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호 2016년 4월호 살림,살림

[ 옛 농부들의 농사이야기-천지만물 기운 씨앗에 스미게 했던 옛 생태역동농법 ]

태교처럼 중요한 씨앗 받기와 씨앗 관리

글 전희식 _ 그림 전새날

초등학생이 받아쓰기하듯이 꼬박꼬박 농사 일기를 쓰던 때가 있었다. 일기라 하면 그날 있었던 일을 끝내고 적는 것이지만 그때는 농사를 처음 시작하는 때인지라 도리어 반대였다. 뭘 해야 할지 농가월령가나 작물별 농사 일람표를 들여다보고 농사를 짓다 보니 농사일지를 먼저 쓰고 농사일을 나가는 식이었다. 4월에 특히 그랬다.

 

 

심고 뿌리고 옮기고 가꾸고
일 년 중 가장 바쁜 때가 4월이다. 밭 갈고 씨 뿌리고 겨울 작물 돌보기 딱 좋은 청명과 곡우가 있어서다. 농사 초기에는 자료나 책을 끼고 다니지 않으면 뭐부터 시작해야 할지 허둥거리기 일쑤였다. 나날이 하루해가 길어지지만 씨를 뿌리고 모종을 키워 옮겨심기에는 서산에 떨어지는 해가 늘 짧게 느껴졌다. 감자 심는 3월 말만 해도 빈둥거릴 시간이 있었는데 청명·곡우를 지나면 다르다. 일거리가 첩첩이다. 20년 전 ‘초짜’ 모범농부 시절의 농사 일기를 본다.

 

4월 초순
쑥갓과 비트씨앗 파종. 옥수수는 듬성듬성 싹이 올라옴. 고수씨앗 뿌림, 갑자기 초여름 날씨 같음. 호박과 참외는 종이컵에 씨 넣음. 당근 파종, 야콘 뇌두에서 새싹 분리. 열무 올라옴. 완두콩 떡잎 나옴. 상추씨앗은 아랫목에 하룻밤 재우고 심었더니 이틀만에 싹틈.
4월 중하순
강낭콩과 작두콩 심음. 갓끈동부 파종. 도라지씨앗 모래에 섞어 뿌림. 해바라기씨 텃밭에 뿌림. 결명자 파종. 옥수수 모종 옮기기. 참외 싹 세 개 나타남. 부추 싹 제법 잘 올라옴. 비트 제법 많이 올라옴. 토마토 한 포기 500원씩 열 포기 사다 심음.

 

 

왕실에서 남녀 합궁을 준비하듯
파종은 크게 씨앗을 밭에 바로 심는 것과 모종을 키워 옮기는 것으로 나뉜다. 전국 어디에나 육묘장이 있어서 잘 자란 모종을 언제든 사다 심을 수 있는 요즘은 씨앗 받기나 씨앗 관리를 아예 손 놓은 농가도 있다. 씨앗도 종묘상에서 해마다 개량종이라면서 판다.
하지만 잊지 말 것이 있다. 아이를 낳아 기를 때 엄마 뱃속에 있을 때의 태교는 물론이고 임신할 때의 몸과 마음 상태가 아이에게 크게 영향을 준다는 말이 있듯이 농사에서 씨앗 받기와 씨앗 관리는 대단히 중요하다. 옛 농서에도 그렇게 나온다.
12세기 중국의 대표적인 농서인 《제민요술》과 조선 후기의 서유구가 저술한 《행포지》에는 씨앗 고르는 법과 관리 방법이 자세하게 나온다. 왕실에서 남녀 합궁하는 날짜와 시간은 물론 사전 준비와 합궁 자세까지 꼼꼼하게 확인했던 것과 같은 이치로 보인다. 옛 농서에는 뜨악하다 싶은 방법들이 구구절절 나오는데 가령 말똥을 삶아 그 즙에다가 씨앗을 담근다든가, 누에똥에 씨앗을 섞어 보관하라는 것 등이다.
중국 한나라 때 농서 《범승지서》에는 말뼈 1석을 잘라서 물 3석으로 3번 끓인 다음 찌꺼기는 걸러 낸 말뼈 즙에 바꽃의 어린뿌리인 부자를 5개 담그라고 한다. 3~4일 뒤에 부자를 빼내고 말뼈 즙과 누에똥, 양똥은 같은 분량 넣어 섞고 휘저어 진한 죽처럼 반죽해서 파종 20여 일 전에 종자와 뒤섞으라고 한다. 참 까다롭고 복잡하다.
종자를 섞어 반죽할 때마다 햇볕에 말려 다시 반죽하기를 6~7번이나 하라니 보통 일이 아니다. 말뼈가 없으면 어떻게 할까? 소뼈? 염소뼈? 천만에. 눈이 녹은 물을 쓰라고 한다. 하늘에서 내리는 눈과 말뼈가 어떤 연관이 있기에 서로가 대체재란 말인가? 정농회는 눈 녹인 물을 생명역동농법에서 빼놓을 수 없는 침종수로 여긴다.《강대인의 유기농 벼농사》에 보면 눈 녹인 물을 소중하게 보관했다가 침종수로 쓰라고 몇 번씩 강조한다. 서로 비슷한 얘기를 하고 있다.

 

소독한다는 명목으로 독한 화학 농약에 씨앗을 담그고 온도변화가 별로 없는 가온시설 안에 습기 찬 공간에서 농약 세례를 받아가며 자란 육묘장의 모종은 심각한 트라우마에 시달릴 것이다. 뿌리 모양만 봐도 안다. 사람은 눈빛과 표정으로 안다면 식물은 뿌리로 알 수 있다.

 

 

동물 몸의 정기는 산소를, 별 기운은 질소를 나른다
신기한 일이다. 생명역동농법은 1924년에 독일의 교육농철학자 루돌프 슈타이너가 창시한 농법인데 어찌 기원전 5~6세기의 동양 농서와 이리도 똑같은지. 생명역동농법에서는 증폭제를 만들어 농장에 뿌리는데 증폭제란 암소의 뿔에 소똥을 채워서 겨우내 농장에 묻어 두었다가 봄에 꺼내서 물에 타 좌우로 휘저어 만든 것이다.
떡갈나무 껍질을 속에 채워 넣은 소 두개골을 땅에 묻어 만들기도 한다. 이렇게 하면 수확이 갑절이 된다고 한다. 이는 단순한 동물의 배설물이 아니라 소나 말의 신체 조직 안에 있는 정기와 달, 수성, 금성, 목성의 별 기운이 땅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동물 신체 조직의 정기에는 산소를 공급하는 기운이, 별 기운에는 질소를 실어 나르는 기운이 차 있는데 이것이 농사에 꼭 필요하다니 요즘 사람에게 쉽게 이해되지는 않을 것이다.
상추 한 포기도 이렇게 키우기를 옛 농서와 생명역동농법에서 강조한다. 조선시대 세종 때 나온 《농사직설》에서는 외양간이나 마구간의 웅덩이에 고이는 오줌에 종자를 담갔다 걸러 내어 볕에 쬐어 말리되 3번 반복하라고 적고 있다. 소 오줌에 고치 번데기를 삶아 그 즙에 종자를 담그는 것도 권한다. 질소 중심의 영양분과 22~23℃ 기온, 그리고 물만 주면 잘 자란다고 보는 현대 농법의 시설재배와는 아주 딴판이다.

 

사람의 체온이 2~3℃ 높아져 39.5℃라면 어떤가. 빨리 조처를 취하지 않으면 죽는다. 지구온난화를 별게 아니라고 여기고 단지 열대성작물을 갖다 키우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생명권에 대해 참으로 무지한 처사이다.

 

 

소독한다며 독한 화학 농약에 씨앗을 담가 키우는 육묘장 모종
요즘 종자 소독하고는 전혀 다른 차원이다. 종자가 외부 박테리아나 바이러스에 오염되는 것을 막는 소독의 의미가 아니다. 천지만물의 기운이 씨앗에 스미게 하려고 했다. 강원 원주의 생명운동 터줏대감인 장일순 선생이 강조하는 ‘나락 한 알 속의 우주’라는 동학사상과 연결된다. 슈타이너는 “현대 농법의 농작물은 사람의 위장을 채우는 양분덩이 일 수는 있어도 인간의 내면적 건강을 절대 담보하지 못한다”라고 말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애를 가져 출산하는 것을 농부가 토종종자를 직접 채종하는 것이라 비유한다면, 육묘장 모종은 차마 뭐라 비유할 수가 없다. ‘육묘장 복지’가 거론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소독한다는 명분 아래 독한 화학농약에 씨앗을 담그고 온도변화가 별로 없는 가온시설 아래 습기 찬 공간에 농약 세례를 받아가며 자란 육묘장의 모종은 심각한 트라우마에 시달릴 것이다. 뿌리 모양만 봐도 그렇다. 사람은 눈빛과 표정으로 알 수 있다면 식물은 뿌리로 알 수 있다. 육묘장 포토 모종은 뿌리가 심각한 훼손 상태에 있다. 거의 학대 수준이다. 옛 농서를 쓴 작자들이 이런 모습을 본다면 대경실색할 게 뻔하다.
플라스틱 좁은 공간에서 작물의 뿌리가 인공 흙인 상토와 뒤엉켜 배배 꼬여 있다. 식물의 뿌리는 원래 눈으로 보이는 실뿌리에서부터 적어도 30cm 이상을 마이코리자(내생균근)라 부르는 균류가 뻗어 있어서 식물 뿌리의 양분 흡수율을 2천 배나 올려 주는 역할을 한다. 마이코리자가 포토 묘종에는 없다. 그러니 식물이 건강할 수 없다. 더구나 포토 묘종을 밭에 옮겨 심으면 새 뿌리는 배배 꼬인 뿌리의 마디에서 새로 뻗어 나가야 하기 때문에 심한 몸살을 앓는다. 노지에 직파해서 그 모종을 다시 옮겨 심는 것이 좋다. 일손이 더 들고 작업 능률이 낮긴 하지만 그래야 작물이 튼튼하다.

 

 

콩은 찔레꽃 필 때, 기장과 조는 느릅나무 싹틀 때
씨앗이나 모종을 심고 나면 맨땅이 안 보이게 잘 덮어 줘야 한다. 상호대립억제작용을 하는 볏짚이나 솔갈비가 좋다. 상호억제작용이란 일본식 용어로는 타감작용이라 하는데 어떤 식물체에서 물질이 생성되고 분비되어 다른 식물의 발아와 생장에 영향을 미치는 현상을 말한다.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지구상의 모든 식물은 상호대립억제물질을 일부 함유한다.
잡초를 억제하는 데는 은행나무 잎이나 솔갈비도 좋고 밀도 좋다. 모종이 너무 빠르거나 늦으면 기상조건 등 여러 가지 원인 때문에 생육 장애를 일으켜 수량이 감소한다. 어느 시기에 심으면 생육이 양호하여 수량을 최대로 낼 수 있는지는 작물마다 다르다. 콩은 찔레꽃이 필 때가 좋고 기장이나 조는 느릅나무가 싹틀 때가 좋다.
요즘은 기후변화 때문에 절기가 빨라졌다. 식목일보다 보름은 일찍 나무를 심는 추세다. 최근 100년 사이에 한반도 평균 기온이 섭씨 2℃ 오른 결과다. 단지 2℃ 오른 것이라고 가볍게 봐서는 안 되는 것이 대기권을 포함해서 지구는 하나의 유기체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체온이 2~3℃ 높아져 39.5℃라면 어떤가. 빨리 조처를 취하지 않으면 죽는다. 지구온난화를 별게 아니라고 여기고 단지 열대성작물을 갖다 키우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생명권에 대해 참으로 무지한 처사이다.

 

 


↘ 전희식 님은 농민생활인문학 대표로, 전북 장수군 산골에 살면서 《똥꽃》, 《엄마하고 나하고》, 《시골집 고쳐 살기》 등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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