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호 2015년 3월호 [특집] 특집-우리 농지 지키기

[ 청년이 농업을 지킨다① ]

집도 땅도 구하기 너무 힘들어, 부부의 우여곡절 농촌 정착기

글 \ 사진 김성만

농지를 지켜야 농업이 살고, 농업이 살아야 우리 삶이 지속된다. 그리고 농지든 농업이든, 사람이 있어야 지켜 나갈 수 있다. 2013년 농가 평균연령이 65.4살인 상황에서 청년은 모든 농업 과제의 답이자 미래다. 이토록 귀한 청년 농부들은 어떻게 농지를 구해 농사짓고 있을까? 우리는 이들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집도 땅도 구하기 너무 힘들어, 부부의 우여곡절 농촌 정착기


내가 사는 삶이 진짜가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도시에서 하는 거의 모든 일이 ‘남’을 위한 일이다. 나와 내 가족을 위한 일은 돈을 내면 남들이 다 해 준다. 마치 내 인생을 하청준 느낌이랄까? 마찬가지로 나는 다른 사람 인생을 하청한 셈. 무엇보다 나는 내 삶을 스스로 돌보고 싶었다. 첫째가 직접 농사짓는 일이고, 집 짓고 옷 짓고 가족과 노는 일 등. 가장 중요한 것이 먹거리 자립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농사를 짓게 되면 꼭 자연스럽게 짓겠다고 다짐했다. 농약도, 비료도 쓰지 않는 최대한 자연에 가까운 농사.
귀농을 선택한 후 서울의 전셋집을 아예 빼 버리고 아내와 함께 도보여행을 떠났다. 6개월간 전국 여러 곳을 돌아보며 귀농한 선배 집에도 가 보고 변산공동체 같은 공동체에도 며칠씩 머물러 보았다. 우리가 꿈꾸는 곳이 나타나면 바로 자리 잡으리라 마음먹었다. 어떤 곳에서는 바로 빈집을 알아봐 주기도 했다. 하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대부분의 시골집은 너무 허름했고, 어딜 가도 축사가 있어서거주환경이 좋지 않았다.
일단 한 지역을 정해 그 안에서 살 곳을 찾아보자고 결정했다. 지도를 살펴보니 지금 살고 있는 경북 봉화가 적절할 거라고 생각됐다. 북쪽으로는 백두대간, 동쪽으로는 낙동정맥이 감싸고 있고 내성천과 낙동강이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3대 오지’라고 불리며 아직까지 땅값이 싸다고 들었다(실제로는 몇몇 지역을 빼고 절대 오지가 아니다). 우리가 하려는 자연농사는 우리 땅이 있어야 마음 놓고 할 수 있어서 싼 땅값이 가장 마음을 끌어당겼다.

 

 

<집 근처에 묵정밭을 빌렸다. 낫으로 풀을 정리하고 있는 아내. 여기에 농약도, 비료도 쓰지 않는 자연농사를 짓는다.>



좋은 땅은 다 마을 안에서 다 거래되더라


봉화에 가자마자 살 집을 알아보았다. 면사무소에 가서 빈집을 문의하고, 이장님을 찾아가 직접 물어보고 했다. 하지만 면사무소에서 파악하고 있는 빈집은 거의 없었고, 이장님한테 물어보면 된다고 했지만 이장님도 잘 모르기는 매한가지였다. 게다가 마을에 빈집이 있는 걸 알고 정확히 그 집이 빈집 아니냐고 물어봐도 없다고 답했다. 아마 일면식도 없는 외지인이 물으니 불편했던 것 같다.
먼저 마을 내에 빈집을 구해 마을 어른들과 친분을 쌓고 차츰차츰 땅을 알아보는, 농촌 정착하기의 ‘정석’을 뒤로하고 땅을 먼저 구하기로 방향을 바꾸었다. 땅을 구해 컨테이너라도 놓고 살면 집 문제는 일단 해결되기 때문이다. 이장님 등 마을 사람을 통해 땅을 구하는 건 일찌감치 포기했다. 빈집 구하기도 어려운데 땅은 더하리라 생각했다.
부동산에서 금전적인 여건에 맞는 곳을 찾아다녔다. 집도 절도 없는 상태여서 마음이 급했다. 얼추 괜찮다 싶은 곳을 빠르게 계약했다. 그런데 계약 뒤 마을에 인사를 간 자리에서 마을 사람들이 절대 그 가격에 그 땅을 사지 말라는 것이다. 계약금을 다 날려도 안사는 게 낫다고 했다. 사람들의 반응은 일관됐고, 만약 그대로 땅을 사서 마을에 들어가더라도 ‘바보’로 낙인찍힐 것이 분명했다. 결국 계약금의 반을 날리고 계약을 포기했다.
오래 걸리지 않아 다른 땅을 구했다. 밭 661㎡(200평), 논 1천983㎡(600평)로 가격도 괜찮은 편이었다. 밭에다 작은 집을 짓고 살면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단점이라면 2차선 아스팔트 도로에서 1.5km 정도 콘크리트 농로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경사가 가파른 구간도 꽤 있었다. 그래도 그 정도는 충분히 감수할 수 있었다. 땅 자체는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해 겨울, 눈이 정말 많이 왔다. 3월까지 접근할 수가 없었다. 허탈한 마음을 겨우 추슬러 인근 마을에 집을 구해 농사를 짓는 것으로 계획을 바꾸었다.
땅과 10km 정도 떨어진 마을에 집을 구했다. 군에서 수리비를 지원받아 수리도 했다. 마을 행사에도 참가하고 농번기에는 이웃집 농사일을 도우며 돈도 벌었다. 우리 논밭도 나름 관리하긴 했지만 거리가 있는 탓에 자주 가지 못했다. 손이 많이 가는 자연농을 시도했기에 풀의 위세에 작물들도, 우리도 나가떨어졌다. 차를 타고 밭을 오가는 것도 매우 불편했다. 우리가 농사지을 땅에 집을 지어야 제대로 농사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김매기가 주된 일이기 때문에 수시로 밭에 나가야 했다.
이후 봉화로 귀농한 동갑내기 부부와 1년정도 함께 땅을 구하러 다녔다. 넓은 땅을 구해, 그 땅에 같이 집을 짓고 살자고 합의했다. 그러나 적당한 땅이 구해지지 않았다. 한 번은 부동산 업자가 ‘다운계약서’를 빌미로 땅값의 1/4에 이르는 금액을 가로채려 하기도 했고, 정말 마음에 들었던 땅은 땅을 소개한 부동산 업자가 매입해버렸다.
마을에 살면서 알게 된 것은 좋은 땅은 다 마을 안에서 거래되고, 농민들이 피하는 안 좋은 땅만 외부로 나온다는 점이다. 게다가 외부로 나온 땅들은 부동산 업자들을 통하며 가격이 터무니없이 높아진다.결국 친구와 땅을 함께 구하는 것은 포기하고, 우리 땅에 들어가 사는 것으로 최종 결정했다. 눈이 오면 걸어 다니면 된다고 위안했다. 또 바로 아래 밭 3천306㎡(1천 평)를 추가로 매입해 총 5천950㎡(1천800평)의 땅을 가지게 됐다. 능력만 된다면 충분히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규모다. 중간에 부동산 업자가 끼지 않아 거품이 거의 없어 부담이 되지 않았다. 우리 같은 경우는 극히 드물다고 확신할 수 있다.


노는 땅이 많으니 빌려서 농사를 지으면 된다고?


농사를 준비하며 중요하게 생각했던 건 적절한 농사 규모였다. 기계를 쓰지 않을 때 사람 손으로 농사지을 수 있는 규모,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최소 규모는 어느 정도인지 어릴 때 농촌에 살았던 아버지에게도, 이웃집 어른에게도 물었다. 대부분 2천 평에서 3천 평 정도라고 말했다. 농사에 기계를 쓰기 전에 한 가족이 그 정도를 지었고, 먹고살 만했다는 거다.
만약 나 같은 청년이 귀농해서 생계가 가능한 정도인 2~3천 평의 땅을 구한다고 할 때, 적게는 1억 원에서 3억 원 또는 그 이상이 든다. 통계청의 최근 농가수입통계를 보면 농민의 69%가 1년에 2천만 원 이하의 소득을 올린다고 한다. 청년들도 그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고 볼 때, 은행에서 1억 원을 빌려 토지를 구했다면 최소 10년간은 소득의 반을 빚 갚는 데 써야 한다. 도시는 집값이 비싸서 문제지만, 농촌은 땅값이 비싸서 아예 청년들의 진입이 어렵다.
땅을 빌려서 농사지으면 되지 않느냐고 물을 수 있다. 우리도 농촌에 오기 전까지는 “노는 땅이 많으니 빌려서 농사를 지으면 된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그런데 와서 보니 해가 잘 안 드는 땅은 묵고, 숲이 된다. 해가 잘 들고 농사가 잘되는 땅은 대부분 마을 ‘대농’들이 임대한다. 마을에서 소화가 안 되는 땅은 인삼·도라지 업자에게 빌려주고 높은 임대료를 받는다. 그런 업자들이 임대료를 올려놓는 바람에 전체적인 농지 임대가격도 높아져 버렸다. 나같이 농사 경력도 없는 상태에서 땅을 덜컥 빌렸다가는 임대료 내고 나면 별로 남는 것도 없을 것이다.
게다가 비닐도 씌우지 않고 풀을 키우는 자연농사라면 마을에서 쫓겨날지도 모른다. 농촌에서 ‘잡초’들을 살려두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행동이다. 우리도 집을 구한 뒤 4천959㎡(1천500평) 정도 되는 밭을 임대할 뻔했지만, 풀 문제를 동네 어른들과 어떻게 해결을 봐야 할지도 갑갑했고 몇 년에 걸쳐 땅을 살려 놓은들 우리 땅이 아니기 때문에 결국 떠나야 하는 이유로 포기했다.



지자체의 공유지를 청년들에게 먼저 임대하면 어떨까?


청년 스스로의 힘으로 농촌에 자리 잡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서 청년들이 농사로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정부나 지자체의 도움이 꼭 필요하다. 사람이 먹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는 마법 같은 방법이 있다면 모르겠지만, 먹어야만 살 수 있다면 청년들을 적극적으로 농업으로 끌어들일 묘책을 세워야 한다.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지자체에서 소유한 공유지를 귀농하는 청년들에게 우선적으로 임대하면 어떨까?지금은 공유지마저 높은 권리금을 주고받으며 거래되는데, 임대료는 일반 농지에 비해 상당히 싸다. 공유지를 활용해 청년들이 마음 놓고 농사지을 여건을 만들어 주고, 상황에 따라 토지 일부에 집도 짓게 해 주는 것이다. 좋은 땅을 구한 귀농자와 비교적 나쁜 땅을 구한 귀농자 사이에 발생할 형평성 문제는 지혜로운 정책으로 최소화해야할 것이다. 청년들이 들어와 지역에 활기가 돌고 성과가 가시화되면 묵은 밭이나 논을 지자체에서 사들여 추가로 들어오는 청년들에게 임대한다.
또 폐교를 청년들의 귀농 거점으로 만든다. 건물은 숙소로 만들고, 운동장은 텃밭으로 바꾼다. 짧게는 반년에서 길게는 1~2년씩 머물 수 있게 한다. 그곳에 머물며 인근 마을과 교류하고 경험하면서 차츰차츰 지역 속으로 스며든다. 지금의 ‘귀농인의 집’은 일주일에서 보름 정도 머물수 있도록 돼 있다. 그 정도의 기간으로는 어림도 없다. 게다가 며칠간의 체류비도 부담스러운 청년들에겐 더더욱.


지역민의 인식 변화가 청년들 끌어당길 것


지역 공무원들이나 주민들의 인식 변화도 꼭 필요하다. 지역에 따라 다르겠지만 귀농 담당 공무원들이 귀농자를 그저 ‘업무’로만 생각하고 대하는 듯하다. 단순히 정부의 귀농지원정책을 설명하는 정도지, 적극적으로 정착을 돕는 공무원들을 거의 만나보지 못했다(우리 면의 담당 공무원은 정말 친절하고, 내 이름까지 외우지만!). ‘귀농 관련 활동가들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정도의 반만이라도 따라간다면’ 하는 아쉬움이 많이 들었다. 원래 귀농 활동가들이 하는 일을 담당 공무원들이 해야하는 게 아닌가 싶지만. 정착지원금으로 수백만 원을 주는 것보다 공무원들이 조금만 더 귀농자들을 위해 일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다.
이웃에게도 바뀌었으면 하는 게 있다. 우리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아들딸뻘이고, 어른들에게는 손주뻘이다. 자식들 대학 보내고 도시에서 편하게 살라고 평생을 고생했는데, 우리는 편한 도시에서 고생스런 농촌으로 온 셈이니 ‘불쌍한 아이들’이라는 생각이 많은 것 같다. 그 때문에 우리를 도와주려고 많이들 애쓰시고, 실제로 도움도 많이 받았다. 그럼에도 가끔씩 우릴 보며 한숨 쉴 때가 있는데, 그때마다 힘이 빠진다.
그래도 우리는 재작년에 아들 모하를 낳아 잠깐이나마 마을에 활기를 불어넣었다는데 뿌듯해 하고 있다. 마을 안에서의 출생신고는 20여 년 만에 처음이라고 했다. 한편으로는 청년 귀농자들이 많은 지역으로 가지 않은 게 아쉽다. 비슷한 생각을 하고 비슷한 방식으로 아이를 기르는 사람들이 모인 곳. 우리는 그런 곳을 억지로 피했다. 땅값이 너무 비쌌기 때문이다. 우리 땅을 가질 수 있는 곳으로 온 게 봉화다. 그런데 여긴 우리의 친구도, 모하의 친구도 거의 없다. 땅은 구했지만 친구는 잃었다.
햇수로는 귀농한 지 4년이나 되었지만, 아직 농사를 제대로 지어본 적이 없다. 첫 해에는 조금 수확했지만 지난해에는 가뭄 때문인지 하나도 수확하지 못했다. 텃밭 채소는 실컷 먹었지만. 그럼에도 이곳에서 멋진 꿈을 꾸고 있다. 집을 손수 짓고, 농사도 실컷 지어서 친구들, 이웃들과 마음껏 나누는 것이다. 먹고살 수 있을 만큼만 농사짓고, 나머지 시간은 아주 땀나게 놀 생각이다. 아자!

 

 

<어느 가을날, 아내가 밭을 돌아보고 있다. 햇수로는 귀농한 지 4년이나 되었지만, 아직 농사를 제대로 지어보지 못했다. 고생 끝에 구한 우리 땅에서 실컷 농사지어 친구들, 이웃들과 마음껏 나눠 먹는 꿈을 꾼다.>


 
농지은행 2030세대 지원사업


만 20~39살이며 농지 소유면적이 3ha 이하인 청년을 대상으로 농지를 지원하는 사업. 기존 소유 및 임차를 포함하여 5ha 이내에서 5년간 농지매매 및 임대를 지원한다. 기존 지원사업은 주로 만 55살 이하이며 일정 경력과 영농 규모를 갖춘 농업인을 대상으로 했으나, 이 사업은 특별한 자격요건 없이 농업을 희망하는 청년 누구나 신청할 수 있다. 2012년부터 시작되어, 2014년까지 3천892명이 7,051ha를 지원받았다.


문의: 농지은행
www.fbo.or.kr, 1577-7770



↘ 김성만 님은 자연스럽게 농사짓고, 집 짓고, 아이도 키우는 꿈을 가진 농부입니다. 4년 전 아내와 함께 귀농했고, 재작년 첫아이도 낳아 재미있게 살고 있습니다. 쓴 책으로 《달려라 자전거》, 《서울성곽 걷기여행》이 있습니다. 온화전답답 dapdap.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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