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호 2017년 1월호 [특집] 특집-살리는 말

[ 일터를 살리는 말 ]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글 김남인

2011년 여름 미국 애틀랜타. 인터뷰 상대는 전설적인 안무가 트와일라 타프였고, 그 앞에 선 나는 한국에서 이제 막 도착해 시차로 머리가 멍한 상태였다. 인터뷰 준비가 완벽하지 않아 긴장한 상태에서 ‘무슨 질문으로 한 방 먹이지?’ 하는 초조함이 얼굴에 드러나서였을까. 그가 먼저 질문을 던졌고 나는 기자 인생 최초로 받은 그 질문에 휘청했다. 내가 만나 본 유명인들은 자기 홍보로 1분 1초가 아까운 사람들이었는데.

 

 

마음을 허무는 질문
그는 사전에 내 약력을 받아 본 상태였다. 내가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자 나에 대해 정말 알고 싶다는 듯 눈을 빛냈다. 타프가 다시 물었다. “기자 일은 즐거운가요?” 순간, 내 마음속 무언가가 허물어져 버렸다. 기자 시절 선배들은 내게 ‘이기는 언어’를 가르쳤다. 상대가 누구든 쫄지 말 것, 질문은 바늘 끝처럼 뾰족하게, 꼭 들어야 하는 답이 나올 때까지 쉬지 않고 밀어붙이기…. 상대가 뭔가를 숨기고 있거나 거짓을 말하고 있다는 전제 아래 내가 원하는 정보를 움켜쥐려 눈이 벌겋던 시절이었다.
당시 한 달에 보름씩 출장을 다니던 때라 몸과 마음이 지쳐 있었다. 나는 “기자 일이 주는 도전은 짜릿하지만 가족과 시간을 못 보내 아쉽다”고 했다. 그러자 그는 내가 말한 짜릿함에 고리를 걸어 자신이 얼마나 일에 미쳐 있었는지 이야기했다. 아들 얘기를 꺼내며 가족과 시간을 못 보내는 아쉬움도 내비쳤다. 70대의 세계적 거장은 나와 눈높이를 맞추고 나에게 귀 기울이면서도 내 궁금증에 대한 정확한 답을 주고 있었다. 그가 보여 준 관심, 기꺼이 나눠 준 온기는 내 굳어 있던 머리와 입을 녹였고 그러자 즉흥적이지만 더 본질적인 질문들이 내 입에서 나왔다. 인터뷰는 터질 듯 풍성해졌다.
인터뷰를 하다 보면 상대가 나 아닌 질문지와 대화를 나누는 듯한 느낌을 받는 경우가 있었다. 책 출간을 기념해 만난 한 작가는 “이번에 새 책을 출간하셨는데요….” 운을 띄우자 무려 30분을 혼자 이야기했다. 나는 그 자리에 있을 필요가 없었다. 녹음기만 한 대 가져다 놓았다가 1시간 뒤 수거해 가도 문제없을 정도였다. 그런 식의 대화는 기사로 옮겨 놓으면 금세 시들해져 사람들의 마음을 열지 못했다. 반면, “당신 생각은 어떠세요?” “당신 이야기도 듣고 싶습니다”라고 말해 준 이들과의 인터뷰는 예상치 못한 재미와 가르침으로 가득했다. 그와 나의 화학작용 속에 태어난 기사는 사람들이 알아서 찾아 읽고 주변에 공유했다.

 

“요즘 고민이 뭐야” 말고
일터에서는 벌써부터 올해 운영 계획과 달성 목표에 대한 이야기가 숨 가쁘게 오간다. 사장은 신년사를 통해, 팀장은 새해 덕담을 통해 자신들이 요구하는 것부터 말한다. ‘집요한 근성’이나 ‘강력한 실행’ 같은 말이 온기 없이 허공을 떠돌게만 하지 말고 올해는 상대에게 먼저 귀를 열어 보는 건 어떨까? 사적인 이야기만 시시콜콜 나누고 일터가 동아리인 양, 동료가 친구인 것처럼 선을 넘나들라
는 소리가 아니다. 상사가 요즘 더 지쳐 보이는 이유, 후배가 직장 생활을 통해 원하는 것, 동료의 고민을 먼저 들어 보라는 것이다.
듣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 달라”고 손 내밀어야 한다. 무작정 “요즘 재밌어?” “어떻게 지내?”라고 물으면 듣는 사람은 질문이 성의 없다고 느끼든지 질문의 저의를 의심할 것이다. 후배와 마주 앉은 자리라면 “요즘 고민이 뭐야?”라고 물을 게 아니라 “요즘 거래처와 사소한 문제가 생겨서 지난주에 매일 야근하는 것 같던데, 해결은 다 된 건가?”라는 식으로 묻자. 사전에 얻은 정보에 고리를 걸어 상대를 도와주고자 하는 진심까지 녹인 구체적인 질문에 후배는 그간의 어려움을 모두 털어놓을 것이다. 당신이 관리자라면 후배의 말을 통해 조직 내 문제를 파악하고, 문제가 곪아 터지기 전에 예방할 수도 있다.

 

 

올해는 먼저 “이야기를 들려 달라”고 손을 내미는 사람이 되어 보면 어떨까. 단, 무작정 “요즘 어때?”라고 묻는 건 금물이다. 이미 알고 있는 정보와 상대방의 필요를 버무려 질문하자. 일터가 달라질 수 있다.

 

일방적이지 않는 게 소통의 비결
질문은 듣기 위해서만 하는 게 아니다. 기업에서 다면평가 최상위 점수를 얻은 팀장들을 취재할 기회가 있었다. 그들은 후배들로부터 리더십 최고 점수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팀 전체 성과 면에서도 손가락 안에 꼽혔다. 일과 관계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팀장들의 비결은 뭘까? 팀원들의 대답은 이랬다. “우리 팀장님은 일방적으로 이래라저래라 하질 않으세요. 보통은 임원이 원하는 걸 ‘하라면 해’라는 식으로 그대로 지시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런데 우리 팀장님은 질문을 많이 하세요. 잘 풀리지 않는 문제가 생기면 ‘이건 왜 이렇게 진행했지?’ ‘문제가 뭐라고 생각하지?’ 이런 식으로. 그런 질문에 답하다 보면 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서 일을 진행하고 있는 거예요.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니니 재미도 있고.” 지시 대신 질문으로, 팀장은 팀원들의 마음을 움직여 공동의 목표를 달성해 냈던 것이다.
상대에게 먼저 관심을 표현하는 게 어떤 변화를 만들어 내는지 경험해 보고 싶다면 일터에서 가장 까칠한 사람과 마주 앉는 올해 첫 회의를 기다려 보자. 비판을 개인적 공격으로 여기는 사람, 반대 없는 만장일치를 ‘관리’라고 생각하는 상사에게 제대로 된 쓴소리를 해 보는 것이다. 과학철학자인 대니얼 데닛은 서로의 감정은 보호하면서도 논점을 잃지 않고 대화할 수 있는 ‘친절하게 비판하기’를 소개했다. 먼저 비판하기 전에 상대 의견을 자신이 이해한 바대로 정리하고 다시 표현한다. 상대의 입에서 “고마워요, 내가 아까 그렇게 표현했더라면 좋았을 텐데”라는 말이 나올 만큼 명료하고 공정하게 말이다. 그런 다음 상대의 의견 중 자신이 동의하는 부분은 뭔지, 그의 생각으로부터 내가 배운 점은 무엇인지 언급한다. 그런 뒤 직언을 해야 상대가 마음을 열고 당신의 말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새해에는 내 할 말만 하고 만족하기보다 상대에 대한 관심을 질문과 귀 기울여 듣기를 통해 표현하며 대화를 시작하자. 최고의 존중을 받은 상대 역시 당신에게 손을 내밀어 이야기를 청할 것이다.

 

↘ 김남인 님은 10년간 신문기자로 일하다 기업으로 자리를 옮겨 본격 직장 언어를 탐구하고 있습니다. 듣기, 말하기, 쓰기를 잘해야 즐거운 직장 생활이 가능하다는 걸 알았고, 나만 알고 있기 아까운 현실적인 조언을 책 《회사의 언어》에 담았습니다. 현재 SK주식회사에서 브랜드 담당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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