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04호 2009년 봄 [특집] 살리는 사람, 농부

[ 딸이 만난 농부 | 변산공동체 윤구병 ]

어느 날 아버지가 농부가 되었습니다

글 윤나래

 

‘더불어 살자고 그렇게 외치더니 가족과 더불어 사는 건 싫은가 보군. ’


지금도 그날 떠올렸던 생각이 선명하다. 아버지가 시골로 내려가 농사를 지으며 살겠다고 통보하던 십 오년 전의 어느 날이었다. 곁에 누가 있었는지, 무슨 이야기를 하다 그 말이 나왔는지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주위에 누가 휙 장막이라도 드리운 듯 캄캄한 막막함을 느꼈다. 유일하게 기억나는 편린은 고3이었던 여린 남동생의 눈물과 ‘올게 왔구나’ 싶은 얼굴로 앉은 엄마의 표정이다.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는 기나긴 대화가 있었을 수도 있고, 아직 어린(그렇다고 아버지는 생각했겠지만) 남매는 그런 심각한 화제에서 배제되었을 뿐일지도 모른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아주 어린 시절부터 끊임없이 아버지는 ‘어디론가 떠날 거다’ 하고 외쳤던 것 같다. 그게 시골이건 외국이건 말이다. 하여튼 우리 집만 아니면 어디든 괜찮았던 듯하니, 내 어린 시절은 늘 사라져버리는 아빠 때문에 불안함으로 얼룩졌다. 그러니 그 순간은 대여섯 살 때부터 지녀왔던 초조함이 현실로 나타나는 장면이었다.


아, 드디어 가는구나.
아버지를 말릴 수 없다는 것은 그냥 알 수 있었다. 엄마와 동생은 어땠는지 모르지만 나는 아버지가 지금이 아니라도 언젠가는 가버릴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괜스레 계속 불안하게 살면서 그렇지 않은 척, 아버지 따위 없어도 잘 사는 차가운 딸 흉내를 내느니 그 시기가 빠른 편이 차라리 낫다고 생각했다. 어렸을 때부터 유난히 아버지를 사랑해서 늘 졸졸 쫓아다니던 딸은 솔직히 지쳐있었다.


그 해 나는 전공과목에 적응하지 못해 휴학 중인데다 건강이 좋지 않아 몸무게가 삼십 몇 킬로그램까지 떨어진 상태였다. 연애도 별로였고 딱히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싶은지도 전망이 보이지 않았다. 한 마디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했다. 고개를 푹 숙이며 집으로 돌아오면 아버지와 몹시도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늘 바쁜 아버지는 내가 필요로 할 때 곁에 있지 않았다. 게다가 아버지는 위대한 계획에 마음을 빼앗겨 딸의 앙상해진 모습조차 알아채지 못했다.


‘어차피 갈 사람은 빨리 보내고 남은 가족끼리 잘 살아갈 방도를 찾는 것이 낫지 않은가.’
체념과 분노가 뒤섞인 마음으로 나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모르겠다. 귀농 혹은 낙향이 완전히 정해진 후에라도 아버지는 나와 동생을 설득하려 시도했던가? 아니면 찬찬히 농사라는 것에 대해, 농부라는 직업에 대해, 시골에서의 삶을 택하는 이유에 대해 설명해준 적이 있던가? 내 기억에는 없다. 행여 아버지가 그런 화제를 부푼 마음으로 꺼냈던들 나는 온 마음으로 듣기를 거부했을 것이다. 딱히 도시적인 삶에 심한 염증을 느끼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던 아버지. 적어도 그런 속내를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으셨다. 왜 하필 시골에 가서 농부가 되려 하는지 몹시도 당황스러웠지만 그 의문을 풀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음을 닫아버린지라 대놓고 물어보기는 싫었고 무슨 대답이 나올지 두렵기도 했다.


그래, 농사를 짓겠다는 것은 핑계에 불과하고 그저 우리 곁을 떠나고 싶을 뿐이다. 그것이 갓 스물을 넘긴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가 변산에 내려가기 위해 어떤 준비를 하고 계셨는지, 처음에 어떻게 정착했는지에 대해 남들보다 오히려 더 모르고 있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어느 날 갑자기 짐을 싸서 내려간 게 아니라 정리할 일들도 많고 하여 처음에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서울에 올라오셨다는 정도만 알고 있다.


아버지 머릿속에는 어떤 그림이 그려져 있었을까? 변산에 터를 잡고 농사를 지으며 공동체 생활을 하는 꿈에 대해 누구와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아이는 덜 자란 어른이 아니라 하나의 완전한 인격체’라는 교육방침을 가졌던 아버지가, 왜 나와는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았을까? 어떤 계획을 언제까지 어떻게 이룰지 찬찬히 말씀해주시면 다 알아들었을 텐데. 전혀 알지 못하는 생소한 ‘농사’에 빠져 있는 아버지를 보며 우리 가족은 뒤에 내팽개쳐진 느낌이었다.


그러나 초보 농부가 처음부터 제대로 낯선 땅에서 쉽사리 적응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시골에 내려가고 나서도 아버지는 돌발 상황이 생기면 서울에 전화를 해 이것저것 수소문을 하는 일이 많았다. 물론 아버지의 시골생활이 유유자적하리라 생각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평생 온갖 서류나 재정적인 일을 어머니에게 맡겨 온 아버지로서는 혼자 헤쳐 나가야 하는 일이 쉽지 않았으리라 본다. 아버지가 벌여 놓은 일 때문에 어머니가 우왕좌왕 신경 쓰고 고생하는 모습을 보니 울화가 치밀 지경이었다. 거대한 마스터플랜은 혼자 다 생각하고 이런 잡일과 생고생만 우리에게 떠미는 모양새였다. 지금도 어머니가 어떻게 그 과정을 다 참아냈는지 감탄스럽다. ‘차라리 이혼하고 가라’고 펄펄 뛰는 딸에게 아버지는 굉장히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꿈을 이루는 과정에서 도움을 받는 것이 뭐가 이상하냐고 되묻고는 하셨다. 그때의 어린 내가 못한 말을 지금은 하고 싶다.


아빠, 그건 아빠의 꿈이지 내 꿈이나 엄마의 꿈은 아니거든요.

 

그래도 농부의 딸이 되고 보니 세상이 달리 보였다


갑작스레 농부의 딸이라는 새로운 정체성이 생기자 세상이 조금은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일단 신문의 농업 관련 기사가 심상치 않게 다가왔다. 예전이라면 대충 보고 넘겨버리는 기사들에 가슴이 철렁하는 일이 많았다. 마침 아버지가 내려간 그 해는 말 많던 우루과이라운드가 발효된 해이기도 했다. 온갖 전문 경제 무역 용어로 점철된 농산물 교역 조항들을 한 줄씩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읽었다. 이런 엄청난 변화들을, 대학 물 먹었다는 나도 이렇게 어려워하면서 정보를 얻는데 정작 농민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겠구나 싶어서 가슴이 먹먹해지는 때가 많았다.


시장이나 슈퍼마켓에 늘어선 채소들도 새로이 다가왔다. 부끄럽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제철 과일과 채소에 대한 개념이 거의 없었다. 온실에서 자라고 비행기를 타고 와 말끔하게 놓인 채소와 과일은 사시사철 한없이 나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아버지가 간간히 전해 오는 소식이랄지 엄살이랄지 싶은 이야기를 전해 들으면 푸성귀와 과일의 제철을 실감했다. 고구마를 캐다가 손을 삐끗했다거나 고추 농사가 생각보다 힘들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연스레 그 계절과 땅의 작물들을 연결시키게 되었다. 가끔씩 서울로 부쳐 온 택배 상자 안에 든 아버지의 수확물들도 한 몫을 했다.


아버지가 생산력이 뛰어나서 쑥쑥 탐스런 작물을 키워내거나 땅을 효율적으로 잘 사용하는 농부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허튼 짓을 하지 않는다는 점은 믿고 있다. 단순히 시류가 ‘유기농’이라서 대충 기준에만 맞춰서 농사를 짓거나, 보이지 않는 데서 편하게 일처리를 해버리는 요령을 부리거나 하지는 않는다.

어찌 보면 누가 알아주지도 않는데 미련하다 싶을 정도로 땅과 식물을 살피며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안다. 콩 타작도 기계가 아닌 손으로 해서 사람들의 원성을 듣고, 자연 거름을 만들기 위해 화장실을 희한하게 설치해놓는 식이다. 그리고 그렇게 고집을 부리면서 느리게 가는 길이 결국은 논밭과 작물들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이라는 사실을 이제는 나도 안다. 그토록 많은 이들이 등 돌리고 떠난 농촌에 누군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단순한 일손이 아니라 어떤 변혁이 있어야 하며, 그 일에 어울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아버지이리라. 참으로 인정하기 싫지만 지금껏 농부로서의 아버지를 보며 그리 깨달았다.


그러나 이것만은 확실히 말할 수 있다. 농부가 되는 과정에서 아버지는 오류를 너무 많이 범했다. 그 대부분은 주위의 사랑하는 이들이 감내해야 했다. 그리고 이것은 시골로 떠나는 많은 사람들 역시 저지르기 쉬운 일이다.


아버지들은 자신이 가장 큰 삶의 무게를 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도시 생활이 힘들고 여러 가지 압력에 등 떠밀리는 것은 아이나 아내에게도 마찬가지다. 정말로 도망가자는 심정이 아닐 바에야 농사와 땅에 대한 결심이 섰다면, 아주 작은 발걸음을 뗄 때부터 가족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한다. 딱히 온 가족이 삶의 거처를 단번에 옮겨야 진정한 땅과의 교류를 이룰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농사와 가까워질 길은 얼마든지 있다. 물론 우리 땅과 농산물 문제, 도시와 농촌의 현실을 생각하면 큰 뜻을 품은 이들이 초조해 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의 가족에게조차 땅과 사람, 농사에 대한 공감을 얻어내지 못한다면 아무리 농부가 된다 해도 그로 인해 세상 한구석이 행복해지는 일은 힘들지 않을까.


준비하는 시간이 오래 걸리고 본격적인 농사를 짓는 날까지 그 미래가 까마득해지더라도 괜찮다. 내가 농부가 되고 농사를 지으면서 행복하고, 그 행복으로 인해 가까운 이들이 행복해지는 것이 정답이다. 도시 사람들까지 함께 손잡고 갈 수 있는 그런 세상이 결국, 더불어 사는 세상 아닌가.


가끔 밤에 꿈을 꾼다. 아버지의 시골집에서 즐겁게 밥상을 차려놓고 일 나갔던 가족들이 돌아오길 기다리는 그런 꿈. 깨고 나면 그런 일이 현실로 일어날까봐 두렵기도 하다. 문득문득 나도 땅과 호흡하며 살고 싶다는 생각에 젖는 것이다. 그러나 성큼성큼 농부가 되어버린 아버지의 뒤에 남겨진 상처는 사라지지 않나 보다. 나는 단 한 번도 변산에 들른 적이 없다. 앞으로도 그곳에 갈 일은 없을 것이다.   

 


가정환경이 인간을 만든다는 일설은 좋든 나쁘든 당연한 것이다.
알기 쉬운 예를 들자면,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의 딸은
농약을 한 방울도 뿌리지 않은 채소만 먹는 채식주의자로 자랐다.
그녀는 반항기에는 돈 많은 아저씨의 정부가 되어
매일 스테이크를 먹으면서 섹스로 날을 새웠다.
반작용이야, 라면서 모두들 쑥덕거렸다.
그런데 어른이 되자 그녀는 갑자기 집을 뛰쳐나가,
수염이 텁수룩한 애인과 함께
야마기시라든가 뭐라는 데에서 밭을 갈며 살기 시작했다.
이만큼 알기 쉽지는 않아도. 대개가 그렇다.
아무리 발버둥치고 도망을 쳐도, 결국은 같은 틀 안에서 산다.


- 요시모토 바나나 <하치의 마지막 연인> 중에서.

 


글을 쓴 윤나래 님은 1995년 충북대학교 철학과 교수직을 그만두고 전북 부안으로 내려가 변산공동체를 일구며 농부가 된 윤구병 님의 딸이지만, 그러한 꼬리표를 몹시 싫어하여 이 글을 쓰는 데 큰 용기가 필요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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