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1호 2016년 8월호 살림,살림

[ 책과 대중문화로 세상 읽기-노인 문제에 대한 침묵의 공모 깨기 ]

내 안에 ‘노인’이 산다

글 이민희

“구질구질해도 그게 진실이니까.
그게 우리 늙은이들의 삶이니까. 그게 사실이니까.”
노인의 삶을 배려 깊고 이쁜 어른들 모습으로 포장해 주겠다는 말에 늙은 이모들은 “그건 거짓말!”이라며 이렇게 외친다.
최근 인기리에 끝난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홍종찬 연출, 노희경 극본)에서 가장 인상 깊게 본 장면이다.

 

 

‘디마프’가 보여 주지 못한 것들
〈디어 마이 프렌즈〉(디마프)에서 작가인 완(고현정)은 엄마와 엄마의 50년 지기 늙은 이모들에 관한 책을 쓰기로 결심하고 이모들을 한데 모아 첫 인터뷰를 한다. 황혼에 가출을 감행한 정아 이모(나문희)는 “내 맘대로 맥주 한잔 먹고 싶어서 집을 나왔는데 그게 뭐가 문제가 되냐?”고 따진다. 치매에 걸린 희자 이모(김혜자)는 “내가 24시간 얼마나 외로운지 안 쓸 거면 나는 책에서 빼라”고 절규한다.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 기획을 수정하기로 마음먹은 완의 생각이 내레이션으로 흐른다. “고단하고 고단한 구질구질한 인생이 어쩔 수 없이 진짜 인생이라면 어쩔 수 없는 것 아닌가. 그들의 인생은 그들이 주인공이니까 그들이 선택할 권리가 있다.”
나는 사회복지사로 일하고 있는 노인복지센터에서 어르신들과 함께 디마프를 보았다. 노인이 주인공인 노인의 드라마이기에 어르신들에게 쉽게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현실은 아니었다. 의외였다. 어르신들 반응이 시큰둥했다.
디마프에 등장하는 노인들은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이들이다. 판사 출신 엘리트(주현)이거나 성공한 식당 사장(고두심), 화려한 여배우(박원숙), 자수성가한 재력가(윤여정)이다. 평생 자식 키우며 주부로만 살아온 인물(나문희, 김혜자)도 있지만, 이들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여행을 떠날 수 있을 정도로 여유로운 노년을 보낸다. 심지어 등장인물 모두 50년 지기 초등학교 동창이다. 현실에서는 보기 힘든 관계다.
일제강점기-한국전쟁-개발시대로 이어지는 현대사의 소용돌이를 온몸으로 겪어 낸 노인들의 삶은 ‘요샛것들’은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굴곡지고 고단했다. ‘징헌 놈의 시상’을 버텨 내며 자식을 길러 낸 한국 노인들의 보편적인 처지는 디마프에 등장하는 노인들과 상당한 거리가 있다. 한국의 노인들은 아프고 외롭고 빈곤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노인빈곤율 1위, 노인자살률 1위인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 아닌가. 젊어서는 생산의 담당자로 하루하루를 전투하듯 살았고, 생산에서 밀려난 뒤에도 생존을 위한 전쟁을 치러야 하는 것이 오늘날 노인들 삶이다. 하지만 디마프는 노년의 문제를 대단히 감성적이고 개인적인 수준으로 다룰 뿐 노화를 ‘사회적 과정’으로 접근하지 못하는 한계를 보인다.

 

 

계층화 과정으로서 노화에 대한 접근
미국 사회학자 코리 M. 에이브럼슨은 노화는 계층화의 한 과정이라고 했다. 그는 《불평등이 노년의 삶을 어떻게 형성하는가》(2015)에서 “종반전을 이해하려면 늙는다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곤경을 안겨 주지만 이러한 경기가 펼쳐지는 상황과 사람들의 대응 방식은 노년까지 이어지는 물질적·경제적 불평등에 의해 정해진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199쪽)고 말한다. 사회보장서비스와 같은 복지 혜택에도 불구하고 인생 종반전의 불공정 경쟁의 정도는 완화되지 않는다.

 


불평등이 노년의 삶을 어떻게 형성하는가
코리 M. 에이브럼슨 지음 / 박우정 옮김 / 에코리브르 / 2015년

 


예컨대 내가 살고 있는 시골 마을은 도시 지역에 비해 의료서비스에 대한 접근이 어렵고 이동도 자유롭지 못하다. 거동이 불편한 노인이 읍내에 있는 병원에 자유롭게 다니며 진료를 받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도시에서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다. 가난하고 주변부에 사는 노인일수록 더 많은 의학 문제를 안고 있고 평균 수명도 짧다. 노화에 따른 신체 능력 상실은 늙으면 누구나 겪는 일이지만, 이에 대한 대처는 물질자원의 보유 정도와 사회관계망이 얼마나 긴밀한지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에이브럼슨은 “불평등과 노화의 관계는 일련의 또 다른 질문을 유발한다”며, “수명과 삶의 궤적이 우리의 사회적 지위에 따라 근본적으로 달라진다면 과연 ‘노년’이라는 말은 올바른 것인가? 그렇다면 노년의 정의는 무엇인가?”(21쪽)라는 질문을 던진다.

 


진정 늙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노년은 어느 날 갑자기 맞이하는 충격적인 상황이 아니다. 현재의 삶이 차곡차곡 쌓여 가면서 사람은 노인이 되어 간다. 생물학적으로도 성장기를 거치고 나면 신체 각 기관은 노화를 시작한다. 현재 삶이 빈곤하고 불행하다면 노년의 삶도 그렇게 될 확률이 높다. 노년은 정태적인 관점이 아니라 변화의 관점으로 파악되어야 하는 사회적 문제다. 프랑스의 사상가 시몬 드 보부아르는 일찌감치 《노년―나이듦의 의미와 그 위대함》(2002)에서 노년의 본질을 꿰뚫었다.

 


노년 - 나이듦의 의미와 그 위대함

시몬 드 보부아르 지음 / 홍상희·박혜영 옮김 / 책세상 펴냄 / 2002년

 


“모든 인간의 상황이 그러하듯이, 늙는다는 것에도 존재적인 차원이 있다. 늙는다는 것은 개인이 시간과 맺는 관계를 변경시킨다. 고로 늙는다는 것은 인간이 세계와, 그 자신이 역사와 맺는 관계도 변경시킨다. 또 다른 면에서 보면 인간은 절대로 자연 상태에서 사는 것이 아니다. 여느 연령에서와 마찬가지로, 노년기에도 한 개인의 지위는 그가 속한 사회가 그에게 부여하는 것이다. 문제를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이러한 여러 다른 관점들의 밀접한 상호 연관성이다.”(17쪽)
보부아르는 “한 인간이 노년에도 인간으로 남아 있기 위해서 사회는 어떤 사회가 되어야 하는 것일까? 대답은 간단하다. 인간이 항상 인간으로 대우받는 사회여야 한다.”(760쪽)라고 했다. 그가 보기에 노인 문제는 사회 전체의 문제이자 곧 체제의 문제다. 이 지점에서 노인 담론이야말로 전 세대를 아우르는 담론이 되어야 하는 당위성을 발견한다. 누구나 노인이 되지만 사회 전체가 그들의 문제를 외면하는 ‘침묵의 공모’를 깨는 것에서부터 건강한 노인 담론은 만들어질 것이다. 노후가 불행할까 봐 걱정되는가? 그렇다면 지금부터라도 노인 문제에 관심을 가지시라. 우리 모두의 안에는 이미 ‘노인’이 살고 있다.

 

 

↘ 이민희 님은 전남 영광에서 경제-복지-노동-교육이 어우러지는 지역일체형 농촌마을공동체를 지향하는 ‘여민동락공동체’에 몸담고 있습니다. 어르신들과 함께하며 현장의 변화를 일구는 사회사업가가 되기 위해 노력합니다. 책 속에서 길을 찾되 절대 ‘활자의 감옥’에 갇히지는 말자는 생각으로 틈틈이 책을 읽고 글을 씁니다.


http://www.salimstory.net/renewal/sub/view.php?post_id=16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