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호 2015년 11월호 [특집] 특집-우리들의 아름다운 노년

[ 은퇴와 자녀 양육 이후 새로운 삶을 시작한 2인의 이야기 ]

좋아하고, 잘하고, 행복한 일을 한다

글 김경철, 김정은

대부분 은퇴를 하고 나면 ‘앞으로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까? 나에게 남은 건 무엇인가?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은 어디에 있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인생에 대한 허무에 휩싸이게 된다. 정신없이 돌보던 아이가 다 커서 집을 떠날 때도마찬가지다. 하지만 진짜 나를 만나고 진짜 내가 원하는 대로 사는 삶은 그때부터 시작된다. 깊고 넓은 지혜와 경륜을 갖추고.

 

 

내 생애 최고의 순간은 아직 오지 않았다

글 김경철

 

50대 중반이면 뭐든 한창 할 나이

크리스마스를 사흘 앞둔 2011년 12월 22일 나는 56살이었다. 회의하다가 갑자기 사장에게 불려가서는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라는 말 한마디로 32년 동안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게 되었다. 처음엔 부끄러움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그동안 그리도 열심히 일만 했는데 왜 내가 이런 기분을 느껴야 하는지도 몰랐다.

바로 책상을 정리하고 회사를 나왔다. 그리고 무작정 원주행 고속버스 뒷자리에 몸을 실었다. 그제야 참고 참았던 눈물이 확 쏟아졌다. 그래, 부끄러웠던 게 아니라 억울했던 거다. 회사를 위해 일생을 몸 바쳐 일했는데 하루아침에 들은 이야기가 고작 퇴직 통보라니…. 며칠 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강제로 퇴직당한 데 대한 창피함을 나 스스로 견딜 수 없었고, 30년 넘게 일한 회사에서 나를 내몰았다는 배신감에 울화가 치밀었다.

먼저 은퇴한 친구들이나 선배들은 이제 마음을 내려놓고 편하게 사는 게 최고라며 같이 등산이나 다니고 여행이라도 하자고 권유했다. 하지만 이렇게 허무하게 현역에서 퇴장하고 싶지는 않았다. 50대 중반이면 아직 뭐라도 한창 할 수 있을 나이 아닌가? 신변을 정리하고 앞으로 무엇을 할지 고민하는 데 꼬박 두 달이 걸렸다. ‘사장이 아닌 월급쟁이는 절대 회사에 영원히 다닐 수 없다’는 진리를 깨닫고 수용하는 시간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당연한 건데 회사에 다닐 때는 왜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는지, 자신이 직접 당해봐야 아는 게 사람인 것 같다.

‘앞으로는 절대로 다른 사람에 의해 강제로 퇴직당하는 직장은 다니지 말자. 내가 좋아하고, 잘할 수 있고, 오래오래 할 수 있고, 의미 있는 일을 찾자’고 결심했다. 그동안 인생 1막에서 25여 년 배워서 30년을 먹고살았다면 앞으로 100세 시대에 40년을 더 먹고살려면 최소한 3~5년은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단 새로운 인생을 살려면 새로운 세계를 알아야 하고, ‘더 이상 쓸모가 없어서 용도폐기 당했으니 역량을 강화해 용도변경을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무조건 배워야겠다 싶었다. 이것저것 하다보면 분명 내가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을 거라 생각했다.

 

 

다른 사람에게 정보를 주는 일을 좋아하는 성격을 살려 은퇴 설계 강사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맨 위 사진에서 왼쪽에서 두 번째가 필자). 노후 준비가 은퇴 이후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을 해소하고 새로운 삶을 설계할 수 있게 할 것이다.

 

 

은퇴는 내 진로를 나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

그런데 처음부터 어려움에 부딪혔다. 여러가지 교육을 들으려면 수강 신청을 인터넷으로 해야 하는데, 컴퓨터 실력이 형편없어서 딸들에게 부탁해야 했다. 그러나 자꾸 부탁하기도 어려워 스스로 극복하기로 결심했다. 먼저 동네 주민센터의 정보화교육장에서 두 달가량 기초교육을 받고, 두 딸에게 애정 어린 구박을 받아 가면서 컴퓨터를 배웠다. 그리고 전문 분야에 따라선 두세 번 반복해 공부했다. 그 결과 인터넷만 겨우 할 줄 알던 수준에서 지금은 프레젠테이션 자료 만들기는 물론 SNS, 블로그, 인터넷 카페까지 운영할 정도로 환골탈태했다.

처음에는 이런 교육을 받아야 하는 내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그런지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았다. 심지어 교육장에서 혹시나 아는 사람을 만날까 걱정되어 교육장 내부를 먼저 살펴보고 아는 사람이 없으면 살며시 뒷자리에 앉고 아는 사람이 있으면 그냥 돌아오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적응하게 되고 새로운 일에 대한 자신감이 생기면서 창피함은 점점 사라졌다.

2012년 3월부터 희망제작소의 행복설계아카데미를 시작으로 서울산업진흥원 희망설계아카데미, 서울특별시 장년창업센터와 각종 창업스쿨, 귀농귀촌, 웰다잉 교육, 경영컨설팅 등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닥치는 대로 공부만 하러 다녔다. 회사 다닐 때보다 더 바쁜 내 모습을 보고 가족들은 “지금 고시에 응시해도 합격하겠다”는 농담도 했다. 그래도 은퇴 후 내 진로를 나 스스로 결정한다고 생각하니 힘든 줄 몰랐다.

그러나 내가 좋아하고, 잘할 수 있고, 오래오래 할 수 있고, 의미 있는 일을 찾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은퇴 전 경영 관리와 부동산 관련 업무를 30년 이상 했기 때문에 처음엔 창업·경영 컨설팅 쪽의 일에 먼저 눈이 갔지만 재미가 별로 없었다. 그러다 은퇴 설계 관련 강의를 들을 때마다 뭔가 새로운 희망에 가득 차는 나를 발견했고, 내가 받은 희망을 다른 사람들과도 나누고 싶었다. 나는 천성적으로 에너지가 넘칠 뿐 아니라 감추지도 못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정보를 주고 가르치는 것을 즐거워한다. 그래서 나와 같은 사람들에게도움을 줄 수 있는 은퇴 설계 강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이를 위해 2012년 한 해 동안 역량 강화를 위한 다양한 교육을 1천64시간 수강했다. 그뿐만 아니라 관련 책을 많이 읽고 재능기부를 통한 현장 실습도 하면서 준비에 만전을 기했다. 그리고 지난해 3월, 드디어 2년간의 준비기간을 마무리하고 고려대학교 평생교육원에 국내 최초로 ‘액티브시니어 전문가’ 과정을 개설했다.

내가 진행하는 강의는 은퇴 이후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을 해소하고 100세 시대 인생 2막을 역동적으로 설계할 수 있는 전문가를 양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내가 직접 경험한 내용을 바탕으로 은퇴자의 눈높이에 맞춰 기획했다. 은퇴자 대부분은 퇴직하고 나면 ‘이제 내 인생 최고의 순간은 끝났구나’ 하면서 절망감에 사로잡힌다. 누구보다도 이 사실을 온몸으로 절감한 나는 두려운 은퇴가 아닌 설레는 은퇴를 설계할 수 있게 건강, 재무, 인간관계, 시간관리 등에 대한 강의를 하고 있다. 또 사회적경제를 이해하기 위해서 실제로 운영되고 있는 사회적기업, 마을기업, 협동조합 등도 방문할 예정이다.

베이비붐 세대의 은퇴가 본격화되는 요즘, 처량하게 방황하는 은퇴자들을 여기저기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나 또한 갑작스럽게 해고 통보를 받고 절망에 사로잡혔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시간을 극복하고 새로운 자리를 찾았다. 내 경험이 다른 사람들에게 은퇴는 인생의 종료가 아닌 새로운 출발이라고 인식하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 내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은, 가장 뜨거운 순간은, 가장 행복한 순간은 아직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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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경철 님은 액티브시니어연구원의 대표이자 고려대학교 액티브시니어 전문가 과정의 주임교수로 일하고 있습니다. 시니어가 고령사회의 짐이 아닌 자산이 될 수 있도록 돕는 ‘100세 시대 응원단장’으로 살려고 합니다.

 

 

 

나는 나만으로도 행복한 사람

글 김정은

 

엄마로만 살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나는 올해로 54살 된 가정주부다. 대학에서 신문방송학을 전공하고 출판사에 잠시 다니다가 결혼과 동시에 회사를 그만두고 집안일에 전념했다. 남매를 두었는데 얼마 전에 두 아이 모두 성인이 되었다. 전업주부 역할은 자식이 스무 살 되는 시점까지만 하기로 미리 생각했던 터라 요즘은 나 자신의 새로운 삶을 모색하며 홀로 서기 위해 노력 중이다.

우리 엄마는 학교 선생님이었다. 다섯 남매를 키워야 하는 종갓집 맏며느리이기도해서 언제나 해내야 할 과업 완수로 바빴다. 엄마의 빈자리가 그리웠고 사랑이 많이 고팠다. 결혼하면 전업주부로 살아야겠다고 결심했던 계기다. 엄마만 있으면 저절로 집안이 포근하고 따뜻해질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살아 보니 그게 아니었다. 집안일이라는 건 자기 혼자서 일의 수준과 범위를 결정하지 못하는 지극히 주관적인 분야였다.

가정이란 서로에 대한 사랑과 이해가 넘치는 평화롭고 안락한 세계라고 막연하게 꿈꿨던 환상이 결혼과 동시에 깨지기 시작했다. 집은 수십 년간 익숙해 온 두 문화가 충돌하는 격전지였으며 사공이 많은 조각배였다. 게다가 끊임없이 변화하는 바깥세계와 맞물려야 하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았다. 시대적 변화가 급해질수록 가족 구성원 간의 차이는 선명했고 갈등은 커졌다. 세상은 바뀌는데 가정에 대한 고정관념은 변하지 않으니 불협화음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태에서 아무리 애를 써도 혼자 상상해 왔던 ‘모범 가정’이 현실로 나타날 리가 만무했다. 가족이 함께 지내는 동안 각자 참아야 하는 것이 많아질수록 사랑은 굴레가 되었고 집은 속박이 되었다.

그런 와중에서 집안 명맥을 유지하고 생명을 잉태하여 무탈하게 키워내야 했던 나는 늘 가족끼리의 원만한 조율이 걱정이었고,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아 수시로 불행했다. 예전에는 가정의 중심에 ‘집밥’이 있었다. 아무리 각자의 세상을 휘돌더라도 저녁이면 돌아와 밥상머리에 둘러앉는 공동체의식이 있었다. 엄마들이 끊임없이 밥에 집착했던 이유도 그 때문이리라. 하지만 어느 날부터인지 밥으로 가족의 구심점을 만들려는 엄마의 역할이 조금씩 애매해졌다. 세상은 가족끼리 둘러앉아 함께 밥을 먹을 수 있는 시간적, 감정적 여유조차 남겨주질 않았으니까.

‘홈 CEO가 되어 사랑과 이해라는 자본을 가지고 가족 경영을 해 보겠다’고 야심차게 별렀던 나는 하릴없이 돈을 버는 대신 집에서 밥하고 청소하고 빨래하는 무급 일꾼으로 전락한 기분이었다. 자존감에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평생 손이 닳도록 집안일을 하고도 여전히 자식들에게 잔소리꾼으로 각인되는 시어머니를 지켜보니 앞으로 이게 남의 일이 아닐 것 같아서 정신이 번쩍 났다. 바람직한 엄마의 역할에 대해서 조금씩 고민하기 시작했다.

 

 

시니어 프로그램을 수료한 사람들이 모여 만든 지혜로운 학교의 특강 모습. 세상을 넓게 바라보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맨 위). 독서신문, 어린이신문, 영어요리책, 힐링글쓰기, 공동저술 등 다양한 글쓰기를 해 왔고 이러한 경험을 살려 책을 출판할 계획이다(아래 왼쪽). 여행작가 과정을 공부한 친구들과 함께한 공동저술 출판 기념 사인회 모습. 글쓰기가 나의 ‘생존력’이 될 것이다(아래 오른쪽).

 

 

독립적인 영역 가꾸면서 남은 에너지는 사회로 돌리고

그러던 어느 날 학부형 모임에 갔는데 갑자기 기가 딱 막혔다. 거기 모여 있는 수많은 엄마들의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얼굴이 하나같이 똑같았다. 마치 자화상을 보는 것처럼 슬퍼졌다. 우리 엄마는 그렇게 바쁘게 살면서도 자기 철학이 있고 줏대가 있었는데, 그것보다 더 낫게 살아 보려던 나는 그동안 나 자신을 완벽하게 잃어버리고 말았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런 반성 이후 조금씩 나만의 세계를 찾으면서 중심을 잡았다. 아이들에게 엄마도 한 인간으로서 자존감을 지키고 사는 사람이라는 것을 각인시켜야 교육도 제대로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은 부모 모습을 저절로 닮아가는 게 자식이니까.

한편으로 생존력을 보강하는 데도 힘썼다. 혼자 지내는 시간을 감당하기 어려운 주변 어르신들을 보면서 그런 생각은 점점 확고해졌다. 자식을 다 키운 후에도 그들의 사는 방법과 진로에 대해 이래라저래라 간섭하는 일로 노후 생활을 이어가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젊은 사람들이 스스로 미래를 선택하고 결과를 감당하며 깨달을 기회조차 빼앗는 꼴이었다. 부모가 되어 보니 그런 어르신들의 심정도 이해가 간다. 하지만 부모의 과도한 책임감과 사랑이 자식에게 족쇄처럼 되거나 자식 결혼생활에 분란을 일으키는 상황을 접할 때마다 많이안타까웠다. 아이들이 성인이 된 다음에는 그들로부터 감정적으로 독립할 수 있도록 미리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정 살림만 해온 내가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직장에 다니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숙달한 전문분야가 있을 것 같아서 부러웠다. 곁에서 딸아이가 힌트를 주었다. “엄마에게는 글과 말이 남아 있다”고. 그랬다. 집밥보다는 교육이 화두가 된 사회에서 아이들과 함께하려니 저절로 공부하는 흉내를 내면서 살았다. 할 줄 아는 영역이라도 배워서 가르치려고 글쓰기, 영어지도, 상담공부, 독서지도 과정을 배우기도 했다. 교육비를 절약하기 위해 다른 엄마들과 품앗이 과외도 했었고 기자단이나 독서팀을 이끄는 봉사도 해 왔는데 그런 경력들이 모두 글과 말에 연관된다는 것이다. 듣고 나니 조금쯤 용기가 생겼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쓸 수 있는 시간도 많아졌다. 그러던 차에 아는 분이 희망제작소에서 열리는 ‘행복설계아카데미’라는 프로그램을 추천했다. 거기서 다양한 사람들과 은퇴 이후의 삶을 함께 고민해 보는 것만으로도 많은 위안이 됐다. 프로그램 수료생들이 모여 만든 ‘지혜로운학교’라는 곳에도 합류했다. 사회와 유리되어 있던 나 자신도 절실하게 바라고 있었던 평생교육의 모델이었다. 이곳에서 나는 홈페이지를 맡아 운영위원으로 활동하고 새로운 사람과 함께 배움의 기회를 얻기도 한다. 평생 한 직장만 다니다가 사회로 나온 시니어들도 있고, 직장을 다니면서도 자기 계발을 위해 참여하는 젊은이도 있고, 배우는 데 재미를 느끼거나 가르치는 데 보람을 갖는 사람도 있다. 자격증을 따고 스펙을 쌓기 위한 공부가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각자의 경험과 재능을 나누는 곳이기에 세상을 넓게 바라보는 데도 많은 도움을 준다.

나 자신을 위해 꾸준히 써왔던 블로그 글쓰기를 발전시켜 다양한 종류의 집필 활동도 하고 있다. 젊은이들과 함께 여행작가로 공동저술을 하다가 인생 자체가 하나의 여행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동안의 전업주부의 삶과 심정을 담은 《엄마사직서》(가칭)라는 책을 출판하려고 준비 중이다. 이렇게 살아가며 듣고 보고 깨닫는 이야기를 모아 ‘오지랖통신’이라는 뉴스레터도 발행하고 있다.

이런 모든 과정들이 여태껏 가족들 뒤에서 그들을 살피고 연결하는 데에만 신경을 쓰고 있었던 나 자신을 서서히 회복하게 했다. 가족 안에만 있을 때는 내 마음만 몰라주는 것 같아 섭섭했던 일도 많았다. 하지만 다양한 입장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세상을 경험하다 보니 가족과의 소통도 어느새 편안해졌다. 결국 바람직한 노후란 ‘관계에만 기대지 않고 자기 혼자 지켜갈 수 있는 영역을 가꾸면서 행복을 깨닫는 과정’이라는 게 이제껏 관찰과 경험을 통해 얻은 내 소견이다. 자식을 도와주거나 남편과 함께 지내는 일마저도 결국 자신이 좋아서 선택하는 일이라는 점만 제대로 인식하고 있어도 관계의 섭섭함에서 오는 외로움은 훨씬 줄어들게 될 것 같다. 도망갈 곳이 없어서 의무감으로 하고 있다고 느끼면 점점 우울하고 힘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자식이 성인이 되는 시점까지만 엄마의 도리와 책임을 다하기로 작정한 나의 노후 생활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아직도 습관처럼 남은 ‘엄마 오지랖’이 있다면 그런 에너지는 다 함께 어울리는 사회를 만들어 가는데 선용하려고 한다. 자식이 성장하여 모두 떠난 빈 둥지에서 허전함을 느끼는 내 또래의 엄마들에게도 이런 삶을 함께하자고 권하고 싶다. 앞으로 창창하게 남은 노후를 이대로 접기에는 세월이 너무 길게 남지 않았는가. 또 지금 한창 전업주부로 벅찬 엄마들에게도 이야기하고 싶다. 엄마 노릇에도 정년이 있으니 그 이후의 삶을 위해서라도 절대 자기다움을 잃어버리지 말라고. 행복한 노후를 보낼 줄 아는 부모는자식의 짐도 한결 가볍게 한다.

 

 

↘ 김정은 님은 전업주부로 살다가 지금은 인생 후반기를 새롭게 시작하였습니다. 글을 쓰며 지혜로운학교에서 일하고 강의도 합니다. 아이들의 성년 이후에는 누구나 인생 후반기를 독립적으로 살기 위한 준비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오지랖통신 kimjungeu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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