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호 2016년 11월호 살림,살림

[ 11월의 문화 나들이 ]

생경함이 공감이 되다

글 안태호 편집위원

그가 “그렇게 안 하고 싶다”고 말한 이유는
연극 <필경사 바틀비>
여기 한 사내가 있다. 변호사 사무실에서 서류를 베껴 쓰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는 남자. 과묵하고 다른 이들보다 업무 실적은 월등하다. 그러나 어느 날, 자신을 고용한 변호사의 지시를 거부하고 이내 모든 인간적인 반응과 활동마저 중단한 채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 바틀비가 변호사에게 “그렇게 안 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하는 장면과, 스스로 자비롭고 관대하다고 생각하는 변호사가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사무실도 떠나지 않는 바틀비를 두고 전전긍긍하는 모습은 웃음과 긴장, 안타까움과 의아함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원작 소설 <필경사 바틀비>는 《모비딕》으로 유명한 허먼 멜빌이 19세기에 발표한 단편이다. ‘월가의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은 원작은 미국 자본주의의 축소판인 월가의 법률사무소를 배경으로 자본주의가 낳은 비인간적인 소외의 풍경을 짚어 낸다. 바틀비는 낙오한 인간인가, 아니면 소극적이나 궁극적인 저항을 실천하는 인물인가. 바틀비의 말은 놀랍도록 생경하고 기이하다가도 연민과 공감의 정서를 환기한다. 극단 ‘바다와 문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부산에서는 처음으로 무대에 올린다.
11월 3일부터 5일까지, 부산 한결아트홀, 문의 051-554-8209

 

 

 

한국의 프리다 칼로가 궁금하다면
전시 <제5회 양평을 빛낸 원로작가전>
벌거벗은 남성이 다리를 쩍 벌린 채 의자에 앉아 신문을 읽고 있다. 역시 벌거벗은 채로 무릎을 꿇고 허리를 구부린 여성은 남성의 오른발을 세숫대야 물에 담가 씻고 있다. 여성의 머리에 씌워진 학사모는 그녀가 고학력자임을 알려 준다. 노랑과 파랑으로 물결치는 색채감은 여성의 흔들리는 심리를 대변한다. 김인순의 <현모양처>는 가부장제 사회에 던진 일종의 폭탄과도 같았다. 1986년에 발표된 작품이지만 지금 봐도 충격이 덜하지 않다.
그러나 정작 작가는 이 그림을 출품한 전시에서 한 여성학 강사가 던진 질문에 충격을 받았다. 질문은 “여성의 현실이 이런 그림으로 바뀔 것 같은가”였다. 김인순은 자신의 그림이 중산층 여성의 고민만을 담아내고 있다고 판단, 노동 현장에서 생생한 삶의 모습을 잡아내려는 노력을 계속한다. 이후 작가는 더 본질적인 문제의식으로 회귀, 여성이 지닌 생명의 근원성을 탐구한다. 이는 마치 프리다 칼로가 자신의 날카로운 자의식을 초현실주의 기법으로 그려 내는 동시에 대지와 우주의 기운을 작품에 담아낸 걸 연상시킨다. 어떤 사람은 천경자를 한국의 프리다 칼로라고 하지만, 나는 김인순이야말로 그 이름에 값하는 작가라고 생각한다.
‘양평을 빛낸 원로작가전’이라는 제목으로 열리는 이번 전시에서는 종교적 신념을 바탕으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이우설 작가의 작품도 함께 감상할 수 있다.
11월 24일까지, 경기 양평군립미술관, 문의 031-775-8515

 

김인순, <뿌리>(1999). 이미지 제공: 양평군립미술관

 

 

↘ 안태호 님은 문화정책과 기획 영역에서 활동해 왔습니다. 삶과 예술이 만나 섞여 드는 과정에 관심이 많습니다. 예술과도시사회연구소협동조합 이사를 맡고 있으며, 만화를 보는 순간이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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