소제로배출’, ‘간접흡연’, ‘반려동물’이란 말이 등장했다. 정치적 올바름은 역사 이해에서도 비판적인 읽기를 권유한다. 예를 들면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1492년 아메리카를 발견했다”는 참 역사적 기록이 아니라, 유럽인이 언어로 ‘실재’를 ‘만들어 낸’ ‘의미 만들기’ 사례라는 것이다.
혹 차별적인 단어 쓰지 않기, 비판적 읽기가 과연 중요한가 질문하는 분들을 위해 학자들의 세 가지 현명한 답을 전한다. 첫째, 단어 사용 문제는 사소하지 않다. 둘째, 차별적인 말은 상처를 입히는 무기이다. 셋째, 말을 인위적으로 바꾸어 사용하면 생각도 다듬어진다.

 

↘ 박금자 님은 국어국문학 박사로, 중앙일보, 한국일보, 뉴시스 등 언론사에서 20여 년간 일했고, 미래사회의 변화 동력이 사회적기업에 있다고 보고 이와 관련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지은 책으로 《정의롭게 말하기 폴리티컬 코렉트니스》, 《인터넷미디어 읽기》, 번역한 책으로《사회적 기업가 정신》(공역), 《미디에이티드》(공역)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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