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호 2015년 6월호 살림,살림

[ 문학으로 세상 읽기-성년을 맞이한 이들에게 ]

아, 어떻게 우리가 이 작은 장미를 기록할 수 있을 것인가

글 이정현

어느 날 강의실에서 장미꽃을 손에 쥔 학생들이 눈에 들어왔다. 단체로 고백하러 가냐는 질문에 학생들이 웃으며 대답했다. “성년의 날이잖아요.” 아, 매년 5월 셋째 주 월요일이 성년의 날이었구나. 앳된 미소들이 아름다웠다. 그들의 빛나는 젊음은 마땅히 축복받아야 한다. 그런 마음과는 반대로 장미꽃이 가득한 강의실에서 나는 그들에게 말했다. “이 나라에서 성인이 된다는 사실이 정말 기쁜가요?”

 

소년이 온다

한강 지음 | 창비 펴냄 | 2014년

 

벌레 이야기
(이청준 전집 20)

이청준 지음 | 문학과지성사 펴냄 | 2013년

 

생강

천운영 지음 | 창비 펴냄 | 2011년

 

1980년이나 2015년이나

지난해 봄, 우리는 가라앉은 배와 어린 학생들의 끔찍한 죽음에 관한 소식을 들어야 했다. 연일 계속되는 보도에 분노와 슬픔이 엄습하여 도저히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 날들이 이어졌다. 교복을 입은 학생들을 거리에서 보면 괜히 울적했고, 그들이 측은했다. 그 와중에 당시 출간된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2014)를 읽었다. 현실의 사건과 맞물려서 더욱 고통스러웠다. 이것은 죽은 자의 목소리로 기록된 소설이다.

 

소설의 배경은 1980년 5월의 광주이고, 화자는 중학교 3학년 학생이다. 누군가는 소설의 설정을 보고, 광주의 비극을 경험한 소년의 이야기나 비극적인 성장담일 것이라고 쉽게 예측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화자는 ‘이미’ 죽은 상태다. 다시 말해 이 소설의 화자는 ‘혼령’이다. 정대는 친구 동호와 함께 시위대의 행진 도중 계엄군이 쏜 총에 맞아 쓰러져 죽고, 중학교를 마치기 전에 공장에 들어와 자신의 꿈을 미루고 동생을 뒷바라지하던 정대의 누나 정미 역시 그 봄에 행방불명된다. 20대에 접어들기도 전에 평범한 남매의 삶이 순식간에 붕괴된 것이다. 죽음은 단지 생이 멈춘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남은 삶의 무한한 가능성까지 소멸된 것이기에 소년의 죽음은 더욱 허무하다. 죽은 소년 정대와 친구의 시신을 안고 절규하는 동호의 목소리가 교차되면서 소설은 당시의 풍경을 천천히 펼쳐 놓는다. 응징과 규명을 요구하는 살아남은 어른의 목소리가 아니라 죽음에 이른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소년의 목소리로 기록된 풍경이기에 소설은 더욱 비극적이다.

 

“키가 자라고 싶었지. 팔굽혀펴기를 마흔 번 연달아 하고 싶었지. 언젠가 여자를 안아 보고 싶었지. 나에게 처음으로 허락될 여자, 얼굴을 모르는 그 여자의 심장 언저리에 떨리는 손을 얹고 싶었지.” (57쪽)

 

가라앉는 배에서 죽어간 소년과 소녀들이 겹쳐졌다. 그들 역시 왜 죽어야 하는지도 모르고 어른들의 말을 믿었다가 삶의 수많은 가능성과 함께 소멸되었다. 그들이 탔던 배의 이름이 ‘세월’이라는 사실은 잔혹할 정도로 암시적이다. 1980년에서 35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도 억울한 죽음에 대한 싸늘한 인식은 바뀌지 않았다. 올해 5월에도 어김없이 1980년의 광주 시민들을 ‘폭도’로 취급하는 자들의 잔인한 언어가 인터넷에 넘쳐나고, 침몰된 지 불과 1년이 지난 세월호에 대해서는 ‘지겹다’고 말하는 자들이 늘어나고 있으니까. 더구나 얄궂게도 10대에서 20대에 접어드는 청춘들을 기념하는 올해의 성년의 날은 5월 18일이다. 35년 전 5월에 국민을 사살하라고 명령한 과거의 독재자는 올해 성년의 날 즈음 회고록을 출간할 예정이라고 당당하게 밝혔다. 피해자들만 눈총을 받으면서 침묵을 강요당하는 현실은 1980년이나 2015년이나 마찬가지다.

 

고통스러운 질문이 담긴 소설들

1991년, 나는 《소년이 온다》의 정대보다 두 살 어린 중학생이었다. 그해 5월, 서울의 침울한 공기를 기억한다. 신문에는 연일 대학생들의 분신 소식이 잇따랐고 사회는 술렁거렸다. 그러나 김지하의 칼럼과 ‘강기훈 유서대필사건’을 계기로 학생들의 저항은 쉽게 진압되었다. 아무리 질문을 던져도 선생님들은 침묵으로 일관했고, “폭력적이고, 성급한 대학생들이 문제”라는 익숙한 말만 들어야 했다. 1991년 5월의 풍경을 이해하려고 과거의 기록들을 파헤치던 중학생은 ‘박종철’과 ‘이한열’이라는 이름과 ‘대공분실’, ‘고문’이라는 단어를 접하게 되었다. 가해자가 오히려 피해자를 기만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그린 이청준의 단편소설 <벌레 이야기>(1985)를 읽은 것도 그 무렵이었다.

 

2012년 1월, 김근태의 영결식 뉴스를 보면 서 1991년 5월을 계기로 알게 된 1980년대의 기록들을 떠올렸다. 광주를 희생양으로 삼아서 집권한 전두환 정권의 절정기였던 1985년, 당시 학생운동 지도자였던 김근태는 서울대 민주화추진위 배후 조종 혐의로 연행된 뒤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23일 동안 ‘고문기술자’ 이근안에게 가혹한 고문을 당했다. 이후 김근태는 심각한 고문후유증에 시달렸다. 여기까지는 우리가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근안이 현재 목사로 활동하고 있으며 자신의 행위를 반성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쉽게 잊혀졌다. 이청준이 <벌레 이야기>를 쓰면서 그토록 치를 떨었던 아이러니.

 

천운영의 소설 《생강》(2011)은 <벌레 이야기>와 병렬적으로 읽힌다. 천운영 역시 이근안을 보면서 1980년대의 이청준과 비슷한 생각을 했으리라. 《생강》에는 과거 고문기술자였던 전직 경찰과 갓 대학생이 된 딸이 등장한다. 자신의 범죄를 ‘애국’으로 합리화하는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를 부정하는 딸은 시종일관 격렬하게 충돌한다.


“내가 때린 건 사람이 아니었다. 사람이었어요. 틀린 사람들이었다. 다른 사람이었지요. 맞을 만해서 맞은 거다. 맞을 만해서 맞았다고 믿게 만드는 게 더 나빠요. 정의를 위해서였다. 당신을 위해서였어요. 아버지를 위해서였다. 아버지는 당신을 버렸어요. 가족을 지키려고 그랬다. 그래서 다른 가족들이 사라졌죠. 이제 곧 끝난다. 끝은 없어요. 나한테 왜 이러는 거냐. 그들한테 왜 그랬어요. 할 일을 했을 뿐이다.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한 것이죠.”(259~260쪽)

 

소설은 갈등을 눈물로 손쉽게 봉합하는 멜로의 문법을 거부한다. 아버지와 딸은 끝내 서로를 품지 않는다. 과거에 대한 두 사람의 견해차는 좁혀지지 않는다. 가해자의 합리화와는 달리 피해자의 상처는 지속적이라는 사실만을 선명하게 드러낼 따름이다. 맵고 쓴 뒷맛을 지닌 생강처럼 이 소설은 상처의 지속성과 그것을 바라보는 윤리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올해도 성년이 된 젊은이들은 장미를 들고 밝게 웃는다. 그들의 얼굴에서 폭력적이고 기만적인 세계에 진입한 당혹스러움은 찾아볼 수 없다. 그들에게 고통스러운 질문이 담긴 소설들을 권한다. 장미는 아름답지만 가시를 숨기고 있다. 숨겨진 가시가 더 날카롭기를, 타인의 상처를 외면하는 무감각한 영혼을 찔리는 청춘들이 더 많아지기를.

 

*제목은 브레이트의 시 <아, 어떻게 우리가 이 작은 장미를 기록할 수 있을 것인가>에서 차용했다.

 

↘ 이정현 님은 문학평론가이며 대학에서 문학과 독서를 가르칩니다. 1990년대 말엽에 스무 살이 되었으며 IMF의 여파 속에서 세상에 눈을 떴습니다. 1990년대의 상처를 문학을 통해서 규명하는 책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한국문학과 외국문학을 비교·교차하는 연구에 주력하며, 현재 웹진 <문화 다> 상임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http://www.salimstory.net/renewal/sub/view.php?post_id=12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