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0호 2016년 7월호 살림,살림

[ 책으로 떠나는 인문학 여행-배움의 속내를 그린 두 교실 이야기 ]

배움의 실종인가 삶의 실종인가

글 하승우

흔히 사람들은 배움이 사라진 시대라고 얘기한다. 학교는 있지만 교육은 없고 교사는 있지만 스승은 없고 학생은 있지만 제자는 없는. 그럼에도 사람들은 계속 새로 태어나고 학교는 유지되고 교사라는 직업과 학생이라는 신분은 사라지지 않는다. 껍질은 유지되지만 내용은 사라지니 사회는 점점 쭉정이로 변한다. 사회를 다시 채울 방법은 없을까?

 

 

성장의 속성은 지식이 아닌 시간
한국 사회에서 공식적으로 배움이 시작되는 첫 관문, 초등 1학년. 여전히 줄서기와 조례, 교장 선생님 훈화 말씀이 이어지는 입학식을 치르고 나면 아이들은 1학년 교실로 사라진다. 그 안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학교를 가는 학생도, 학교를 보내는 부모도 잘 알지 못하는 1학년의 학교생활, 그 궁금증을 풀어 주는 책이 있다. 학교의 일상과 교사의 생각을 블로그(songjh03.blog.me)에 올리며 소통하고 있는 25년차 초등 교사 송주현의 《나는 1학년 담임입니다》(낮은산, 2016)는 누구나 가지만 잘 알기 어려운 1학년 교실 이야기를 다룬다.

 

 


나는 1학년 담임입니다

송주현 지음|낮은산 펴냄|2016년

 


이 책은 “선생님, 우리 애 학교생활이 좀 어떤가요?”(4쪽)라는 학부모들의 상투적인 질문으로 시작한다. 송주현은 그 질문에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 마시라”(11쪽)는 대답이 나오기까지의 이야기를 이 책에 담았다고 한다. 사실 그 답의 전제는 ‘들어가며’에 이미 나온다. “아이들은 저 멀리 있는 ‘완성’이라는 표지판을 향해 달려가는 존재가 아닙니다. 아이들 각각은 그 자체로 이미 완성되어 있습니다. 다만 ‘완결’되지 않았을 뿐이지요.”(7쪽) 어른이나 아이나 함께 성장하는 존재라고 생각하면, 누가 누구에게 일방적으로 평가를 하기는 어려운 법이다.
책을 읽으면 저 말이 무슨 의미인지 조금씩 알게 된다. 아이들 세상이라고 해서 특별하지 않다. 상대의 호감을 사기 위해 장난감을 내어주고 때로는 싸우고 갈등하고 힘든 시간을 서로 견디기도 한다. 칭찬을 들으면 즐겁고 혼이 나면 서글프고 따돌림은 두렵다. 이렇게 “서로 부대끼며 만들어 가는 사회성”(159쪽)은 아이들에게만 필요한 능력이 아니다. “아이들의 비교, 경쟁, 계급의식 등의 밑바탕엔 어른들이 유지하는 세계의 의식이 자리 잡고 있”(173쪽)으니, “어떤가요?”라는 질문은 사실 우리 자신에게 먼저 던져야 한다.
물론 교사와 학생이라는 가르침과 배움의 존재 간 관계는 특별하다. 그런 관계 때문에 학생은 교사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하고 교사는 학생의 말과 행동에 관심을 쏟아야 한다. 지은이는 학생의 말과 행동에서 그의 일상과 학부모, 생활환경을 읽고 일일이 지침을 주기보다는 스스로 해결하려는 여지를 주려 노력한다. 그렇다고 계몽과 희망의 일대기를 쓰는 것은 아니다. 학부모가 “저런 선생이야말로 이 세상을 위해 꼭 필요한 선생이라고들 하면서 정작 자기 아이를 가르치는 담임이 되는 건 망설인다”(340~341쪽)고 말하면서, 지은이는 현실의 모순도 인정한다.

가끔 ‘엄마’ ‘아빠’라는 단어에서 성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이 읽혀 거슬리기도 하지만, 이제 막 학교라는 사회에 발을 디딘 학생의 자존감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하는 교사의 이야기라 반갑기도 하다. 이 책에서도 배움이라는 말의 뜻은 여전히 모호하지만 성장이 지식보다 시간에 달려 있음을 깨달을 수 있다.

 

 

다른 존재를 끌어안기 위한 수업
홍은전의 《노란들판의 꿈》(봄날의책, 2016)은 노들장애인야학이 걸어온 20년을 다룬다. “농부처럼 우직하게 땀 흘려 일하고 가을의 풍성한 수확을 함께 나누자는 뜻”(41쪽)으로 만들어진 노들(노란들판)장애인야학은 1993년 8월 8일에 학생 11명, 교사 11명으로 첫발을 떼었다. 당시에는 따라갈 모델도 정해진 교과서도 없었기에 모든 걸 자신의 경험과 욕구에 맞춰 하나씩 만들어 가야 했던 학교, 그래서 학생과 교사의 공동체 같던 학교, 그렇지만 “누구도 남으려 하지 않고, 남을 수도 없는 가난하고 외로운 공간이기도”(59쪽) 했던 학교는 “숨 쉬는 것 빼고는 모든 것이 차별”(69쪽)인 학생들과 함께 걸어갔다. 그러면서 “노들야학의 교실은 중증장애인의 고민과 상처, 분노가 만나고 활성화되는 뜨거운 ‘현장’이 되어”(71쪽) 갔고, 학교에서의 배움은 장애인들이 세상으로 나아가는 출구를 열었다.

 

 


노란들판의 꿈
홍은전 지음|봄날의책 펴냄|2016년

 


배움이 사라졌다고 성급히 말하는 이들에게 이 책은 이 시대, 우리 사회에서 배움이 대체 무엇이어야 하느냐고, 개인의 성공이 아니라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해방의 배움이 없다고 믿느냐고 묻는다. 단지 집 밖으로 이동하기 위해서 무수히 많은 장애물을 거치고 차별을 겪어야 하는 존재에게 배움은 단순히 지식을 암기하는 과정일 수 없다. 장애인에게 배움은 그 장애와 차별을 하나씩 곱씹으며 인권과 연대를 배우고 익히는[學習] 과정, 다양한 일상과 수많은 차이 속에서 의지를 되새기고 벼리는 과정이다. “지루한 반복을 통해” “서로 다른 존재들을 끌어안기 위해” “근력을 키우는 시간, 그것이 바로 노들의 수업이었다.”(150쪽)
그래서 노들장애인야학은 마로니에공원이나 길거리에 친 천막에서도 수업을 이어갔고, 박경석 교장의 말처럼 “노들은 이곳에서 ‘밤에 공부하는 학교(야학, 夜學)’가 아니라 풀뿌리 민중들을 더 많이 만날 수 있는 ‘들판 위의 학교(야학, 野學)’”(170쪽)가 되었다. 중증장애인 K씨가 인권 강사로 학교 교단에 서서 차별받은 당사자가 직접 교육자가 되도록 하는 과정은, 그리고 약자에게 배려만 하는 것이 아니라 “약자에게 주어야 할 것은 권력이고 주변인에게 필요한 것은 중심의 자리, 자기 울음을 우는 주체의 자리”(257쪽)라는 말은 배움이라는 말의 의미를 다시 고민하게 한다. 이렇게 배움을 고민하는 노들장애인야학은 우리 시대 최후의 학교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겪고 있는 교육의 문제는 배움의 실종이 아니라 함께 먹고 마시고 부대끼고 투쟁하며 서로 상대에게 젖어 들어가고 서로 받쳐 주는 삶의 실종이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에게 배움은 아직 가능성으로 남아 있는 셈이다. ‘함께 살자’는 외침에 귀를 기울이는 것만큼 우리는 새로운 배움의 장을 구성할 수 있다. 그리고 차이가 버겁다고 입을 닫거나 손을 놓지 않고 좀 불안하고 실패하더라도 다음을 기대하며 지켜보고 좀 얄밉고 미워도 밥과 술을 나눌 수 있다면 우리는 학습할 수 있다. 그런 반복과 지루함을 견딜 시간이 아직 우리에게 남아 있다면 말이다.

 

 

↘ 하승우 님은 풀뿌리자치연구소 이음 운영위원으로 풀뿌리민주주의와 아나키즘, 자치와 공생의 삶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사회의 모순과 잘못을 지적하기 위해 날카롭고 까칠해야 하지만 삶의 방향은 우정을 향해야 한다고 믿는 ‘까칠한 로맨티스트’입니다. 오랜 수도권 생활을 접고 충북 옥천에서 자치와 자급의 삶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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