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04호 2009년 봄 살림,살림

[ 생각거리 ]

먼 거리에서 온 설탕, 어떻게 볼 것인가

글 이상국

 


한살림은 안정적인 식량공급 기반인 우리 농업과 지속가능한 식문화를 파괴하는 수입농산물은 취급하지 않는다는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 설탕 만이라도 다른 일반 생협의 공정 무역처럼 예외적으로 직접 수입 하자는 제안이 있었습니다. 이에 대한 토론의 결과 ‘공정무역이 외국의 어려운 생산자에게 경제적 도움을 주기 위한 뜻으로 시작된 것이기는 하지만 지구온난화를 가중시키고 지역자립의 생활양식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면에서 일반적인 세계무역과 똑같은 문제를 안고 있다. 그러므로 전체 생명계의 지속가능한 공존을 위한 자립과 자급의 지역자원 순환형 생활양식을 지향하는 한살림은 공정무역에 직접 나서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 따라서 공정무역 설탕 또한 의도적인 협동운동 물품으로는 취급하지 않는다. 대신 제3세계 가난한 민중에 대한 연대 활동은 그 지역 민중의 지역 순환적 생활양식을 이룰 수 있는 지원연대의 길을 찾아본다.’는 내용으로 정리되었습니다.


아울러 한걸음 더 나아가 육류와 마찬가지로 설탕 소비 자체를 줄여 나가는 식생활활동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나누었습니다. 왜냐하면 식재료로써 많은 문제를 일으키는 설탕의 소비 확대가 개인의 생존과 자녀들의 지속가능한 삶에도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까운 먹을거리의 창으로 설탕을 들여다보면서 왜 우리가 이 땅의 먹을거리의 변화를 고민해야 하는지 되짚어 보았으면 합니다.


한살림은 온 생명이 더불어 사는 생명살림세상을 이루고자 이 땅에 태어났습니다. 오늘의 생명위기는 인간들에 의해 제기된 문제이기 때문에 인간의 행동을 지배하는 생각과 생활양식을 원래 생명세계의 존재원리대로 바꾸는 일을  ‘한살림운동=생명가치관 전환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출발한 것입니다.


이러한 활동을 법에 보장된 틀로 진행하기 위해 도시지역에서는 ‘소비자생활협동조합’ 형태로, 농촌지역에서는 ‘한살림생산자연합회’의 모습으로, 물류는 주식회사 형태인 ‘한살림사업연합’으로, 전국적인 틀로는 ‘사단법인 한살림’이라는 형태로 꾸려 나가고 있습니다. 한살림이 일반 소비자생활협동조합처럼 ‘직거래로 값싸고 생산과정이 확인된 안전한’ 물품을 공동구입하는 활동만을 위해 시작했다면, 전 세계의 안전한 모든 물품을 취급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살림은 인간이 다른 생명과 공존하며 살아야 인간 자신의 생명도 지속가능할 수 있다는 각성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생태계를 위협하는 문제를 등한시한 채 안전성이나 경제적 인간관계의 배려만을 생각하며 공급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음식은 우리 생명의 지속성을 규정한다


지속가능하지 않은 화석에너지에 의존해 생산, 이동하는 먹을거리는 우리 인간들의 생명을 언제라도 갑자기 멈추게 할 수 있습니다. 자본의 논리와 산업적 사슬에 길들여진 식습관은 우리가 바꾸기 위해 노력해야 할 일이지 협동의 힘으로 확산해야 할 대상이 아닙니다.


지속가능한 밥상 공급 체계로 보는 유기농 또한 ‘자연의 논리와 조화를 이루고 태양에서 에너지를 이끌어내는 생태계 순리에 맞게 음식을 생산하고 공급하는 체계’이기 때문에 생산 과정이 지속 가능한 방식이었다 하더라도 수입 유기농산물처럼 공급 과정에 더 많은 에너지를 사용한다면 유기농의 의미를 순식간에 잃게 됩니다. 따라서 수입 유기농 식품은 대안사회로 가는 운동을 위한 물품으로서 별다른 의미가 없습니다.

 

지구온난화를 줄여가는 음식이어야 한다


어떤 형태라 할지라도 먹을거리의 장거리 이동은 기름을 낭비하고 이산화탄소를 배출해 지구온난화를 부채질합니다. 설탕, 커피와 같은 기호식품은 그것을 재배하기 위해 대규모 열대우림까지 파괴하기 때문에 지구의 자정 능력마저 줄어들게 합니다. 지구인 한 사람에게 허용된 생태발자국은 1.8ha밖에 안 되는데, 2005년도 한국인의 생태발자국은 3.56ha나 된다고 합니다. 설탕의 이동거리는 4만2천784km나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수입물량 확대가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줄여가는 것이 다급한 일입니다.
국제 직거래를 통해 생산자에게 경제적 도움을 줄 수 있다고 하더라도 지구적 생존기반 자체가 허물어져 동반 죽음의 길을 재촉하는 결과를 빚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우리 농업에 피해 주지 않는 수입 먹을거리는 없다


‘먹는 행위는 농업 행위이다’라는 웬델베리의 말처럼 우리가 무엇을 먹느냐에 따라 우리 농업의 모습이 달라집니다. 식량의 소비량은 공산품과는 달리 먹는 사람의 위장 크기에 의해 결정되며 먹을거리는 옷처럼 여러 벌 구입해놓고 입고 싶을 때 입듯이 그렇게 쌓아놓고 소비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국내 생명 안전망인 식량자급에 도움이 되는 우리 농업생산물 이용은 수입농산물을 먹는 양만큼 어떠한 형태로든 불이익을 받습니다. 단맛을 낸다고 설탕을 넣은 후에, 중복하여 꿀과 조청도 같은 양을 넣게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설탕의 대체 기능을 갖는 우리 농산물이 없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는데, 오랜 세월 동안 우리는 쌀을 원료로 한 감주(식혜)와 조청, 꿀로도 당류를 충분히 섭취해왔음을 떠올릴 필요가 있습니다.

 

지역 농산물의 지역 소비 없이 지속가능한 생명안전망 구축은 어렵다


가속화되는 지구 생태 위기는 인간으로 하여금, 다른 생명체에 위해를 끼치지 않는 관계 맺기를 절실히 요구하고 있습니다. 한살림은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 농민과 관계 맺기를 통해 다른 생명체와 더불어 살기를 실천하면서 지역 생명 안전망을 만들어 가는 일을 해왔습니다.
안전한 유기농사료를 먹인 수입 축산물보다는 일반 수입사료로 우리 농민이 기른 한우가 더 유기적이며, 국내에서 사육하는 수입산 유기사료 축산물보다도 국내산 자급사료 축산물이 더 유기적입니다. 지속가능한 생명안전망을 만드는 데에는 유기적인 재배 과정도 중요하지만 생산과 소비의 유기적 지역성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생명평화는 식량자급 없이 불가능하다


이대로 가면 돈이 있어도 먹을 것을 사먹을 수 없는 때가 올 수밖에 없습니다. 심각한 기후변화로 작물작황이 불안할 뿐만 아니라 화석연료의 고갈로 생산과 이동방식에도 위기가 찾아오고 있습니다. 말 그대로 먹고 사는 문제가, 문제가 될 때 폭동이 일어납니다. 지난해 필리핀 등 14개 나라에서 식량폭동이 일어나 사람이 깔려 죽은 곳도 있었습니다. 식량자급률이 27%도 안되는 우리에게 가까운 미래에 벌어질 수 있는 일입니다. 식량자급에는 한길밖에 없습니다. 이 땅에서 생산 가능한 먹을거리로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이 밥상을 차릴 때 그일이 가능합니다. 목숨 유지에 불안을 느끼지 않는 생명평화는 식량을 자급하는 수준에 달려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온 생명체에 대한 참다운 윤리적 소비가 필요하다


지구온난화와 식량위기로 대표되는 생명의 위기는 우리에게 지역자원순환형 생활양식으로 삶을 바꾸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생산자와 소비자가 협동하여 먹을거리를 생산, 유통, 소비하는 대안적 민중경제의 모습은 지구온난화와 식량자급을 악화시키는 국제 교역이 아니라 각 지역의 ‘자급 자립적 삶’을 기반으로 ‘생산·소비·협동 순환체계’를 구축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에 도움 되는 소비가 윤리적 소비요, 착한 소비입니다.  


 ‘윤리(倫理)’와 ‘선(善)’이라는 단어만 내세운다고 해서 품고 있는 반생태적 요소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에 대한 도움도 식량을 매개로 지속적인 의존관계를 바탕으로 한다면, 과거 미국의 잉여농산물원조가 우리 땅에서 그랬던 것처럼 수출지의 식량자급기반이 무너지고 왜곡된 식문화를 확산시키는 비자주적인 의존 사례를 양산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전 지구적 생명위기 현상을 극복하는 데 보탬이 되는가에 따라 윤리적 소비, 착한 소비라는 의미도 부여해야 하는 절박한 생명위기의 시대에 우리 모두가 처해 있음을 생각하며 다시 우리의 밥상을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이미 모든 사람이 습관적으로 먹고 마시고 있는데 되겠나?’라고 다른 사람의 변화 기대에 대한 절망감을 표하기 전에 나 자신부터 변화해 보자는 것이 한살림운동의 방식입니다. 밥상을 앞에 두고 늘 ‘나의 식습관은 식량자급을 가져오는 가까운 먹을거리인가?’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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