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04호 2009년 봄 [특집] 살리는 사람, 농부

[ 부모와 자식 농사 | 88세 노모와 함께 사는 전희식 ]

늙고 병든 어머니 되살린 시골살이

글 전희식

 

가끔 생각해본다. 내가 만약에 귀농을 하지 않고 여전히 도시에 빌붙어 산다면 뭘 해 먹으면서 살고 있을까? 빌붙어 산다는 표현이 귀에 거슬릴지 모르지만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대개 빌붙어 사는 사람 아닐까 싶다. 먹고 자고 입고 하는데 드는 재료를 몽땅 남한테 기대고 있기 때문이다.


뭘 하든 먹고 살긴 할 테지만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지금처럼 만족스런 생활은 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건강이나 자식 키우기나 식구들과의 관계 등 다 그럴 것이다. 시골 살면서 가장 만족하는 것은 바로 올 해 여든 여덟이신 어머니랑 사는 것이다. 시골살이 15년을 통틀어 잘한 것 하나만 고르라고 해도 나는 자신 있게 어머니랑 사는 것을 꼽는다. 그리고 만족스러운 것 또 한 가지, 아들을 농사꾼으로 만들 수 있게 된 점이다. 아들이 농사짓겠다고 하는 것은 내 시골살이에서 얻은 큰 성공이지 싶다. 


자식이 부모 하는 일을 이어 받겠다고 하면 어느 부모가 기쁘지 않으랴만 얼마 전에 이제 열아홉 살 된 우리 아들이 ‘아빠한테 농사 배워서 나도 농사나 지을래요.’라고 했다는 말을 들었다. 아내가 전해 준 말이다.
나한테 직접 말하지 않고 제 엄마를 통해 돌려서 말을 한 것이 약간 마음에 걸리기는 한다. ‘농사나 짓겠다’는 말도 아들의 진정성을 못 미더워 하게 만들지만 크게 개의치 않으려고 한다. 이 기회에 나는 아들이 앞으로 딴 말 하지 못하도록 이를 기정사실화 할 생각이다.


농사짓겠다는 말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들이 어느 대안중학교 3학년에 다닐 때였다. 체험학습의 일환으로 부안에 있는 변산공동체에 가서 열흘 쯤 살았었다. 오랜만에 윤구병 선생님도 뵐 겸 체험학습이 끝나는 이틀 전에 아들을 찾아갔더니 나를 보고 대뜸 농사지으면서 살고 싶다고 했었다. 고등학교도 농고 가겠다고 큰소리쳤다.


물론 제 누나가 다니는 홍성의 풀무농업학교에 원서까지 넣긴 했었지만 인연이 안 되어 입학을 하진 못 했고, 그 후로 농사짓겠다는 말을 다시 하지 않았다. 농사짓고 살 놈답지 않게 방학 때 집에 와도 농사일을 조금도 거들지 않았었다.


당시에 너무 반가워서 왜 그런 기특한 생각을 하게 되었냐고 물었을 때 대답이 걸작이었다. ‘변산공동체 사람들이 술도 많이 마시고 도청 앞 행사장에 트럭타고 가서 곡식을 팔아 돈 잘 버는 모습이 좋았다는 것’이다. 이 말에 싹수가 노랗다고 여기고 농사꾼 되기를 거의 포기하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좀 다르게 여겨진다.


‘100일 학교’라는 프로그램을 마치고 생각하는 것이 놀랍도록 성숙해서 한 말이기 때문이다. 생명살이 농사짓기와 발효음식 만들기, 생태집짓기와 이타행(남을 돕는 봉사활동), 명상수련 등이 주요 과목인 ‘100일 학교’를 거치면서 농사의 진면목을 알게 되었을 것이고, 머리가 커진 지금 스스로 진로를 깊이 고심하면서 내린 결정이 아닐까 싶다.


나는 오래 전부터 남매에게 농사짓겠다는 녀석에게 농사에 필요한 내 모든 것을 다 공짜로 물려주겠다고 공언해 왔다. 3천 평이나 되는 논밭도 내 것은 고작 250평뿐이고 다 남의 것을 임대한 것이지만 가장 값나가는 농기계로는 관리기가 있다. 자연농을 하는 데에 필요한 수동 농기구도 다 있다. 내 손으로 지은 집도 있다.


아이들과 손에 고추 모종을 쥐고, 또는 흙투성이로 감자를 캐고 아궁이에 고구마를 구워 먹으면서 나누는 이야기들은 자연스럽다. 학교 마치고 집에 오는 아이에게 겨우 “오늘 학교에서 뭐 했니?”라고 물으면 “응. 그냥 뭐. 아무것도.”라고 대꾸하고 나면 더 할 얘기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손수레를 끌고 밀고 하면서 저절로 주고받게 되는 학교 얘기, 친구 얘기, 선생님 얘기는 농사짓는 가족들이나 만끽하는 최고의 소통법이 아닐까 한다.

 

삶의 지혜로 가득 찬 어머니의 잔소리


몇 년 되었다. 추석이나 설날에 우리 네 식구는 집에서 오붓하게 둘러앉아 송편을 빚거나 전을 부치면서 명절 음식을 만든다. 막내인 내가 서울 형님 댁으로 올라가지 않고 시골집에서 명절을 쇠는 것이다. 대신 형제들이 명절 오후에 우리 집으로 내려온다. 내가 시골집에서 가만히 앉아서 명절 교통지옥에 시달리지 않고 형제들을 맞이하는 호사를 누리는 데는 큰 비밀이 있다. 어머니를 모시고 있기 때문이다.


지체와 청각장애로 장애 3급인데다 치매가 있어 가족들 사이에 걱정이 커져 가는 때에 몇 년 전에 자청해서 시골로 어머니를 모시게 되었다. 귀농한 것을 지금껏 한 번도 후회 한 적이 없을 뿐더러 내 인생에서 잘한 것이라고는 귀농뿐이라고 생각해오던 터에 어머니를 모시고 나서는 귀농하기 잘 했다는 생각이 더 든다.

 


농사짓고 살기 때문에 어머니를 모시는 게 가능했고 어머니 건강이 눈에 띄게 좋아지셨다. 건강이 좋아지신 것은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건강이란 좋다가도 나쁘고, 앓고 죽고 하는 것이 삶이니까. 
무엇보다 시골에 살게 되면서 어머니가 물 만난 고기처럼 펄펄 기가 살아 나셨다. 몸은 늙고 병들었지만 하루하루를 생동감 있게 사신다. 서울 살 때는 어머니가 주도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방안에 들어 앉아 잠을 자거나 옷에 오줌 누는 것뿐이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었다. 어머니에게 모든 것은 금지 품목이었다. 일거리를 만드니까 그렇다.


시골에서는 농사짓는 아들한테 자신만만하게 잔소리 할 수 있는 것들이 지천에 깔려 있다는 것만 해도 어머니로서는 살맛 나는 일인 것이 분명하다. 시골살이에서는 서울에서와 달리 어머니가 큰 소리 칠 수 있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어머니의 잔소리는 어디에서도 배울 수 없는 삶의 지혜들로 가득 차 있다. 눈이 이불이라면서 ‘눈 많이 오면 보리풍년 든다’는 말은 물이 많아 겨울 작물들이 이른 봄부터 잘 자랄 거라는 말이다. ‘아침에 안개가 짙게 끼면 한낮에 중 머리 벗겨진다’고 하시기에 뭔 말인가 싶었는데 한낮의 무더위가 말도 못하게 심한 걸 보고서야 말뜻을 알게 되었다. 농사와 관련된 지혜가 대부분이지만 사람관계나 살아가는 도리에 대한 언질도 참 많다.   


시골에서는 노모 스스로 할 수 있는 일들도 많다. 청국장 띄우고, 콩나물 길러 먹고, 수제비 만들고, 닭 모이 주고, 마당에 풀 매고, 아궁이에 군불 때고, 밭둑에 퍼질러 앉아 쑥 캐고, 나물 가리고, 호박 썰어 말리고.   


어머니랑 살면서 새로이 발견하게 된 것이 있다. 5천년 한민족의 역사를 삶 속에 지닌 마지막 세대라는 것이다. 어머니 세대는 완전한 지방어를 사용하는 우리 역사의 마지막 세대이다. 생활의 모든 흐름을 절기와 자연에 연결하고 있을뿐더러 생각이나 행동까지도 그러하다. 이런 사실의 발견은 세상을 다른 각도로 보게 하는 충격이다.

 

무엇보다 시골에 살게 되면서 어머니가 물 만난 고기처럼 펄펄 기가 살아 나셨다. 몸은 늙고 병들었지만 하루하루를 생동감 있게 사신다는 점이다.


수사기관에서 툭하면 일가친척까지 포함해 온 집안을 뒤집어 놓았고, 여기저기 끌려가 고초를 겪으면서 집안의 걱정거리였던 막내아들인 내가 그 모든 과거의 업보들을 한 순간에 다 씻고 집안의 보배로 등극할 수 있게 된 것도 농사짓고 살면서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덕이라 하겠다.
 

특히 요즘은 너도나도 시골 적당한 곳에 근거지를 하나 마련해서 휴가 때는 물론 지친 일상을 주말에라도 가서 풀고 싶어하는 도시인들이 많아졌는데 매형과 매제는 물론 조카사위와 그 주변 사람들까지 내가 사는 이곳에 와서 일도 거들고 얘기도 나누고 있다.


어쩌면 평생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을 수도 있는 고종사촌의 아들딸과 그 자녀들까지 우리 집에 오고 가는 것은 다 어머니 덕이고 시골살이를 하게 된 데 따른 것이라 아니 할 수 없다. 그림까지 그려가며 촌수를 설명하는 형님 아니면 따져보지도 못할 먼 피붙이들도 많다. 그들이 올 때 가지고 오는 도시 부산물들을 얻는 재미도 좋고, 내가 지은 농산물들을 사 가니 더욱 좋다.
 

멀고 먼 친척인 사람 하나는 목재 공장을 한다고 했다. 수출용 기계류의 나무 상자를 만든다는데 한번은 5톤 트럭에 한 차 땔감으로 싣고 왔다. 이걸로 생태 뒷간을 멋지게 지을 수 있었다. 이종 사촌은 부산에서 큰 옷 가게를 한다면서 이불이랑 베개, 옷가지들을 그득 싣고 오기도 했다.


이런 걸 다 꿰뚫어 보고 계시기 때문일까. 어머니는 화가 나면 대 놓고 하시는 말씀이 있다. “네가 누구 덕에 먹고 사는 줄 알아? 다 내 덕에 먹고 살면서!”라며 호통이다.


아무리 나이 잡수시고 병이 있어 움직이지 못한다고 해도 부모는 살아 계시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나게 큰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우리가 평소 망각하고 있는 것이 문제 일뿐이다.
자식이나 늙은 부모가 관리나 보호의 대상이 아니라 같이 살아가는 식구라는 점을 실현할 수 있는 공간은 누가 뭐래도 시골이 아닐까 한다. 가족이 함께 하는 농사생활에서 말이다.   

 


글을 쓴 전희식(귀농운동본부 이사) 님은 경남 함양에서 태어났고, 지금은 전북 장수에서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최근 어머니와의 자연치유 기록을 담은 <똥꽃>을 펴냈습니다. ‘농주’의 귀농일기를 담은 누리집(www.nongju.net)도 있습니다.



 


http://www.salimstory.net/renewal/sub/view.php?post_id=1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