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호 2015년 6월호 살림,살림

[ 땅땅거리며 살다-경남 산청 황매골에서 벼·취나물 농사짓는 신문순 씨 ]

“저 손은 무신 손이고”

글 이선미 편집부 \ 사진 류관희

남들 어려워하는 서리태 농사도, 외지인 입맛까지 사로잡는 나물 무침도 척척하는 그를 보고 동네 사람들은 “저 손은 무신 손이고? 뭐든 국덕국덕 하면 잘 되는가 보네.”라고 한단다. 만지는 모든 것이 황금으로 변했다는 미다스의 손안 부럽게, 신문순 씨 손은 ‘생명의 손’이다.

 

 

신문수 씨가 "연구를 해 가지고" 시작한 취나물이 요즘 제일 잘 되는 품목이다. "잡풀이 얼마나 괴롭히는지 못 살겄다"고 말은 하는데, 어째 낯빛은 이렇게도 환한지. 하우스 농사지으면 놀 시간 없이 "오늘 할 일은 오늘 해삐야 돼서", 그이의 손은 쉴 때가 없다.

 

 

“나는 엄청시리 노력한 사람”

서울에서 경남 산청 가는 길, 대전을 지나서부터 비가 오더니 빗방울이 제법 굵어졌다. ‘이거 사진 찍기 힘든 거 아닐까?’ 싶었는데, 정작 걱정할 것은 사진이 아니라 모내기였다. “요즘이 모내기 철이니께 위급허지. 트랙터가 고장나서 사흘 정도 처졌거든. 물이 안 올라간 논도 있어서 6월 초까지는 해야 돼.”

또 틈틈이 고춧대도 묶어 줘야 하고 취나물밭에 잡풀도 매야 한다. 게다가 3년 전 마을 입구에 ‘철쭉꽃식당’이라는 조그만 식당을 열어 때때로 손님도 맞아야 하니, 신문순 씨는 저녁이면 밥 한술 뜨고 자기 바쁘고 아침이면 일어나자마자 나간다. “모내기 끝나면 조금 여유가 있을 것”이라는데, 그때엔 또 그때 해야 할 일이 많을 것만 같다.

신문순 씨는 40여 년 전, 스물 한 살에 김영태 씨와 결혼해 이곳 황매골로 왔다. 황매산 북쪽에 자리 잡아 해마다 5월에 열리는 철쭉제가 유명한 마을이다. 골짜기마다 계단식 논이 많이 남아 있어 멀리서 보면 작은 호수가 켜켜이 쌓여 있는 듯하다.

“이 동네에 친척이 있었는데, 우리 엄마한테 좋은 총각이 있으니 사우 삼으라고 이야기를 했는 기라. 총각이 나뭇등걸을 패쌌는 걸 보고 괘안타 싶어 갖고 엄마가 내한테는 묻도 안 하고 밤에 총각을 델꼬 왔어. 그래 호롱불 켜 놓고 서로 선을 봔 기라.” 그렇게 한 번 본 총각과 결혼하고 보니, 경주김씨 양반 집안인 시집은 어른도 많고 일도 많았다. “갓 시집와 갖고 많이 울었어. 시집온 지 사흘 만에 시어머니가 부엌을 다 맡기고 안 돌봐 주더라고. 집에 시할아버지 삼년상 빈소도 있어서 아침마다 제 올리고. 내가 엄청 힘들었어.”

결혼 당시 ‘국민학교’에 다니던 시동생들 뒷바라지도 그이 몫이었다. “대학 시키 주고, 장개 보내 주고, 방 얻어 주고. 다 내 손을 거쳐 갔지.” 그때 하우스 농사를 지었다면 사정이 좀 나았겠지만, 할 줄도 모르고 엄두도 못 낼 때라 “벼만 숭구고” 누에를 키워 살았다. “경운기만 갖고 농사지었지. 누에 키워 봐야 돈이 제대로 나오나? 송아지 나오면 그거 팔아 학비 대 주고 했지.”

이야기를 들으면서 여성생산자에게는 농사일만큼 결혼생활도 힘들고 어려웠겠다 싶었다. 낯선 환경과 가족관계에 새롭게 적응하고 살림을 꾸려 나가는 것 역시 만만치 않은 육체적·정신적 노동이다. 여성생산자가 주로 맡는 밭 일 역시 농사일 외에 포장이나 판매 등으로 잔손이 많이 간다. 큰 힘 들지 않는다고 간과할 수 있지만 사실은 이중, 삼중의 부담을 지는 셈이다.

신문순 씨는 아이들이 크면서 “도저히 이래 갖고는 우리 애들은 대학을 못 시키 주겠다” 싶었단다. 그래서 농한기마다 친정이 있는 부산에 가서 부업을 시작했다. “가을걷이해 놓고 나면 한 넉 달 쉬거든. 나는 식당 다니고 남편은 노가다 보내고. 식당 일 갔다 오면 우리 애들이 연탄불이 다 꺼진 냉골에 있는 기라. 그 심정은 아무도 모르지.” 농사만으로는 생계를 꾸릴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일이었다. 한동안 겨울이면 부산에서 돈을 벌고, 봄이 되면 다시 돌아와 농사짓는 생활을 반복했다. 신문순 씨가 자기 자신을 “엄청시리 노력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이유다.

그렇게 키운 삼 남매 역시 부모 생각이 극진하다. “저그 아빠 힘들다고 돌아감시롱 와 가지고 도와줘. 큰아들은 와서 모 다 떼 놓고 가고, 딸은 장사 거들어 주고. 오늘은 작은아들 올 차례야.” 유기농으로 가꾸어 놓은 땅이 아까워 누구 하나 농사짓는다면 물려주고도 싶은데, 아직까지 농사를 이을 마음은 없는 것 같다고. 나이가 더 들면 들어올는지도 모르겠다.

 

 

 

 

 

 

 

 

 

 

 

 

 

 

 

 

 

 

 

 

 

 

 

 

 

 

 

 

왼쪽 상단부터 시계방향으로- * 신문순 씨네 밀밭. 약한 바람에 슬쩍 흔들리는 이삭이 곱다. 밀 농사까지 지으니 밀가루 하나 사 먹을 일이 없다고. / * 황매골 계단식 논은 이렇게 생겼다. 굽이굽이 좁은 땅뙈기마다 논을 만들어 놓은 농부들의 노력이 엿보인다. / * 가을에 씨 뿌린 취나물은 이듬해 봄부터 바로 뜯을 수 있다. 생으로도 먹고 말려서도 먹는다. / * 신문순 씨가 하는 식당에서 취나물 비빔밥과 부침개를 맛볼 수 있다. 비빔밥에 들어가는 나물들은 물론 고추장도 다 직접 만든 것이다. “여기서는 국수, 라면 안 해 주거든. ‘비빔밥 드세요’ 하고 밥을 자꾸 선전하는 기라.”

 

 

진짜배기만 한다

신문순 씨 부부가 부산과 산청을 오가며 살던 어느 날, 마을에서 남편을 이장으로 덜컥 뽑아 놓고 오라 하더란다. 그렇게 마을로 돌아간 남편이 축사를 짓는다고 계약해 놓고 있더라는 말을 들으니, 아마도 김영태 씨는 다시 오롯이 농사만 하고 싶었던 것 같다.

부부는 벼농사만은 처음부터 변함없이 계속해 왔다. 현재 짓는 논 40마지기(1마지기는 약 200평, 총 2만 6천4백여 ㎡) 중 남의 논이 반으로, 수확은 전량 한살림에 낸다. “한살림은 쌀값이 정해져 있으니까, 앞으로는 이거 안 하면 안 되겠다 싶어 마을 사람들이 다 같이 해.” 온 마을 사람이 공동체 생산자다 보니 농약 치는 건 생각도 못 한다. “약 쳤다 하면 마을에서 나가야 된다”는 게 그이의 말이다. 우렁이농법에 웬만한 일은 기계로 다 하니까, 신문순 씨는 모가 제대로 심기지 않은 곳에 손으로 모를 심는 모 때우기만 하고 주로 밭일을 한다. “우렁이를 논에 막 쌔려 갖다 놓고 풀을 매니까, 벼농사가 심어만 놓으면 다른 농사보다 좀 편해.”

그러던 중 농촌지도소에 있던 남편 친구가 딸기 농사를 권했다. 남편은 고민하는 눈치였지만, 신문순 씨는 거침없었다. “지하수가 올라와야 딸기를 할 수 있거든. 그래서 일단 물을 파 보자고, 물이 많이 올라오면 하는 기고 아니면 마는 기라 했지.” 물이 엄청 올라오는 것을 보고 딸기 농사를 시작했다. 동네 사람들은 이렇게 추운 산골에서 무슨 딸기가 되냐고 비웃었지만, 꽃이 보얗게 피고 열매가 발갛게 달리자 다들 구경 와서 대단하다고 했다. 그 후로 한 5년 동안 잘 짓다가 접었다. “교통이 문제더라고. 길이 안 좋아서 눈이 많이 오면 차가 넘어가지를 못하는 기라. 한번은 차 사고도 날 뻔하고.” 다음에는 수박을 지었다. “수박은 수꽃·암꽃이 따로 피니까 손으로 일일이 수정해 줘야 돼. 그렇게 일이 많은데 판로도 안 좋은 기라. 아주 특품이 나와야 되는데 그게 안 되니까 가격도 안 좋고.”

그 후로 과일 농사는 접고 취나물을 시작했다. 산에 올라가서 취나물 씨를 훑어 와서는 딸기 짓던 비닐하우스 한 동에 시험 삼아 뿌렸다. “우리 마을에서 내가 제일 먼저 시작해서 다들 따라 한 기라. 수박은 터지고 딸기는 물쿠는데, 취나물은 잘 썩지 않고 하기 쉬우니까 우리한테 맞더라고.” 그래서 조금씩 넓힌 게 이제 비닐하우스 여섯 동으로 벼 다음으로 많이 한다. 일 년마다 고추와 돌려짓기하는데, 직접 기르는 소에서 받은 퇴비 뿌려 놓고 물만 맞춰주면 별다른 병 없이 잘 큰다.

서리태도 많이 지어 지난해에는 사백 대나 했다. “숭구는 시기를 잘 맞촤야 돼.너무 크면은 맥을 쳐줄 줄 알아야 되고. 딱 시기를 봐 갖고 줄기를 따 주는 기라.” 여기에 밀도 한 마지기 정도 짓고, 소도 열 마리 유기사료를 먹여 키운다. 밭 한편에는 더덕과 우엉 등이 심겨 있다. “진짜배기만 하는” 신문순 씨가 지은 것을 한번 먹어 본 사람들은 계속 찾기 때문에 쌀을 제외한 생산물은 직거래로 다 나간다. 그이가 직접 담근 고추장·된장도 황매산에 놀러온 사람들이 찍어 먹어 보고 많이들 “찾아 쌌는다.”

 

 

고춧대를 묶다가 사진 한 장 찍은 신문순·김영태 부부. 신문순 씨가 처음 층층시하 시집에 왔을 당시, 김영태 씨는 아내한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속은 있지만 표현은 못하는” 사람이었단다. 하지만 지금은 차 태워 바람도 쐬어 주고 터미널에도 데리러 나오는 다정한 남편! “내가 일을 저질러 놓으면 우리 아저씨가 처리해 주는 기라.”

 

 

사람들이 밥 안 먹는 게 가장 걱정

한살림생산자연합회 여성위원회에서 활동하는 신문순 씨는 전국의 다른 생산자들을 알 수 있고 소통할 수 있어 재밌단다. “가만히 앉아서 그짝의 일을 어떻게 알겠냐”는 것이다. 그렇지만 앞장서 하는 건 힘들다. 이런저런 회의나 행사 등 할 일은 많은데 시간이 없다. 얼마 전에도 지역 행사 준비하는 데 혼자 가서 “돼지뼈다구국 한 솥 끓이고 밥 앉혀 싹 채려 놓고” 다시 일하러 집으로 돌아왔단다. 제일 급할 때 서로 일을 나눠서 해 주면 좋은데 아쉬운 마음이다. “지 껄 애끼면 일을 못 보게 돼 있거든. 자기가 발 벗고 나서야지, 안 그러면 일이 안 돼.”

하지만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닌” 성격이라는 그이는 스트레스를 받거나 화가 나면 남한테 이야기하기보다 노래방에 간다고 했다. “고마 마이크 들고 노래 쌔려 부르면 숙 내려가 삐린다고”, 화를 흥으로 바꾸며 살아왔다.

그런 그도 어쩌지 못하는 근심거리는 사람들이 밥을 안 먹는 것이다. 빵과 라면 등을 선호하면서 쌀 소비가 줄어드는 게 신문순 씨를 비롯한 쌀 생산자들의 가장 큰 걱정이다. 얼마 전 서울의 한살림 매장에서 하루 종일 주먹밥과 떡을 나눠 주며 홍보활동을 했는데, 사람들이 주먹밥은 안 먹더란다. ‘아, 앞으로 진짜 벼농사가 힘이 들겄다’ 싶었다. 우리 쌀로 국수나 과자를 만들어서라도 많이들 먹어 주면 좋겠는데, 그게 참 어려운가 보다. “사람들이 밀가리 든 걸 좋아하지 쌀은 안 좋아해. 그기 큰일이라.”

이렇게 국내에서 생산되는 쌀도 소비가 부진한데, 지난 해 쌀 관세화 개방을 발표한 정부는 올해부터 수입 의무가 사라진 밥쌀용 쌀을 계속해서 도입하겠다고 한다. 최근 ‘2015년분 5차 저율관세할당(TRQ) 쌀 구매 입찰공고’를 내고 밥쌀용 쌀 1만 t을 수입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수입밥쌀용 쌀의 수요를 고려한 결정이란다. 우리 농업의 현실을 모르는 거라면 참으로 큰 문제이고, 알면서도 외면하는 거라면 더 큰 문제다.

농업과 관련해서는 힘 빠지는 소식투성이지만, 그래도 신문순 씨는 날마다 힘 잃지 않으면 좋겠다. 늘 몸을 숙이고 일하는 통에 허리는 좋지 않지만, 아직까지 혈압약도 안 먹고 별 탈 없는 건강이 유지되면 좋겠다. 친구들 모임도, 갈 곳도 많은 활력이 지속되면 좋겠다. 허울 좋고 번지르르한 말보다는 행동으로 누군가는 해야만 하는 일에 앞장서는 마음 씀씀이를 부디 간직해 주면 정말 좋겠다. “어짜든지 우리 마음이 서로 같애 가지고 한살림 잘해 나가는 게 내 바람이요.”라는 그이의 말이 우리 마음과 같을 것이다.

 

 

 

김영태 씨가 이앙기로 모를 심으면 신문순 씨가 그 뒤로 다니며 모 때우기를 한다. 처음 농사지을 때부터 지금까지 떠나 본 적 없는 논에 부부의 역사가 배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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