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호 2015년 11월호 [특집] 특집-우리들의 아름다운 노년

[ 영화 <인턴>과 <그랜 토리노>를 통해 본 삶의 핵심 ]

욕망이든 죄의식이든 다른 사람과 주고받으며

글 이영진

얼마 전 개봉한 영화 <인턴>의 주인공 벤은 부족함 없이 노년의 삶을 만끽하고 있다. 누군가의 부축을 받을 만큼 몸이 쇠약한 것도 아니고, 누군가에게 손을 벌릴 만큼 빈궁하지도 않다. 화초 재배부터 중국어 회화까지 각종 취미를 섭렵하느라 지루함과는 거리가 멀다. 한데 그가 왜 갑자기 시니어 인턴 프로그램에 지원할까? “내 삶에 난 구멍을 하루 빨리 채우고 싶다”는 벤의 소망은 무엇을 뜻할까?

 

 

 

누구도 늙음을 피할 순 없다

조너선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에는 ‘스트럴드블럭’이라 불리는 이들이 등장한다. 태어날 때 눈썹 위에 붉고 둥근 반점을 지닌 스트럴드블럭은 ‘영원히 죽지 않는 불멸의 존재’이다. 만약 당신이 스트럴드블럭이라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질문을 받자 걸리버 선장은 주저 없이 답한다. “절약과 저축으로 재산을 불려서 제일가는 부자가 될 것이고, 끊임없이 지식을 축적해 국가의 예언자가 될 것이며, 세상이 부패하고 인간이 타락하는 것에 대항해 끝까지 싸울 것”이라고. 걸리버 선장의 호기로운 상상처럼 영생과 불사의 스트럴드블럭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종족일까? 한데 스트럴드블럭이라고 해도 늙음을 피하긴 어렵다면? 불사의 그들이 젊음을 유지한 채 영생을 누리는 게 아니라면?

삶의 영역에도 뿌리내리지 못하고 죽음의 영역에도 발들일 수 없다면 스트럴드블럭의 ‘천수’는 실은 ‘천형’이 아닐까. “125살 된 사람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재생한 장기와 전자 칩, 온갖 종류의 인공물을 삽입한 모습을 말입니다. 그 사람이 언젠가 그만 됐다고 생각할 날이 오겠지요. 친구들도 모두 저 세상으로 떠나고 살만큼 살았으니까요. 그러면 모든 것을 멈추고 기계를 꺼 버리고 싶을 겁니다.” 프랑스의 생화학자인 조엘 드 로스네가 《노인으로 산다는 것》에서 묘사한 가까운 미래의 노인은 어쩌면 현대판 스트럴드블럭일지 모른다.

 

 

인턴_The Intern(2015)
감독: 낸시 마이어스/ 출연: 앤 해서웨이, 로버트 드 니
로, 르네 루소, 냇 울프 등/ 상영시간: 121분

 

 

육체는 쇠하여도 욕망은 꿈틀댄다

영화 <인턴>(2015)에 등장하는 70살 노인 벤(로버트 드 니로)의 무모한 용기는 어쩌면 스트럴드블럭으로 전락하지 않으려는 몸부림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늙어가는 것이 비극이 아니라 늙어도 마음은 여전히 젊은 채로 남아 있다는 것이 비극이다.” 1백여 년 전 오스카 와일드의 한탄처럼, 인간의 육체는 쇠하지만 욕망은 사그라들지 않는다. 게다가 욕망은 절대로 홀로 작동하지 않는다. 근본적으로 욕망은 자신과 다른 사람의 승인을 요구한다. 나를 어디선가 지켜보고, 나를 슬며시 추동하고, 때론 나를 단호하게 거부하는 타자가 전제되어야만 그때서야 욕망은 꿈틀거린다. <인턴>의 도입부에서 벤이 또래 노인의 흔한 데이트 신청을 회피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여생을 한가로이 보내는 평범한 늙은이로 자신을 취급하는 상대는 벤의 타자가 될 수 없다. ‘당신이나 나나 매한가지인데 뭘 그리 재느냐’는 상대의 표정은 벤에겐 참을 수 없는 모욕에 가깝다.

반면, 제 앞가림은 못하고 제멋대로이기만한 젊은이들의 경멸 어린 시선이야말로 벤의 욕망을 분출하게끔 만드는 원천이다. 30대 여사장 줄스(앤 해서웨이)의 변덕과 짜증과 무시 앞에서도 벤은 당황하지 않는다. 새파랗게 젊은 상사와 동료들의 온갖 고민을 해결해 주면서도 벤은 싫증내지 않는다. 그들이야말로 자신이 찾던 타자들이고, 그들과의 어울림이야말로 자신의 욕망을 확인할 수 있는 관계들이어서다. 그는 타자를 만남으로써만 자신의 진짜 욕망과 대면할 수 있다. 이는 벤뿐만 아니라 젊은이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처음에 줄스는 오지랖이 넓어 온갖 일에 끼어드는 벤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다른 부서로 보내지만, 곧바로 그의 존재가 자신의 구멍 난 삶을 슬며시 메우고 있었음을 느낀다.

<인턴>의 캐릭터와 설정이 세대 간의 갈등을 해결하는 데 다소 낭만적이거나 순진한 구석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벤은 부족함 없고 친절하기까지 한 키다리 아저씨의 환생이니까 말이다. 줄스가 벤을 추켜세우면서 풋내 나는 애송이들에게서는 잭 니콜슨이나 해리슨 포드와 같은 멋진 남자의 신사도를 찾아볼 수 없다고 말하는 장면에서는 백마 탄 왕자님 스토리의 변형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인턴>은 경험과 권위와 지혜를 가지고 있다고 존중받았던 전통사회에서의 이상화된 노인을 끌어들이지만, 실제로는 현실의 노인을 대상화하고 외면하는 우를 범한 것은 아닐까? <인턴>을 관람하는 동안 내내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그랜토리노>(2008)가 떠올랐다.

 

 

그랜 토리노_Gran Torino(2008)
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 출연: 클린트 이스트우드, 크
리스토퍼 칼리, 비 방, 아니 허 등/ 상영시간: 116분

 

 

관계 맺음이 없는 생명은 죽음보다 가치 없다

성마르고 외골수인 코왈스키(클린트 이스트우드)는 포드 사에서 오랫동안 일하다 은퇴한 노인이다. 아내가 죽었지만 자식들의 도움을 받지 않고 철거 직전의 빈민가에서 혼자 살아간다. 그는 누구도 믿지 않고,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는다. 죽은 아내의 부탁이었다며 고해성사를 하라고 재촉하는 젊은 신부를 모욕하고, 요양원으로 자신을 보내려는 자식들은 쫓아낸다. 코왈스키는 그러니까 손을 내밀면 침을 뱉는, 괴팍하기 짝이 없는 노인이다. 옆집에 이사 온 베트남 이민가족 또한 그의 눈엔 새 이웃이 아니라 미개한 야만인일 뿐이다. 코왈스키의 위안은 1973년산 자동차 그랜 토리노를 닦거나 기르는 개 데이지를 돌보는 게 전부다. 무슨 이유로 그는 세상에서 스스로를 유폐하고 격리해 버린 걸까.

코왈스키가 입버릇처럼 하는 말은 “내 OO에 손대지 마!”다. 동네 불량배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하는 베트남 이민가족의 남매를 차례로 구해 주고 나서도 그는 감사 인사를 하는 이웃들에게 “내 정원에 들어오지 말라!”고, “내 개에 손대지 말라!”고 퉁명스럽게 경고한다. <인턴>의 벤에게 삶은 마르지 않는 청춘의 샘이었다. 하지만 코왈스키에게 삶은 그 자체로 참혹한 죽음의 벙커다. 그가 사람들을 향해 장총을 겨누고서 내 영역을 훼손하지 말라고 말할 때, 우리는 50여 년 전 한국전쟁에서의 살육에서 비롯된 죄의식이 평생 그를 짓누르고 있음을 눈치챌 수 있다. 벤이 타자를 경유해 자신의 욕망을 확인했다면, 코왈스키는 타자를 적으로 상정함으로써 죄의식을 한사코 방호한다.

스스로를 과거에 가둬 버린 코왈스키를 누가 구해 내는가? 다름 아닌 베트남 이민가족의 남매 슈와 타오다. 슈는 여전히 경계를 풀지 않는 코왈스키에게 끊임없이 다가가 “당신은 좋은 사람”이라고 암시한다. 코왈스키가 애지중지하는 그랜 토리노를 훔치려다 혼쭐이 났던 타오 또한 언젠부턴가 그를 아버지처럼 따른다. 그러는 동안 전쟁터에서 어린아이들을 쏘아 죽였고 홀로 살아 돌아와 훈장을 받았던 코왈스키의 묵은 죄의식도 조금씩 정화된다. 코왈스키는 자신이 전쟁터에서 죽였던 아이들이 슈와 타오로 환생했다고 믿었을 것이다. 슈와 타오를 대신해 죽음의 문 앞으로 걸어 들어가는 코왈스키의 선택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주어진 대속의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결연한 삶의 의지이기도 하다.

“내가 스트럴드블럭과 같은 생활을 하게 된다면, 아무리 무서운 사형법이 있더라도 나는 그것을 달게 받아들이겠다고 생각했다.” 스트럴드블럭의 비밀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은 걸리버 선장은 자신의 즐거운 공상을 이내 거둬들인다. 스트럴드블럭의 비극은 타자와의 관계 맺음이 없는 생명은 죽음보다 가치 없음을 증명한다. 벤이 혼자서 삶을 만끽했다면 그는 마지막 숨을 내쉴 때 환히 미소 지을 수 있었을까. 코왈스키가 혼자서 삶을 저주했다면 그는 기꺼이 숭고한 죽음을 수행할 수 있었을까. 유쾌한 노인 벤과 고집스러운 노인 코왈스키는 타자와 주고받는, 타자에게 베풀고 갚는 ‘호수성’이야말로 삶의 핵심이고 죽음의 가치라고 넌지시 일러 준다. 욕망이 윤리가 되고, 윤리가 욕망이 되는 호수성의 시간.

 

 

↘ 이영진 님은 영화평론가로 오랫동안 영화잡지를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영화와 글쓰기가 삶의 전부인 친구들과 함께 새로운 소통의 장을 만들려고 궁리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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