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호 2016년 11월호 살림,살림

[ 옛 농부들의 농사 이야기-추위 앞의 한 해 마무리와 또 다른 준비 ]

겨울 들머리에서 김장하고 시사 지내고

글 전희식 _ 그림 전새날

 

 

어떤 이가 무서리가 내린 빈 밭 배추 골 날망을 발끝으로 툭툭 치면서 어슬렁거리면 뭐 하는 짓인지 대충 안다. 어쩌다가 발끝에 부딪는 느낌이 전해지면 바로 캐낸다. 배추 뿌리다. 물에 씻으면 맛이 달아난다. 낫이나 대나무 칼로 껍질을 벗기고, 흙이 좀 묻어 있으면 어떠랴 슥 베어 물고 씹으면 달근달근하다. 진한 향까지 풍긴다. 배추 뿌리는 톡톡 부러지듯이 씹힌다. 아래윗니가 부딪기도 전에 톡 부러지며 씹힌다.

 

 

배추 뿌리의 알싸한 맛
배추 뿌리는 김장철에 은근히 주목받는다. 밭에는 어쩌다 남겨지는 것이고, 집에선 배추를 다듬는 과정에서 차곡차곡 쌓인다. 김장을 마치면 수북한 배추 뿌리를 꼴망태에 담아서 연장통 위에나 대청마루 기둥 옆에 둔다. 드나들며 한 뿌리씩 집어 들고 나무껍질처럼 터덜터덜한 껍데기는 깎아 내고 먹는데, 무보다는 맛이 훨씬 좋았다.
너무 크게 베어 물면 이를 다칠 수가 있다. 그만큼 단단하다. 배춧잎과 함께 끓이는 우거지 국에도 들어가고 요즘은 술안주나 간식거리로도 쓰이는 모양이다. 아예 뿌리배추가 별도의 씨앗으로 개량종이 나와서 판매되고 있다. 배추 뿌리가 김장철의 조연 노릇을 톡톡히 하는 셈이다.

속도 안 차고 배춧잎이 쩍 벌어진 못생긴 놈일수록 배추 뿌리는 크고 굵다. 꼭 순무 같은 배추 말이다. 원래 배추의 조상은 무다. 겨자나 양배추가 분화될 때 종 분화를 했기 때문에 토종 배추인 구억배추나 개성배추는 무잎처럼 배춧잎이 길게 뻗고, 짚으로 묶지 않으면 속도 차지 않는다. 대신 무의 직계 자손처럼 뿌리가 발달해 있다.

 

겨울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들
김장은 겨울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다. 김장을 할 때는 입시 때처럼 꼭 날카로운 추위가 몰아친다. 날씨 귀신이, 시험 치는 수험생들 머리가 맑고 정신이 또록또록 하도록 추위를 주는 거라면, 김장하는 날도 김치가 잘 쉬지 않도록 하려는 건가 싶기도 하다.
한 집에 보통 두세 접씩 김장을 했으니, 200~300포기의 배추김치를 떠올려 보면 그것이 얼마나 큰 집안 대사인지 짐작이 간다. 배추 다듬고, 소금에 절이고, 씻고, 고춧가루에 생강이나 마늘을 버무린 양념 넣고, 김장독 묻고 하는 지난한 과정을 거치는 건 김장이 다음 해 봄까지 골마지가 피도록 먹어야 하는 겨울 반찬의 주인공이어서다.
겨울의 시작은 이것만이 아니다. 바쁜 하절기에 손볼 겨를이 없었던 집 울타리도 고치고, 외양간은 거적이라도 둘러서 추위를 막아 집짐승들을 단속해야 한다. 밭에는 깍짓동을 세우고 옥수숫대도 한데 모아 놔야 겨우내 소먹이로 쓰거나 아궁이 땔감으로 쓸 수 있다. 맞다. 땔나무하기가 시작되어도 겨울의 시작이다.

 

시사 지내는 때의 들녘
집 울타리는 산에서 싸릿대를 쪄 와서 만들기도 하지만 집 뒤꼍에 있는 산죽이나 조릿대를 가지런히 세워서 위아래와 중간에 가로대를 넣고 어긋지게 질러 만들었다. 가장 손쉬운 것은 수숫대다. 가볍기도 하고 꼿꼿해서 작업하기가 좋다. 집 울타리가 짱짱해야 남의 집 개나 닭이 가을마당을 기웃거리지 않고, 여름내 흐트러진 집 안을 단정하게 추스를 수 있다.
여기까지가 11월 중순경에 끝난다. 음력으로도 10월 보름께다.
이때는 아직도 시골 마을에 명맥이 이어져 오는 시사(時祀)를 지내는 시기다. 이는 정월 대보름 전야에 지내는 당산제 또는 동(신)제와는 다르다. 당산제는 동네나 고을 단위에서 조상신과 하늘에 지내는 제의지만, 시사는 집안에서 지내는 5대조 이상 되는 조상 제사다. 4대조인 고조까지는 죽은 날에 맞춰 기제사를 지내고 그 이상 조상을 한꺼번에 모시는 것이다.
시사가 있는 날은 두루마기를 정갈하게 다려 입고 조상 묘를 향한다. 음식도 햇곡식과 햇과일로 마련하고 귀한 생선도 준비한다. 액을 막고 풍년을 기원하는 제례지만 사실은 한 해 동안 맺히고 묶인 사람들 간의 앙금을 푸는 자리이기도 하다.
세상살이에서 사람에게 치여서 입는 상처가 가장 크고 오래간다.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그중에서도 가족이나 친인척 간에 생기는 앙금은 두껍기도 하고 잔가지도 많다. 시사를 모시면서 훌훌 털어 내는 것이다. 농사 중심의 사회에서 집안이 쪼개지면 농사 정말 힘들다. 〈농가월령가〉의 10월령을 보면 “형제란 한 기운이 두 몸에 나뉜 것이니…”라며 네 것 내 것 따지지 말고 서로 귀하게 여기라는 구절이 있다. 시사를 준비하고 모시면서 집안 내 다툼과 배척 들을 다시 융화한다. 집안이 편해야 농사도 잘되는 사회였다.
새벽에 내린 찬 서리가 채 녹지 않은 이른 들판에 흰 두루마기들이 펄럭이면 시사 지내는 집안 사람들이다. 졸졸 따라가면 배가 터지도록 얻어먹는다. 시사의 제주는 종손이나 연장자가 하지만 큰 집안에서는 음식 장만과 제상 보는 일 전체를 한 가정에 위임하기도 한다.
이 일을 위임받은 사람은 한 달 전부터 몸가짐, 마음가짐을 정결하게 한다. 상갓집이나 잔칫집에는 가지도 않지만 어쩔 수 없이 인사차 가더라도 시신을 하관하는 때를 피한다든가 잔칫집 유흥 시간을 피한다.

 

 

집안이 편해야 농사도 잘되고
시사 사흘 전부터는 집 대문에 금계를 치고는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 동네 사람들도 제주에게는 말도 걸지 않아야 한다. 이때부터 목욕재계하고 치성을 올리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음식은 물론 각종 생활
도구들이 다 자기 몫이 된다. 그래서 매년 모시는 시사는 집안에서 살림이 좀 어려운 사람에게 그 일을 맡긴다. 시사 지낼 때는 제상의 그릇이나 기타 용품을 새로 사는 것이 많다. 더구나 돼지머리를 제상에 올려 둔 채 산을 내려오는데, 다음 날 슬그머니 올라가 봐서 산짐승이 좀 뜯어 먹었으면 조상신이 와서 잡수셨다면서 그대로 가져와서는 머리 고기를 썰어 나눠 먹고 가마솥에 푹 고아서 몇 날 며칠 포식을 할 수 있다.
종가의 전체 시사가 끝나면 아래 자손들끼리 작은 제를 따로 지내기도 했다. 9대조 아래 자손들끼리 모인다든가 7대조 아래 자손들끼리 모이면 또 몇 모둠이 생겼는데, 그러면 주렁주렁 데리고 온 자녀들 인사·소개하느라 한나절이 걸리곤 했다.
조선 시대가 끝나면서 색다른 현상 하나가 생겼다.
시사는 집안의 대사라 종실이나 종중의 공동 재산으로 제를 모시는데, 교회 나가기 시작한 사람들이 한둘 생기기 시작하자 그 사람들은 세시풍속 자체를 미신이라 여기고 절도 하지 않을뿐더러 제사 지낸 음식도 먹지 않기 때문에 집안 재산으로 치르는 행사에서 국물 한 그릇 못 먹는 처지가 된 것이다. 종손이면서 교회 나가는 경우에는 종손의 역할과 권한까지도 차손에게 물리는 일도 종종 있었다. 유교적 분위기가 워낙 강했기에 이런 문제를 공개적으로 꺼내고 분쟁을 겪은 경우는 드물지만 어색한 장면들이 연출되곤 했다.
집안의 시사가 되었건 동네의 동제가 되었건 제를 모시는 일은 다들 부담스러워했다. 서낭제 또는 성황제라고 일렀던 동제는 제를 올린 뒤에 동네가 편하고 별 탈이 없으면 다 그냥 그러려니 하지만, 자꾸 안 좋은 일이 생기면 부정 탔다는 말이 나오기 때문이다.

 

김칫국 우물과 관광 상품
입동(11월 7일) 지나고 보름이면 땅이 얼기 시작하는 소설(11월 22일)이다. 방고래에 모인 검댕이나 재를 쑤셔 내는 구두질과, 바람을 막기 위해 벽체 맥질하기가 서둘러진다. 감을 깎아 매달거나, 무를 작게 잘라 멍석에 널어 말리거나, 호박을 가늘고 길게 썰어 호박오가리를 만들기도 하는 때다. 집집마다 처마 밑에는 곶감을 매단 줄이 출렁출렁한다.
이제는 이런 것이 관광 상품이 되었다. 경남 남해 홍현리 가천마을이 대표적이다. 다랑이를 보러 관광객이 몰려오자 동제를 공개적으로 올리고 있다. 마침 앞바다에 있는 노도라는 섬이 조선 중기에 《사씨남정기》를 쓴 유명한 학자 김만중의 유배지이기도 해서 관광객의 발길이 늘고 있는데, 여기서 매년 음력 10월 보름이면 농악 놀이도 하고 횃불 놀이도 하면서 동제를 지낸다.
풍물 굿이 농경의례였기도 하고 제천의식에서 비롯된 만큼 세시풍속이 관광의 대상이 되는 것은 어색하지 않다.
아주 오랜 옛날에 봤던 김칫국 우물이 떠오른다. 봄에 얼갈이김치가 나오기 시작하면 골마지가 핀 묵은 김장 김치는 뒷전으로 밀리는데, 얼갈이김치 담은 통을 두레박 끈에 묶어 우물에 내려 물에 반쯤 잠기게 담가 두면 우물이 곧 냉장고였다.
동네 우물에 두레박을 내릴 곳이 없을 정도로 끈에 매달린 김치 통이 즐비했다. 그러다 김치 통 하나가 뒤집어지면서 우물이 온통 김칫국물이 되어 버렸던 기억이 있다. 김칫국 우물, 이것도 관광 상품이 될 순 없을까?

 

 

↘ 전희식 님은 농민생활인문학 대표로, 전북 장수군 산골에 살면서 《똥꽃》, 《시골집 고쳐 살기》, 《소농은 혁명이다》, 《삶을 일깨우는 시골살이》 등을 썼습니다.
↘ 전새날 님은 그림책 작가를 꿈꾸는 제과사입니다. 여행과 만화, 맛있는 음식과 겨울을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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