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호 2016년 10월호 살림,살림

[ 책과 대중문화로 세상 읽기-디지털 시대의 분열과 독재 ]

투명사회는 통제사회인가

글 이민희

영화 〈소셜포비아〉(감독 홍석재, 2015)는 SNS 시대의 비극에 관한 이야기다. 하영(하윤경)은 한 군인의 자살 뉴스에 악플을 남긴 뒤 네티즌의 공격 대상이 된다. 용민(이주승), 지웅(변요한), 양게(류준열) 등은 하영을 응징하기 위해 ‘현피 원정’을 나갔다가 그의 시신을 발견한다. ‘현실’의 ‘현’과 ‘Player Killing’의 ‘P’가 합쳐진 신조어 ‘현피’는 온라인에서 다툼을 벌이던 상대가 실제 현실에서 만나 싸우는 것을 뜻한다. 현피 뜨러 갔다가 시체와 마주하게 된 무리. 이들은 진범을 찾겠다며 현장 검증을 하고 이 과정을 인터넷으로 생중계하면서 하영의 죽음을 자극적으로 소비한다.
그러던 중 무리의 한 명인 용민이 유명한 악플러 ‘도더리’로 밝혀지면서 사건은 예측할 수 없이 흘러간다. 도더리 용민이 하영을 죽인 진범으로 지목되고 네티즌은 그를 응징하기 위해 또 다른 현피 원정에 나선다. 하영의 복수에 앞장섰던 용민은 그 자신이 복수의 대상이 되고 벼랑 끝으로 몰리다 결국 자살을 시도한다. 심지어 자살 시도 장면이 인터넷으로 생중계되면서 완벽한 파국을 맞는다.
네트워크 안에만 존재한다고 믿었던 가상의 세계가 진짜 세계를 무자비하게 파괴할 때 ‘가상의 나’와 ‘현실의 나’가 겹쳐지는 비극의 정점에서 존재는 의미를 상실한다. ‘디지털 자아’가 소멸하는 순간 ‘아날로그 자아’도 생명력을 잃고야 마는 비극적인 현실. 영화는 SNS에 익숙한 관객에게 제목처럼 포비아(공포증)를 불러일으킨다.

 

 

두 개의 세상, 두 개의 자아
영화는 질문한다. 이들은 왜 인터넷상에서 공격의 대상을 찾아다니고 악플을 쓰고 전쟁을 벌이는가. 가상의 나와 현실의 나 중 진짜 나는 누구인가. 이 질문의 심연에는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존재론적 고민이 놓여 있다. 인터넷 커뮤니케이션 도구는 소통의 패턴을 ‘1대1’에서 ‘다수 대 다수’로 변화시켰다. 기술 발달에 따른 의사소통 방식의 변화는 우리 삶을 크게 흔들어 놓았다. 현대인의 삶은 인터넷이 제공하는 연결의 세계 속에서 울고 웃는다.
미국 임상심리학자인 수재나 E. 플로레스는 《페이스북 심리학》(책세상 2015)에서 페이스북이 제공하는 “연결과 정보 공유 덕분에 권한이 커진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우리의 정체성과 인간관계,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 또한 바뀌고 있다”며 “페이스북에 무언가를 올리는 일은 자신의 생각과 세상 사이에 다리를 놓는 것 이상의 일이 되었다”(34쪽)고 지적한다. SNS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날마다 자신을 ‘편집’한다. 노출할 정보를 선별하는 단계에 들어가는 편집은 모두 네트워크상의 관객을 의식한 것이다. 쌍방향 소통이 허용될 만한 건강한 수준을 넘어서 자신을 과도하게 포장하거나 남을 배격하게 된다면 의사소통은 획일화되고 인터넷은 불행의 도구로 전락한다. 플로레스는 ‘인지부조화’라는 심리학 개념을 빌려 디지털 자아와 아날로그 자아의
분리 현상에 대해 설명한다.
“인지부조화란 서로 모순되는 두 가지 방식으로 세상을 인식할 때 느끼는 불안을 가리킨다. 인식과 신념 사이의 이러한 불일치로 인해 정서적 불균형 상태에 빠지고 정체성 혼란, 인간관계 갈등, 판단 기준 변화 등을 경험하고 극단적인 경우에는 신경쇠약에 걸린다. 이때에는 혼란을 없애거나 줄이기 위해 인식 과정에서 무언가가 근본적으로 변화해야 한다. 자신이 디지털 인간관계에 어떤 의미를 두고 있는지 알아내야 하고 그런 다음 예전의 아날로그 자아와 새로운 디지털 상호작용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35~36쪽)

 

 


페이스북 심리학

수재나 E. 플로레스 지음 / 안진희 옮김 / 책세상 펴냄 / 2015년

 


‘유리인간’들의 사회
한편, 독일 베를린 예술대학의 한병철 교수는 《투명사회》(문학과지성사 2014)에서 웹 기반의 과도한 커뮤니케이션과 전면적 네트워크화는 모든 것이 노출되는 ‘유리인간’의 사회를 만든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인터넷이 제공하는 연결과 공유, 무제한의 자유와 커뮤니케이션 확대는 오히려 주류에서 벗어나는 의견이나 아이디어를 제한하고 이질성을 배격하며 의사소통의 동질성을 추구하는 경향을 보인다. 유리인간의 사회란 모든 것이 개방된 자유로운 사회가 아니라 오히려 모든 것이 투명하게 드러난 속에서 만인이 만인을 감시하는 새로운 통제사회다. 이는 마치 제러미 벤담이 창안한 ‘파놉티콘’의 구조와 유사하다.
‘디지털 파놉티콘’은 서로 격리되고 고립되어 있는 벤담 식 파놉티콘과 반대로 주민들이 네트워크화되어 서로 맹렬하게 커뮤니케이션한다. 그들은 자신을 전시하고 노출하는 유리인간이 되어 파놉티콘 건설과 유지, 곧 감시와 통제에 능동적으로 기여한다. 이는 SNS 시대, 네트워크를 통한 무제한 소통이 수평적 의사결정과 민주주의 확대로 귀결되지 못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디지털 세상에서 무리를 짓고 서로 감시하면서 다른 의견을 배격하고 응징한다. 일베는 일베끼리만 소통하고 진보를 자처하는 사람들도 자기들끼리의 소통에만 익숙하다. 인터넷은 ‘투명하기 때문에’ 타자와의 이질성을 거부하고 동질성만을 추구함으로써 서로를 통제하고 시스템을 안정시키는 이율배반적 모습을 보인다.
“투명성의 독재 속에서는 주류에서 벗어나는 의견이나 일반적이지 않은 아이디어는 아예 입 밖으로 꺼내기도 어려워진다. 과감한 도전은 거의 시도되지 않는다. 투명성의 명령은 강력한 순응에의 강제를 낳는다. 사람들은 카메라의 지속적인 감시 속에 있을 때처럼 관찰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투명성의 명령에는 파놉티콘적 효과가 있다. 그것은 결국 커뮤니케이션의 획일화와 동일한 것의 반복으로 귀결된다.”(141쪽)
인터넷상의 무리 짓기와 극단적인 동질성 추구, 전체주의적 경향은 결국 사이버 세계가 현실의 세계를 전복하는 비극을 초래한다. 반면 ‘촛불시위’가 그러했던 것처럼 쌍방향의 소통 패턴이 대중의 참여와 결집을 통한 오프라인 세계의 역동적인 변화를 불러온 것도 사실이다.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방식이 선도하는 사회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흘러갈까. 인터넷의 순기능을 살리면서도 새로운 의사결정 방식에 대해 비판적으로 숙고하는 작업이 필요한 때다.

 

 


투명사회

한병철 지음 /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펴냄 / 2014년

 


↘ 이민희 님은 전남 영광에서 경제-복지-노동-교육이 어우러지는 지역일체형 농촌마을공동체를 지향하는 ‘여민동락공동체’에 몸담고 있습니다. 어르신들과 함께하며 현장의 변화를 일구는 사회사업가가 되기 위해 노력합니다. 책 속에서 길을 찾되 절대 ‘활자의 감옥’에 갇히지는 말자는 생각으로 틈틈이 책을 읽고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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