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2호 2016년 9월호 살림,살림

[ 지리산 동네부엌-단호박고구마밥·조선호박된장찌개·노각무침·풋사과연근김치 ]

뿌리와 열매에 힘이 쌓이는 가을

글 고은정 _ 사진 류관희

바스락 가을이다
자연과 인체는 서로 응답하는 사이다. 계절의 변화는 인체의 생리와 병리 변화에 직간접으로 영향을 끼치므로 건조한 가을이 되면 우리 몸은 같이 건조해지기 마련이다. 우리 몸이 건조해지면 밖에 널어놓은 빨래가 마르듯이 몸 안의 진액이 손상되어 피부가 거칠어진다거나 폐나 목, 코 등의 건강에 이상이 생길 수 있다.
그러므로 가을에 먹는 음식은 생명 활동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영양 섭취를 넘어서 우리 몸 안의 진액이 손상되지 않도록, 혹은 손상된 진액을 회복할 수 있게 하는 음식을 먹는 것이 중요하다. 가볍게 생각하고 음식을 소홀히 먹으면 가을과 겨울에 골골거리며 약을 끼고 살아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처서(8월 23일)를 지나 백로(9월 7일) 무렵이 되면 식물들은 자신의 생명을 지키려고 밤새도록 대기 중에 떠도는 수분을 끌어당겨 풀잎에 이슬을 만들지만 늦은 아침을 먹고 나가면 어느 사이 이슬은 사라지고 없다. 다시 따가운 햇볕이 지상부의 잎들을 서서히 말리고, 뿌리와 열매에 힘을 쏟아 다음 생을 위한 준비를 열심히 한다. 제비도 강남으로 돌아가고 남아있는 텃새들도 겨울을 날 먹이를 저장하느라 바쁘다. 사람이 제아무리 쫓아도 새들은 생존을 위한 투쟁을 멈추지 않는다. 지리산 사람들도 고추를 따서 말리고 호박고지·가지고지·깻잎·호박순·고구마순 등으로 묵나물 준비에 바쁘다.

 

조금씩 먹어 두면 좋은 단호박으로 밥을
부엌에 놓아두었던 단호박을 씻어 쪼개면 막 수확했던 때와 달리 색이 제법 붉어져 있다. 속살이 붉어진 만큼 단맛도 들어 뭘 해서 먹어도 맛이 있으니 먹는 재미 때문에라도 자꾸 뭔가 해 보고 싶어진다. 그래서 오늘은 밥으로 도전한다.
단호박 윗부분을 잘라 내 뚜껑처럼 쓰고 속을 파내서 3시간 이상 불린 쌀을 넣고 찜솥에서 쪄 내 호박을 가르면 선물처럼 밥이 나온다. 그러나 호박은 혼자 먹기에 많고 밥은 혼자 먹기에 적당해 혼자 해 먹든 가족과 함께 먹든 약간 당황스러운 상황이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번거롭기 짝이 없다. 그러니 밥으로 예술작품을 만들고 싶은 것이 아니라면 깍두기 썰듯이 썰어서 30분 정도 불린 쌀과 함께 밥을 하면 좋다. 짓기 쉬울 뿐 아니라 맛도 좋고 보기도 좋다. 이때 단호박만 넣고 밥을 하기 심심하다면 고구마도 같이 하나 넣는다. 그러면 고구마의 색과 향미가 입혀 더 예쁘고 맛있다.
단호박은 이름 그대로 맛이 달지만 당 함량이 적고 지방과 나트륨도 적어 늘 조금씩 먹으면 당뇨병과 고혈압 환자에게 도움이 되고 간장과 신장의 만성질환을 예방할 수 있다. 단호박의 섬유질은 통변 효과가 있어 변비로 고생하는 사람에게 좋고 대변의 독성이 인체에 흡수되는 걸 감소시키므로 결장암 예방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달면서 성질이 따뜻하여 소화가 잘되며 통증을 완화하는 등 여러 효능이 있으니 조리법을 달리하여 자주 먹으면 좋겠다.
고구마의 점액성 단백질은 심혈관계 탄성을 유지하며 동맥경화를 예방하고 피하지방을 감소시키는 효능이 알려지고 있다. 호흡기관이나 소화기관, 관절의 점액성분을 유지하게 하여 오장육부에 두루 좋다고 하니 많이 먹으면 좋겠다. 섬유질이 많아 대장에서 대량의 수분을 흡수해 변의 용적을 늘려 변비를 예방하고 대장암 발생을 줄여 준다고 한다.

여름내 더위에 시달려 온 탓인지 입이 쓰다. 그러므로 가을엔 뭐니 뭐니 해도 단호박고구마밥이 정답이고 진리다.

 

그리운 날엔 무심하게 조선호박된장찌개
무심하게 일상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 늘 뭔가에 집중하고 집착하고 그러다 허둥대고 일을 그르치게 된다. 밥상을 차리는 일도 다르지 않다고 느낀다. 맛있어야 하고 멋있어야 하고, 그러다 우리 밥상이 그르쳐진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떨치기 어렵다. 쫓기는 일상에서 가끔 빛바랜 사진을 볼 때처럼 소리는 없고 이미지만 떠오르는 장면들이 있다. 그 속에는 아주 강렬한 냄새를 기억하게 하는 음식도 있다. 사실은 무심하게 흘러간 시간 속의 한 장면이지만 잊히지 않고 각인된 장면이다. 외할머니에 이어서 어머니나 이모들이 된장찌개를 끓이던 모습인데 마치 코앞에서 끓는 된장찌개 냄새를 맡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나도 가끔 흉내를 내 본다. 그렇게 무심하게 밥상을 차려 보는 거다. 뭔가 치장을 하지 않고 잘하려고 하지 않고 툭툭 던지듯 밥상을 차려 본다. 뚝배기에 된장을 풀고 모양 생각하지 않고 큼직하게 감자를 썰고 호박을 두들겨 손으로 뚝뚝 부수어 넣는다. 두부도 손으로 으깨듯 잘라 넣고 된장찌개의 마무리로 깻잎도 손으로 뜯어 넣는다. 넣는 순서가 미각을 일깨운다는 따위는 몰라도 좋다. 그냥 한꺼번에 다 넣고 푹 끓여 호박이 흐물거리고 두부 뼛속까지 된장의 간이 배면 여러 가지를 넣었으니 여러 가지 재료의 맛이지만 어쩐지 하나로 느껴지는 맛이 난다. 지지고 볶고 싸우면서도 사랑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가족애가 된장찌개를 먹으면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느낌이다.
마당이 있다면 평상에 앉아 먹으면 더 운치 있을 된장찌개를 끓인다. 찌개가 뜨거워서 그런지 가슴이 뜨거워진다. 내일도 잘 버티고 살아 낼 수 있을 것 같다.

 

 

 

노장의 힘 노각무침
오이는 성질이 서늘하고 맛이 달아 우리 몸의 열을 내려 주고 수분 대사를 원활하게 하며 해독하는 작용이 있다. 그래서 여름 식재료로는 오이를 능가할 것이 없다. 오이 꼭지의 지독하게 쓴맛을 내는 쿠쿠르비타신 성분은 복통 등에 효과가 있고 혈압을 내리며 콜레스테롤의 체내 축적을 막는다.
맛이 없으면 별별 오이라 해도 먹지 않을 것인데 특유의 향에 시원한 단맛이 질리지 않고 계속 먹게 한다. 그래서 오이로 소득을 올리지 않더라도 텃밭에 몇 포기 심지 않는 농가는 없다. 거름을 충분히 주면 주렁주렁 잘도 달리지만 잠깐 다른 데 관심을 두면 여기저기서 노랗게 나이를 먹어 가는 오이를 만난다. 노랗게만 변하는 것이 아니고 몸집도 커지고 커지는 몸 안에서는 씨앗도 자란다. 못 먹는 거라고 따 버리지 않고 그냥 두면 더 자라고 겉도 두꺼운 옷을 입는다. 그러면 이름이 오이에서 노각으로 바뀐다. 노각이라는 식물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노각은 오이의 어른이다.
노각이 어른 팔뚝만 하게 자라면 그때 따서 껍질을 벗기고 반을 갈라 씨를 포함한 속을 파내고 반찬을 만들어 먹는다. 오이 같은 아삭함은 없지만 부드럽고 오이에는 없는 신맛이 아주 살짝 느껴진다. 소금에 절이면 흥건하게 물이 나오므로 물기를 짜내고 무치는데, 신맛을 살려 식초를 조금 더 넣고 무쳐도 좋고 식초 없이 무쳐도 좋다.

노각을 무치는 날에는 밥그릇이 반드시 커야 한다. 그래야 밥과 노각무침을 함께 넣고 쓱쓱 비벼 먹을 수 있다. 풋내가 상큼한 오이의 맛을 느낄 순 없지만 노각만의 특별한 맛이 있다. 별스러운 맛이 없는 것 같지만 노각무침을 먹지 않고 계절이 지나가면 집안에 어른이 안 계신 것처럼 허전하니 꼭 챙겨 먹어야 하는 반찬이 노각무침이다.

 

몸 안의 진액 보충, 풋사과연근김치
풋사과라는 품종이 있는 건 아니다. 아직 농익지 않아 한입 베어 물었을 때 꽉 찬 사과 맛이 느껴지지 않는 어딘가 좀 빈 맛이 나는 사과에 풋사과라는 표현을 쓴다. 일찍 나오는 사과를 통칭하는 이름이지만 나는 무르익지 않은 어린 나이에 했던 사랑 같은 느낌과 그 맛이 통하는 듯해 그리 부른다.
9월이 시작되는 때 전후로 나오는 사과와 맛이 비슷하면서 느낌도 비슷한데 수확 시기도 비슷한 것이 있다. 우아한 자태를 뽐내며 핀 연꽃이 지고 잎이 마르기 시작하면 수확하는 연근이 그것이다. 이때의 연근 맛은 단맛이 적은 배와 같다는 표현이 적합한데 살짝 달고 수분이 넉넉하지만 살이 단단하면
서 아삭하다. 대충 먹으면 아무 맛도 없는 것 같지만 천천히 음미하면 혀에서 생감자의 녹말 맛도 느껴진다. 풋사과와 연근의 농익지 않은 풋풋한 맛은 사랑을 처음 시작하는 사람이 아니면 느끼지 못할 순수함과 가벼움을 같이 가지고 있다.
바쁘게 돌아다니다 보니 사과 같은 과일을 제대로 챙겨 먹기 어려워 밥상에 올리면 편하다. 과일을 챙겨 먹지 못하면 어쩐지 영양이 불균형해질 것 같고 뭔가 빠진 것 같은 허전함이 드는데 그걸 다 해결할 방법이라 좋다. 연근도 조림 외에 별다른 조리법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뜻밖에 생으로 겉절이처럼 무쳐 먹으면 맛이 꽤 괜찮다. 푹 익혀서 먹는 전형적인 김치들이 장년의 농후하고 깊이를 모를 사랑과도 같은 맛이라면 풋사과와 연근으로 담그는 김치는 그야말로 얕지만 가슴 설레는 상큼한 어린 시절의 사랑과도 같은 맛이다.
오늘 저녁 반찬이 걱정이라면, 건조해지는 가을에 몸 안의 진액이 빠지는 것이 걱정이라면 몸 안에 진액을 만들어 주는 사과와 연근으로 버무린 풋사과연근김치를 추천하고 싶다.

 

 

단호박고구마밥

재료
쌀 2컵, 미니단호박 1/2개, 고구마 1개, 물 2컵
만드는 법
1 쌀은 첫 물을 재빨리 버리고 깨끗이 씻어 30분간 불린다.
2 단호박은 깨끗이 씻어 반으로 가른 다음 속을 제거하고 한입에 먹기 좋은 크기로 자른다.
3 고구마는 깨끗이 씻어 양 끝부분을 잘라 내고 단호박과 같은 크기로 썬다.
4 쌀을 압력솥에 담고 물을 부은 뒤 뚜껑을 연 채로 밥을 한다.
5 밥이 끓어 물이 잦아들면 밥 위에 단호박과 고구마를 얹고 뚜껑을 덮어 압력을 건다.
6 추가 흔들리면 불을 줄이고 1분간 두었다가 불을 끄고 김이 저절로 빠질 때까지 기다린다.
7 솥의 김이 다 빠지면 뚜껑을 열어 밥을 골고루 섞은 뒤 그릇에 담아낸다.

 

 

조선호박된장찌개

재료
조선호박 1/2개, 두부 1/2모, 감자 1개(150g), 양파 1/2개, 대파 1/2뿌리, 풋고추 1개, 홍고추 1개, 깻잎 5~6장, 된장 3~4큰술, 고춧가루 1큰술, 멸치맛국물 6컵
만드는 법
1 호박은 큼직하게 썬다.
2 감자와 양파는 껍질을 벗기고 호박과 같은 크기로 썬다.
3 두부는 한 번 씻어 물기를 없애고 손으로 뚝뚝 자른다.
4 대파는 다른 채소와 비슷하게 썬다.
5 풋고추와 홍고추는 어슷하게 썰고 깻잎은 뚝뚝 자른다.
6 멸치맛국물을 냄비에 붓고 끓이면서 된장을 푼다.
7 끓기 시작하면 감자와 양파를 넣고 끓인다.
8 호박과 두부를 넣고 감자와 호박이 무르도록 익게 끓인다.
9 마지막으로 고춧가루를 넣고 썰어 놓은 대파와 고추, 깻잎을 넣는다.

 

 

노각무침
재료
노각 1개(700g 기준), 소금 1큰술
무침 양념: 고추장 1큰술, 고춧가루 1큰술, 간장 1작은술, 다진 파 1큰술, 다진 마늘 1작은술, 설탕 1작은술, 식초 1큰술, 깨소금 1큰술
만드는 법
1 노각은 껍질을 벗기고 길이로 반을 갈라 씨를 빼낸다.
2 노각을 1~2mm 두께로 썰어 소금 1큰술을 넣고 10분간 절인다.
3 무침 양념을 만든다.
4 절인 노각을 면 보자기에 싸서 물기를 꼭 짠다.
5 무침 양념에 노각을 넣고 잘 무쳐 낸다.

 

 

풋사과연근김치
재료

사과 2개, 연근 200g
양념: 새우젓국 2큰술, 쪽파 5뿌리, 마늘 1알, 생강술 1작은술, 고춧가루 2큰술
만드는 법
1 사과는 껍질째 깨끗이 씻어 4등분한 뒤 속을 제거하고 2~3mm 두께로 썬다.
2 연근은 껍질째 잘 씻어 사과와 같은 크기로 썬다.
3 쪽파는 다듬어 깨끗이 씻고 2~3cm 길이로 썬다.
4 마늘은 곱게 찧는다.
5 생강 껍질을 까서 찧은 것을 미리 청주에 재워 두고 생강술을 만든다.(청주3 : 생강1)
6 새우젓국에 고춧가루, 쪽파, 마늘, 생강술을 넣고 잘 섞는다.
7 썰어 놓은 사과와 연근을 큰 볼에 담고 준비한 양념도 넣어 먹기 직전에 버무려 낸다.

 

Tip 이 김치는 사과나 연근처럼 그때그때 나오는 과일이나 채소, 냉장고 속 재료를 적당히 쓰면 된다. 젓갈 양은 재료의 양과 크기에 따라 조절한다.

 

 

 

↘ 고은정 님은 약선식생활연구센터 대표로, 장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라면 어디든 달려갑니다. 《장 나와라 뚝딱》과 《집 주변에서 찾는 음식보약》, 《반찬이 필요 없는 밥 한 그릇》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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