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호 2016년 1월호 [특집] 특집-우리들의 유기농

[ 운동으로, 전략으로, 실천으로 ]

더 나은 유기농은 가능하다①'유기'라는 말에 담긴 상호의존적 관계를 회복하면

글 정규호

오늘날 유기농은 소비자들에게는 매력 있는 상품의 브랜드로, 생산자들에게는 소득을 보장하는 농사법으로 흔히 인식되고 있다. 초창기 양심 있는 소수 생산자들의 결단과 헌신 그리고 불편함을 무릅쓴 소수 소비자들의 선택이 모아져 척박한 조건에서 유기농의 어려운 길을 개척해 온 과정을 살펴본다면, 유기농이 주목을 받고 있는 지금의 상황은 분명 반가운 일일 수 있다. 하지만 고민과 과제 또한 적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한국, 나아가 전 세계에서 유기농의 진정성을 발전시키는 한편 영향력을 확장하기 위해 어떤 흐름들이 일어나고 있는지 살펴봤다.

 

 

농장에서 식탁까지 먹을거리의 생산과 소비 전 과정을 이윤을 앞세운 자본이 지배해 가고 있는 상황에서 유기농은 건강상품이나 고소득농법의 차원을 넘어 새로운 사회로 향하는 ‘운동’이 되어야 한다.

 

 

근대적 관행농업의 대안으로 주목받아
유기농이 자본과 국가의 영향력 아래 상품화되고 제도화될수록, 유기농을 통해 실현하고자 했던 본래의 의미와 가치는 희석되고 정체성 자체도 모호해질 수 있다. 근래에 유기농의 관행화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유기농이 등장하게 된 배경과 과정, 유기농의 근본 목적을 재확인할 필요가 있다.
유기농이 주목받게 된 것은 오랜 인류역사와 함께해 온 전통농업의 자리를 관행농업이 빠르게 대체하면서 발생한 부작용 때문이다. 근대 산업사회의 빠른 전개 속에 비료와 농약 등을 투입하여 생산량 증대를 추구해 온 관행농업은 결과적으로 농업 생산기반인 땅과 물을 오염시키고 생산자 농민과 소비자들의 건강과 생명까지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그뿐만 아니라 기계화·화학화·시설화·고투입화·단작화·상업화·외부의존화 등을 특징으로 하는 근대적 관행농업은 지력 저하 등을 불러와 생산성도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했고, 농민의 경제적 자립은 물론 식량자급 자체도 지속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이런 상황은 농업 생산과정에 자연의 유기적 순환 원리를 적용하고자 한 유기농을 의미 있는 대안으로 주목받게 했다. 유기농을 둘러싼 의미는 다양하다. 무엇보다 유기농을 통해 쉽게 만나는 의미는 ‘안전하고 건강한 먹을거리’다. 이것은 친환경 웰빙 바람이 불면서 유기농을 우리 사회에 빠르게 확산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유기농이 가진 의미와 역할은 이것만은 아니다. 생물다양성을 포함해 자연생태계를 보호하고, 농업에 기반한 지역 순환과 자립경제를 실현하며, 기후변화와 식량위기 시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유기농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졌다.

 

 
‘안전한 농산물’이라는 틀이 유기농의 관행화 부추겨
그런데 정작 우리의 현실을 들여다보면 유기농의 의미와 역할이 매우 협소하게 이해되고 적용되고 있다. 친환경, 무농약, 무항생제, 무공해 등 ‘안전한 농산물’이 유기농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이다. 문제는 유기농에 대한 제한된 인식과 접근이 결과적으로 자본과 기술의 영향력 속에서 유기농의 관행화를 부추기고 있다는 점이다. 삶의 질에 대해 대중의 관심이 높아지는 가운데 식품 관련 사고들이 연이어 발생하자 안전하고 건강한 먹을거리가 사회적으로 주목받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유기농은 정부가 정해 놓은 기준에 따라 인증 평가를 받는 대상이 되었다.
규격화된 상품으로서 유기농산물이 장거리 이동을 통해 대량 소비되면서 유기농의 관행화 현상은 확대됐다. 유기농을 브랜드 상품으로 취급하는 대형 유기농 매장이 도심 곳곳에 들어서고, ‘프리미엄’을 내세
워 수입한 고급 유기농 제품들을 기획상품으로 내놓는 곳도 속속 등장했다. 그 결과 상당한 자본과 기술력을 갖추고 농자재를 대량 투입하면서 대규모 단작 생산을 하는 농기업과 대농가들 중심으로 유기농 생산 영역이 재편되기 시작했고, 여기에다 첨단 기술과 자본이 결합된 정밀농업, 식물공장 등이 유기농의 정체성에 도전장을 내밀고 있다. 가뜩이나 FTA, TPP 등 개방농정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소농과 가족농들은 유기농 영역에서마저 밀려날 처지다.

 

 

유기농은 자연과 인간사회를 아우르는 총체적인 관점
유기농에 대한 인식의 차원은 다양하다. 우선 물질 중심적 접근에서는 ‘저투입’이나 ‘무투입’이란 말처럼 농업 생산과정과 최종 생산물에 어떤 물질들이 얼마만큼 포함되어 있느냐가 유기농을 판별하는 기준이다. 하지만 한 단계 더 나아가 농생태학적 접근에서는 비료나 농약의 사용 여부만이 아니라 농경지 생태계 전체의 순환체계와 유기적 관계를 고려한 농업 생산활동을 중요하게 본다. 자연스레 윤작, 혼작, 휴경 등이 유기농의 중요한 영역으로 들어온다. 여기서 더 나가면 유기농을 자연과 인간사회를 아우르는 총체적인 관점에서 볼 수 있다. 유기농에 종사하는 농민들의 삶을 지속가능하게 하고, 지역순환농업을 통해 지역자립의 기반을 만들며, 다양한 직거래 체계를 통해 유기농 생산자와 소비자 간에 신뢰와 협동의 관계를 만들어 가는 일 등이 그러하다. 농촌의 생산자와 도시 소비자들이 손을 잡고 도농상생의 협동사회를 일구고자 한 한살림 역시 이러한 가치를 담고 있다.
‘유기’라는 말 속에 이미 생명이 가진 상호의존적인 관계의 특성이 담겨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유기농의 의미와 역할을 더욱 확장하고 심화시켜 나갈 필요가 있다. 농장에서 식탁까지 먹을거리의 생산과 소비 전 과정을 이윤을 앞세운 자본이 지배해 가고 있는 상황에서 유기농은 건강상품이나 고소득농법의 차원을 넘어 새로운 사회로 향하는 ‘운동’이 되어야 한다. 물론 이것은 유기농 생산자들의 헌신적 노력은 물론이고 소비자들의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한 지혜로운 선택과 협력이 있을 때 가능한 일이다. 생명의 농업을 뿌리째 흔들고 있는 돈과 권력의 작동 방식이 결국 세월호 참사와 메르스 사태를 발생시켰다는 점에서, 자연과 사회와 우주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자각하고 실천하는 유기농운동은 생명살림 세상을 열어 가는 중요한 열쇳말이다.

 

 

 

↘ 정규호 님은 환경·공동체·풀뿌리·민주주의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대안사회에 대해 연구하는 연구자입니다. 현재 모심과살림연구소 소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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