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0호 2016년 7월호 [특집] 특집-다시 시작을 위한 멈춤, 휴식

[ 편집부 3인 3색 휴식 ]

걷거나 뭉개거나 상상하거나

글 구현지, 이선미, 최도연 편집부

느리게 조금씩 혼자 걷는다
글 _ 구현지 편집장

나는 체력이 약해서 늘 ‘몸의 배터리’가 방전되지 않도록 주의한다. ‘이거 좀 위험한데?’라는 생각이 들면 바로 멈춘다. 20대가 지난 뒤 반복 학습을 통하여 나라는 사람은 정신력이나 의지로 몸 상태를 이겨 내지 못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마음이 복잡할 때는 혼자 내 속도대로 아주 느리게 걷는다. 좋아하는 일에서 강제로 떼 내어져서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을 때, 제주에 사는 언니가 길게 묻지도 않고 “우리 집에 와”라며 나를 불러들이고는 매일매일 아침밥을 먹여 길로 내보냈다. 그해 가을부터 이듬해 봄까지, 성탄절과 섣달그믐도 왼쪽으로 바다, 오른쪽으로 한라산이 보이는 제주올레길에서 보냈다. 남들은 하루면 걷는 거리를 사흘씩 걸으면서. 덕분에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고, 그 뒤로 걷기가 내 마음의 휴식이 되었다.
아무래도 서울 같은 대도시에는 혼자 걷기에 안전한 기분이 드는 데가 많지 않아 요즘에는 집 근처 골목길을 조금씩 걷는다. 논리적인 생각을 멈추고 풀이나 나무, 돌 같은 걸 보며 걸으면 뒤죽박죽이던 마음이 다시 고르게 섞여 평온해진다. 당장 걸으러 나갈 수 없다면 아주 좋아하는 김연수의 에세이집 《지지 않는다는 말》(2012)을 집어 들고 아무데나 펼쳐서 한 편을 읽는다. 같은 글도 때때로 다르게 마음을 정돈해 주니 참 신기하다.

 

 

멍하게 있는 시간이 필요해
글 _ 이선미 편집부

할 일이 빼곡한데 아무것도 못 하겠는 날이 온다. 그날은 도둑같이 오기 때문에 뾰족한 대비책이 없다. 그럴 때면 나는 텔레비전에 내 외장하드를 슬며시 연결한다. 오랜 기간 동안 엄선한 영화와 드라마가 저장되어 있는 보물 상자다. 모두 열 번도 더 넘게 본 것들이지만, 또다시 재생한다. 예전에 비디오 플레이어를 쓰다 보면 갑자기 화면이 뭉개져 보이고 기계가 돌아가지 않을 때가 있었다. 그럴 때 ‘클리닝 테이프’라는 걸 넣고 돌리면 원상 복구됐다. 그동안 화면에는 “비디오 ‘헤드’가 복구되고 있습니다”라는 문구가 떴다. 그렇다. 내 외장하드가 클리닝 테이프이고, 덕분에 내 ‘머리’가 회복되는 것이다.
꽤 오랜 시간 화면 앞에서 뭉개고 있다 보면 다시금 뭔가 할 수 있겠다는 느낌이 든다. ‘배고프다’고 깨닫는 게 그 징조다. 밥솥에 쌀을 안치거나 라면 물을 올리거나 뭔가를 사러 나가면 복구가 다 된 것이다. 뭐든 먹고 난 뒤 기사도 쓰고 원고도 열어 본다. 다시, 전원이 들어왔다.

 

 

글에서 해방되고 싶다
글 _ 최도연 편집부

내게 어떤 쉼이 필요한지, 나는 맨날 맨날 생각한다. “심심해 죽겠어, 할 게 없어서 너무 무료해.” 이런 순간을 누리는 것. 저런 순간을 나는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했다. 그러려면 ‘글’로부터 해방돼야 한다. 편집자는 쉬어도 온전히 쉴 수 없다. 칼퇴근, 주말, 휴가가 소용없다. 아무리 멋진 동남아 휴양지에 가 있어도 내 책상엔, 가방엔, 머릿속엔 아직 읽지 못한, 읽어야 할 원고와 책이 있기 때문이다. 등산을 좋아해 산에 올라 시원한 바람을 맞는 순간에도 내 깊은 곳엔 읽어야 할 원고와 책이 똬리를 틀고 있어서 “야호”가 나오다 만다.
주어진 일을 주어진 시간에 열심히 하고, 그 밖의 시간은 온전히 내 것이면 좋겠다. 그러다 정말 아무것도 할 게 없어서, 무료함을 못 견뎌 잡지나 읽다 던지고 만화나 보며 깔깔 뒤집어지고 소설이나 읽다 훌쩍이면 얼마나 좋을까. 어떤 책이든 읽다 말든 끝까지 읽든 내 맘이면 얼마나 좋을까. 한낱 꿈인가. 물론 꿈은 이루어진다. 직업을 바꾸면 된다. 그래서 바꿔 봤는데, 또 이러고 있다. 다 내 탓인가?

 

 

주어진 일을 주어진 시간에 열심히 하고, 그 밖의 시간은 온전히 내 것이면 좋겠다. 그러다 정말 아무것도 할 게 없어서, 무료함을 못 견뎌 잡지나 읽다 던지고 만화나 보며 깔깔 뒤집어지고 소설이나 읽다 훌쩍이면 얼마나 좋을까. 어떤 책이든 읽다 말든 끝까지 읽든 내 맘이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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