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호 2015년 6월호 살림,살림

[ 안녕하세요 ]

누구나 핵을 피할 권리가 있다 《나는 반핵인권에 목숨을 걸었다》 펴낸 아오야기 준이치 씨

글 \ 사진 김세진 편집부

 

나는 반핵인권에 목숨을 걸었다
김형률 지음 | 아오야기 준이치 엮음 | 2015년

 

한국인 원폭 피해자 2세 인권운동을 했던 김형률 씨의 일기장 등 개인 기록과 주위 사람들의 증언, 기자회견문 등 공식 기록을 모은 유고집 《나는 반핵인권에 목숨을 걸었다》가 지난 5월에 출간되었다. 이 책은 지난해 4월 일본어로 먼저 출간된 것을 번역하고 자료를 추가한 것이다. 일본인으로 자비를 들여 이 책을 낸 아오야기 준이치 씨를 만났다.

 

 

“김형률 씨가 주장한 ‘반핵인권’은 누구나 핵을 거부할 권리가 있다는 말이에요. 인권이 사람으로서 살아갈 권리라면, 사람으로 살기 위해 핵은 꼭 피해야 해요. 핵무기나 핵발전소나 마찬가지에요. 그것들을 사용하는 것 자체가 인권을 유린하는 거예요. 잘못해 사고가 나면 누가, 어떻게 책임질 수도 없는 엄청난 일이 벌어져요.”

 

 

국민 상대로 실험하는 일본 정부

2011년 핵발전소 사고가 난 일본 후쿠시마에서 겨우 90km 떨어진 센다이에서 살고 있는 아오야기 준이치 씨는 핵발전소 사고 이후 많은 것이 달라졌다고 했다. 우선 아내 아오야기 유코 씨와 그는 즐겨 먹던 생선을 더 이상 먹지 않는다. 채소는 물론 방사성 물질을 흡착하는 성질을 지닌 버섯은 어떤 종류도 먹지 않는다. 물은 후쿠시마에서 비교적 멀리 떨어져 아직은 괜찮다고 여겨지는 서부 지방 규슈에서 사다 먹고, 방사성 물질을 분해하는 데 좋다고 알려진 낫토 등 발효식품 위주로 밥을 먹는다.

후쿠시마에서 살다가 사고 이후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는 후쿠시마 난민이 15만 명이나 되는데, 일본 정부에서는 ‘귀환 곤란 구역’과 ‘거주 제한 구역’들의 경계를 점차 풀면서 “이제 돌아가도 안전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그에 대한 근거가 부족해 정부 지원비를 줄이려는 의도가 아니냐는 의혹이 있다. 또 식품의 방사능 허용 기준치가 변하고 점차 느슨해지는데 기준치 이하라고 명확하게 내부피폭(식품 섭취로 인한 방사능 피폭)에서 안전하다고 말하기 어렵다. 또 어린아이들은 갑상선 등을 포함해 정규 건강검진을 받지만 검진 결과는 대학병원에 가야만 확인할 수 있고 동네 의원에서는 결과를 확인할 수 없도록 법으로 제한하고 있다. 아오야기 준이치 씨는 “정부가 국민들을 상대로 방사능이 안전한지 ‘사회적 실험’을 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고 했다.

아오야기 준이치 씨의 친척 중 한 명은 건축사인데 핵발전소 사고 이후 삿포로에서 일하다가 후쿠시마로 발령이 났고 그곳에서 일한 지 4년만에, 풍채 좋고 건강하던 사람이 급성백혈병에 걸려 사망했다. 또 아오야기 유코 씨도 이유 없이 너무 고단하고 기운이 없는데 잠시 외국에 가서 일주일만 보내도 몸이 좋아지는 것을 경험하지만 그런 걸 이야기하면 “나이가 많아서”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일본 내부에서는 불안해도 불안하다고 말하기 어려운 분위기이다. 의사가 나서서 괜찮다고 말하고 언론이 안전하다고만 하니 국민들은 침묵을 강요받고 있다.

심지어 지난 4월에는 원자로 안에 온도가 갑자기 높아졌고 방사능 수치가 높아졌는데 지금 후쿠시마 핵발전소 내부 상황이 얼마나 더 심각한지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뿐더러 일본 정부는 망가진 핵발전소 건물을 4년째 그대로 두고 있다. 고이데 씨 등 전문가들이 체르노빌 사태 때처럼 석관으로 봉하라고 했는데도 일본 정부는 무시하고 있다. 공사비용이 엄청나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는 동안 방사능이 대기로, 해수로 퍼져갔고 앞으로도 방출될텐데 걱정이다. 이건 일본뿐 아니라 이웃나라에게 해를 끼치는 일이다. 과연 사람의 목숨이 돈보다 중요한지 아오야기 준이치 씨는 답답하다.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는 일본의 현주소를 보여줘요. 일본 사람들은 히로시마 핵폭탄 투하나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에서 본인들이 피해자라고 생각해요. 가해자라고 명확하게 인식해야 해요. 먼저 침략했고 전쟁을 벌여 히로시마에 핵폭탄이 떨어졌고,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는 단지 자연재해로 인해 해를 입은 게 아니죠. 그것에 대한 역사 인식이 제대로 없으니 지금 동아시아 평화를 위협하는 핵발전소도 포기하지 않아요. 제2, 제3의 사고가 발생하지 않는다고 누가 말할 수 있을까요? 정말 무서운 일이에요.”

더불어 아오야기 준이치 씨는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이후에 일본 전역에 있는 54개 핵발전소를 전부 멈췄지만 4년 동안 전기 수급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도 핵발전소를 없애지 않는 건 무기를 만들기 위한 준비라고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탈핵운동은 일본뿐 아니라 동아시아에서 같이 힘을 합쳐야 가능하다.”고 했다.

 

 

“김형률 씨가 남긴 일기장이나 기록이 있냐”는 질문에 가족들은 몇 년 동안 없다고 하더니 어느 날 아오야키 준이치 씨에게 일기장을 건넸다. 아오야기 유코 씨는 김 씨가 일기장에 꽂아 말려 둔 매화꽃을 인덱스해 그 날짜에 끼워 두었다.

 

내년 총선 계기로 김형률법 제정박차 가해야

아오야기 준이치 씨는 탈핵운동을 하면서 전에 만났던 김형률 씨를 자주 생각한다. 부산대학교에서 일본어를 가르치던 2001년, 부산지방법원에서 열린 미쓰비시 관련 재판을 방청하러 갔다가 김형률 씨를 만났다. “일본인으로 한국인 원폭 2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라는 질문을 받고 당시 준이치 씨는 상황을 잘 몰라 미안하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 이후 김형률 씨를 계속 만나면서 준이치 씨는 아픈 몸으로 혼자 원폭 2세 인권운동에 앞장서는 그에게 큰 감동을 받았다.

김형률 씨는 1970년 부산에서 태어났고 직접 피폭당하지 않았는데도 어머니가 여섯 살이던 1945년 히로시마 핵폭탄에 피폭당한 것 때문에 그 역시 평생 아팠다. ‘면역글로불린결핍증’ 때문에 면역력이 낮아 10여 차례 폐렴으로 입원했고 폐의 30%만 제 기능을 했고 비장종대, 혈소판 감소증 등으로 인해 아팠고 사회생활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는 이것이 자기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에 2002년 ‘원폭 2세’임을 ‘커밍아웃’했다. 원폭 피해자들도 ‘혼삿길이 막힌다’는 등의 이유로 후손들의 이상 증상을 밝히길 꺼리던 때였다. 그는 2002년부터 35살의 젊은 나이로 죽은 2005년까지 ‘한국원폭2세환우회’를 꾸려 원폭 2세의 인권을 위해 활동했다. 김형률 씨는 몸이 아픈 것을 개인 문제로만 받아들이지 않고 국가와 일본에 책임을 묻고 호소했다.

“김형률 씨의 주장은 선구적이에요.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한국인 원폭 피해자 2세에 대한 자료를 수집해서 들고 다니면서 틈날 때마다 설명하곤 했어요. 그는 원폭피해자 2세들의 상황을 알리고 정부에 건강 실태 조사를 요구했고, 아파서 자활능력이 없는 원폭 피해자 2세에게 생활비와 의료비를 지원하되 ‘선 지원, 후 규명(병이피폭 때문인 것을 규명한 뒤에 지원하는 것은 늦기 때문에 먼저 지원하고 후에 원인을 규명하라는 것)’을 하는 김형률법(원폭 2세를 포함한 한국 원폭 피해자 특별법) 제정을 주장했어요.”

키가 작고 마른 김형률 씨가 아픈 몸을 이끌고 한국으로, 일본으로 다니면서 ‘반핵인권운동’을 하다가 생을 마감한 지 지난 5월로 10년을 맞았다.

“2015년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70주년을 맞아 일본은 당시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맹세했던 것을 기억해야 해요. 지금 일본사람들을 포함해 동아시아 사람들은 매우 중요한 기로에 서 있어요. 핵발전소 가동 자체 때문에 발생하는 내부피폭 등 방사능 피해의 실태를 직시하고 탈핵을 선택할 것인가. 그리고 동북아시아 지역이 힘을 합쳐 정부와 시민사회가 이웃나라와의 관계를 존중해 ‘평화공존’을 선택할 것인가, 아닌가의 문제이죠. 한국도 내년 총선을 계기로 김형률법이 제정되는 토대가 마련되길 바라요.”

 

 

아오야기 준이치 씨와 아오야기 유코 씨가 일본어와 한국어로 펴낸 김형률 유고집을 손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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