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호 2016년 1월호 [특집] 특집-우리들의 유기농

[ 유기농을 유기농답게 하는 건 생산에 대한 신뢰 ]

인증마크가 아니라 믿음으로

글 이기성 _ 사진 가톨릭농민회

유기농에서는 순순하게 땀 흘리며 생명을 살리는 농민들과 이를 책임지고 소비하는 사람들 간의 신뢰를 쌓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래서 가톨릭농민회에서는 유기농·무농약·저농약과 같은 인증을 얻기 위한 심사에 매달리기보다는 일일이 손으로 풀을 매며 벌레를 잡는 농민들의 모습과 농사방법을 알리고자 했다. 인증마크가 없어도 농민의 얼굴이 ‘진짜 인증’이다.

 

 

 

농민은 단순히 농산물을 공급하는 '공급처'가 아니라 땅과 환경을 지키는 '생태사도'이다. 농민들 역시 이에 자부심을 느끼고 양심을 바탕으로 유기농사를 짓는다.

 

 

농민은 땅을 지키는 사도
“한우가 아니면 1억 보상!”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현수막이다. 하지만 뜨거운 불판 위에 미국산 소고기가 한우로 둔갑하여 올라간다 하더라도 우리는 잘 알 수 없다. 한 치의 의심 없이 안심하고 먹는다면, 그건 한우가 아니면 1억 원을 준다는 현수막의 문구 때문이 아니라 속이지 않을 것이라는 ‘고깃집 사장님’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생산과 소비 사이에 ‘신뢰’만큼 더 중요한 건 없다. 유기농으로 대표되는 친환경농업의 생산과 소비에서는 특히 그렇다. 누가 어떻게 농사를 지었는지 알지 못하고 이해할 수 없다면, 백화점에서 파는 아무리 비싼 유기농산물이라도 시중의 관행농산물과 다름이 없다고 생각한다. 유기농의 기준을 농약성분 유무로만 본다면 현재 한국에서 쓰는 농약은 대부분 물에 씻겨 없어지게 돼 있으니 말이다.
가톨릭농민회 생산규정에는 “가톨릭농민회원의 농산물 재배 중 심각한 피해가 예상되는 경우에 전국 생명농업실천위원회에 신고하고 논의 후 처리”하게 되어 있다. 화석연료를 통한 가온재배는 허용하지 않는다. 사과나 배의 경우에는 저농약이라 하더라도 화학비료 사용이 금지되어 있다. 이러한 원칙들이 지켜지는 이유는 농민들을 농산물을 공급하는 ‘공급처’로 보는 것이 아니라 땅을 지키는 ‘생태사도’로 보기 때문이다. 농민들 역시 이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양심을 바탕으로 시중의 유기농 기준보다 훨씬 지키기 어려운 자체 규정과 점검체계에 맞게 농사를 짓고 있다.

 


“여러분이 농사짓는 거라면 언제든지 사 먹을 거예요”
올해부터 저농약 인증을 완전히 없앤다는 정부의 대책 없는 결정이 오히려 새로운 기회가 됐다. 그동안 일군 생명의 땅을 다시 제초제 등 농약과 화학비료로 가득한 죽음의 땅으로 돌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동안 땀 흘리며 생명을 택하였던 농민들을 지켜 내기 위해서는 더욱 그랬다. 그래서 가톨릭농민회에서는 2014년 ‘가농인증 추진위원회’를 발족하였고, ‘저농약 인증 폐지에 따른 과수가농인증’을 추진하였다. 그해 10월 저농약 과수를 시작으로 도시의 소비자들이 산지에 직접 방문하여 농민들을 만나고 농사법을 들여다보는 ‘과수가농인증 도농산지방문단’ 활동이 시작되었다. 가톨릭농민회의 생산규정에 따라 생산이 잘 이뤄졌는지 소비자들이 직접 볼 수 있게 하여 저농약 인증 대신 자체인증을 지키게 한 것이다.
하지만 도농산지방문단에 참여하는 소비자들이 자체인증을 위한 점검표를 작성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자체인증 대상자인 농민들이 산지점검표를 직접 작성한다. 그리고 작성된 산지점검표를 방문단 참여자들에게 미리 전달하여 산지에 대해 공부하고 올 수 있도록 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농민과의 대화를 통해 유기적이고 생태적인 삶과 철학을 알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생산규정을 잘 지키고 있는지, 인증기준에 맞는지 확인하는 것보다 서로 신뢰를 쌓는 데 더 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산지점검표를 누가 작성하느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 결과 “이렇게 힘들게 농사지어 주어서 고맙습니다. 생산이 많이 안 되어 생계가 어려울 때, 몰래 약을 치셔야 할 것 같아요. 그래도 우리는 여러분들이 농사짓는 거라면 언제든지 사먹을 거예요”라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신뢰가 생겼다.

 

 

2014년 저농약 과수 산지를 방문한 모습. 인증이나 산지점검표보다 농민과의 대화를 통해 농산물에 대한 신뢰가 쌓인다.

 


인증제도를 넘어서자
생산자들의 노력과 철학 그리고 그것을 실현하려고 하는 삶을 잘 알기에, 소비자들은 법적 인증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천주교 부산교구 우리농촌살리기운동본부(우리농) 소비자들은 교구 내 가톨릭농민회 언양분회원들이 지은 인증 없는 쌀을 소비하기로 결정했다.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그동안 언양분회원들은 무농약 쌀을 지어 왔다. 그런데 갑자기 인근 지역 농민들이 친환경 농사를 포기하면서 언양분회원들의 농지에까지 영향이 미쳐 인증이 취소될 수밖에 없게 됐다. 우리농 소비자들은 이러한 사실을 알고, 인증은 받을 수 없겠지만 기존처럼 무농약 농사를 계속 지어 주면 언양분회원들의 쌀을 계속 소비하겠다고 약속했다. 그 약속은 지금까지 지켜져 무농약 인증을 받지 못한 언양분회원들의 쌀이 100% 소비되고 있다.
2014년에는 위탁생산으로 구매한 토마토 모종에서 잔류농약이 검출되어 어쩔 수 없이 15년간의 농사를 포기해야 했던 광주교구 회원의 토마토를 지킨 일도 있다. 인증제도보다 수년간 생명의 가치를 실천해 온 농민의 철학과 의지를 신뢰하였기에 이 농민의 토마토를 중단 없이 직거래로 소비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신뢰를 바탕으로 한 ‘얼굴 인증’이 있었기 때문에 이 모든 게 가능했다.
수많은 농산물이 쌓여 있는 매대 앞에서 무엇을 보는가? 색깔? 맛? 크기? 이제는 생산지와 생산자의 이름 그리고 얼굴을 보고 농산물을 선택해야 할 때다. 물론 그전에 다양한 노력이 있어야 한다. 먼저 생명의 가치와 땅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쉬운 길을 포기할 수 있는 농민들이 있어야 한다. 양심에 따라 농사짓는 농민들이 많이 발굴되고 양성될 수 있게 다양한 교육과 지원이 충분히 마련되어야 한다.
유기농업이 인증제도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농업현장에서 생명농업이 구체적으로 실천되고 산지점검 관리시스템이 투명하게 정착되어야 하는 등의 과제가 있다. 또 이를 바탕으로 생산자와 소비자들이 신뢰를 쌓을 수 있는 다양한 방법과 사례가 널리 알려져야 한다. 이렇게 될 때 소비자들도 더욱 안전한 먹을거리를 접할 수 있다.

 

 

생산과정에 참여하면 믿을 수 있어요
한살림에서는 자주관리, 자주점검, 자주인증으로 생산자와 소비자조합원이 신뢰를 쌓아가고 있다. 자주관리는 생산자가 한살림 생산방식에 근거해 생산과정을 스스로 책임 있게 관리하는 것을 말하며, 모든 생산자가 참여한다. 개별 생산자의 자주관리를 바탕으로 공동체가 다시 확인하고 점검하며, 물품 구매 담당자가 수시로 생산지를 방문하여 점검한다. 또 회원생협의 소비자 조합원으로 구성된 자주점검활동팀이 ‘사전학습 → 자주점검 → 조합원 자주점검표, 자주점검보고서 작성 → 생산자 답변 → 활동결과 공유’ 과정을 통해 자주점검을 한다. 이렇게 생산자와 소비자조합원이 함께하는 자체 인증 시스템인 자주인증은 현재 사과, 배, 복숭아, 자두, 대추, 감(단감, 대봉) 등 7개 품목에 대해 진행 중이다.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자주점검에 참여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한편, 누리집을 통해 자주점검활동을 더 많이 알리고 개선사항에 대한 공유체계를 마련할 계획이다.

 

 

2014년 전남 광양 매실생산지에 간 자주점검활동단

 

 

↘ 이기성 님은 가톨릭농민회를 거쳐 현재 천주교 인천교구 우리농촌살리기운동본부 사무차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도농생명공동체를 이루고자 하는 우리농 활동에 기대어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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