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호 2015년 2월호 살림,살림

[ 땅땅거리며 살다-30년 한살림의 산증인 충북 음성 성미마을 김영희 씨 ]

김영희를 왜 몰러 우리가 알지!

글 이선미 편집부 \ 사진 류관희

“언젠가 내가 그랬어. 최재두는 전국적으로 유명한데 김영희는 아무도 모른다고. 그랬더니 한살림 오랫동안 한 소비자들이 ‘김영희를 왜 몰러, 우리가 알지!’ 하더라고. 예전에는 여성생산자들이 고생만 하고 이름이 없었어. 누구 엄마, 누구 마누라 그거지.” ‘최재두의 아내’ 김영희. 누군가의 아내라는 말은 그이를 10분의 1도 설명하지 못할 것이다. 열혈 농민운동가이자 고집 센 유기농부 그리고 수많은 소비자를 먹여 살린 생산자. 이 사람 김영희를 이제 우리 모두가 안다.

 

 

찍은 사진마다 온통 환하게 웃는 얼굴이다. “나 처음에 시집 와서는 너무 웃는다고 혼났어. 좋아서 웃나? 웃으면 좋은 일이 생기는 거지.” 겨울 햇살 아래 반짝한 그이의 웃음 덕분에 왠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았다.

 



농부가 된 지 어느덧 40년


성미마을은 한살림에서 유명한 곳이다. 1986년 ‘한살림농산’에 처음 공급된 물품이 여기서 난 유기농 쌀이고, 1989년 한살림 최초로 단오잔치가 열리기도 했다. 초대 한살림전국생산자연합회 회장을 지낸 고 최재두 씨와 우렁이농법의 창시자인 고 최재명 씨가 살던 곳이기도 하다. 특히 최재두 씨는 1970년대부터 가톨릭농민회에서 농민운동을 했고, 일찍이 유기농업을 시작해 쌀뿐만 아니라 채소·유정란 등을 생산했다. 그리고 김영희 씨는 이 모든 것을 함께, 때론 더 열심히 한 사람이다.
“지난해에 온다고 해서 기다렸는데 안 왔어. 내가 여태 고생한 게, 그래도 한살림 이렇게 크게 했다는 게 내 자부심이거든. 우리 남편도 한살림에 몸 바쳐 일한 사람이니까. 좀 서운하더라고.” 변명의 여지없는 큰 실수다. ‘땅땅거리며 살다’에서 만난 이들 중 소중하지 않은 사람 하나 없지만, 더 일찍 찾아왔어야 했다. 그래도 너무 늦지 않았으니 다행이라고 자기 합리화를 했지만,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김영희 씨가 농부가 된 지도 어느덧 40년, 1976년 최재두 씨와 결혼하고서부터다. “처음 봤을 때는 좀 별로였어. 너무 성격이 세 보이더라고. 그러면서도 ‘아쌀’할 거란 생각은 들었지.” ‘아쌀’하다는 건 뒤끝이 없다는 뜻. 최재두 씨가 밥 먹는 모습을 보고 그이의 아버지가 “밥 잘 먹는 사람은 가족 굶기지 않는다”고 합격점을 준 후 결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그가 스물 다섯, 남편은 스물 여덟이었다.
결혼하기 전부터 가톨릭농민회에서 활동하던 남편은 집의 일은 할 생각을 안 하고 만날 밖으로 돌아만 다녔다. 참깨를 털어야 하는데 회의가 있다고 그냥 가버린 적도 있었다. “자기 하고 싶은 거 해야 되는 사람이야. 누가 뭐래도 소용없어. 그 고집으로다가 버틴 거지.” 그이가 본 첫인상이 맞았던 걸까? 남편은 고집 세게 농민운동을 했고, 결국 그이 역시 남편과 같은 길을 갔다. “4박 5일로 여성농민 교육을 한다고 해서 갔어. 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이야기도 하다 보니, 나를 찾게 되더라고. ‘아, 이게 남편 혼자 해서는 안 되는 일이구나. 이건 좋은 일인데 여성들 힘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구나.’ 하는 걸 알게 됐지.”

 


 

 

 

 

 

 

 

 

(좌)“유기농도 공해 때문에 다 절단 나서 점점 힘들어. 가물 때는 한 달 두 달 왕창 가물었다 비올 때는 또 한 달 두 달, 농작물이 될 수가 없어. 오래 했다고 잘 짓는 게 아냐. 30년 넘게 겪어 봤지만 그런 것 같아.” (우)아들 최성호 씨가 고추장을 배워보겠다고 했을 때 김영희 씨가 한 말은 “너 자신 있냐?”였다. 너무 힘들어서 내 자식한테는 안 물려주겠다고 생각했지만, 기왕 배우려면 일찍 들어오라고 말했단다. 여기저기 몸이 아픈 김영희 씨를 대신해 이제 대부분의 일을 아들이 한다.

 

 

 

김영희 씨네 고추장은 조청을 직접 만들어 담근다. 가마솥에 푹푹 고은 찹쌀 조청으로 담근 고추장은 너무 달지 않고 깊고 구수한 맛이 난다. 항아리에서 8개월 이상 숙성시킨 후 공급하는데, 날씨에 민감해 비가 많이 오면 짜고 날이 좋으면 덜 짜다. 나물 많이 나는 봄과 비빔밥 즐겨 먹는 여름에 많이들 찾는다고.

 



말수 없는 남편과 겁나는 게 없던 아내


부부는 함께 농민운동을 하며 서로를 응원했지만, 가부장적인 사고방식이 쉽게 바뀌지 않아 부딪힐 때도 있었다. “내가 웃으면서 남편한테 ‘당신 나가서 부르짖는 게 뭐냐, 남녀평등 아니냐, 그럼 나를 똑같이 대해 줘야 되는 거 아니냐’ 하면 ‘그건 나가서 이야기지’라고 말할 때도 있었어.” 그래도 부부는 평생 싸워 보질 못했다. 말수가 없는 남편 때문이었다. 말도 없고 남 앞에 나서는 법도 없던 남편 때문에 때로는 속상했다. “일은 자기가 다 해 놓고 다른 사람을 내세우니까. 자기 홍보도 해야지 않느냐고 했더니 자기는 그러고 싶지를 않대. 숨어서 일하는 걸로 만족한대. 속 터지지.”
그와 달리 김영희 씨는 뭐든 화끈하게 하는 사람. 양담배 반대시위, 고추값 폭락 반대시위 등에도 많이 나갔다. “여자들이 먼저 갈 테니까 남자들한테 따라오라고 했어. 경찰이 여자들 붙잡고 못 가게 하는 사이에 경운기가 빠져 나가고 그랬지.” 자식들 생각해서 이러지 말라고 말리던 경찰을 보며 그이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내 자식, 남의 자식 생각하니 이럴 수밖에 없다’고 말하고 싶지 않았을까? 양담배 반대시위 때는 뒤를 돌아보니 사람이 하나도 없더란다. 경찰이 최루탄을 쏴서 난리가 났는데, 그이는 전경 바로 앞에 있어 몰랐던 게다. “그때는 뭔 힘이 났는지 겁나는 게 없었어. 겁나면 못 하지. 겁 하나도 안 났어.”
그땐 파는 음식이 흔치 않아서 시위에 나갈 때마다 김영희 씨는 밥을 잔뜩 해 갔다. 그러면 정보과 형사들이 와서 “아줌니, 밥 좀 줘유.” 했고, “그래유. 싸울 땐 싸우더라도 같이 먹어유.” 하며 나눠 먹었다. “고추값은 폭락하는데 세금은 있는 대로 뜯어 가니 농민이 살 수가 있어? 우리는 그거야. 우리 뜻을 정부에 올려만 달라는 거지. 그렇게 해주겠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끝냈어.”

 



 

(좌)“쌀만 유기농이면 되느냐, 일 년 내내 먹을 수 있는 걸 달라”는 소비자조합원들의 요구에 채소농사를 시작했다. 이때 비닐하우스 짓느라 진 빚을 갚는 데 십 년 넘게 걸렸다. (우)김영희 씨 부부는 농사를 지으면서 농민운동도 열심히 했다. 일본 농민과의 교류를 통해 사람도 살고 땅도 사는 유기농이 살길이라는 사실을 더욱 확신하게 됐다.

 



 

 

 

 

 

 

 

 

 

 

(좌)1993년 나온 <농촌의 생활>이라는 책에 김영희 씨가 '표지모델'로 나왔다. "다섯 집인가 사진을 찍었는데 내가 제일 낫다고 이렇게 넣은 거여. 이 책이 우리 집 가보여" (우)농민회 활동도 적극적으로 했다. 부부 중 한 사람이 회의에 가면 다른 사람은 남아 아이들을 돌봤는데, 사진에 김영희 씨만 있는 걸 보니 남편은 집에 남아 있었나 보다.

 

 

“발 벗고 나서서 했지, 뒷짐은 안 졌어.”


1970년대에 가톨릭농민회에서 일본에 갔다 온 사람들이 “앞으로는 유기농이 살길”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사람도 살고 환경도 사는 일을 해보자 싶었다. 농민의 본분은 땅을 살리는 것이니까. 힘들고 돈 안 될 것은 처음부터 알았지만 상관없었다. 쌀농사는 결혼하고 2~3년 후 유기농으로 바꿨고, 채소는 처음부터 유기농으로 지었다. “방앗간에 가면 방앗간 주인이 자기 친척들 준다고 우리 쌀은 따로 싸 놨어. 농약을 안 줬으니까. 같은 값이면 자기 식구들 준다는 거지.”
부부를 보고 너도나도 미쳤다고, 저걸 일이라고 하느냐고 할 때였다. “동네에서 우리 논만 빼고 다 약을 치니까 우리 논의 병충해가 자기네 논으로 옮겨 온다는 거야. 그래도 약 한 번을 안 줬어.” 쇠고집으로 버틴 건 가톨릭 신자인 그이가 하느님 앞에 부끄럽지 않게 살기 위해서였다. “농약 주면 돈은 더 벌겠지만 간접적으로나마 사람 죽이는 일이라고 생각했어. 땅을 죽이는 건 사람 죽이는 거라고.”
유기농 초창기에는 돈이 안 되어서 많이들 그만뒀다. 다들 자식 키우고 살아야 하는데,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김영희 씨도 3남매를 제대로 키우며 살 수 있을까, 굶기지는 않을까 하는 게 제일 큰 걱정이었다. 앞날은 생각도 못 했지만, 그는 척박한 현실에서도 타협하지 않고 꿈을 꾸었다. “어차피 농사짓는 거, 되든 안 되든 이 길을 가다 보면 뭔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
그러다 고 박재일 한살림 회장을 알게 됐다. “회장님이 ‘소비자하고 연계하면 좋겠다’ 하시더라고. 안쓰러우셨던 거지. 유기농한다고 고생하는데 남들보다 대우도 못 받으니 까.” 운동도 운동이지만 농민들이 생활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공유하면서, 1986년 서울 제기동에 처음 문을 연 한살림농산에 쌀을 공급하게 됐다. 생산자가 먼저 조직되고 소비자가 생긴 경우다.
일 년쯤 지났을까. 농약 나쁘다며 쌀만 유기농이면 되겠냐고, 김장채소라도 해 달라는 소비자조합원들의 요구에 무·배추 농사를 지었다. 유정란 생산도 시작했다. 차가 귀하던 시절이라 쌀 위에 달걀을 올려서 보내면 가다가 “죄 터지기” 일쑤였고, 남은 것들은 이고 다니며 팔았다. 게다가 여름이 되니 닭을 먹어야겠단다. 아이스박스 등 냉장시설이 없을 때라 밤을 꼬박 새워 닭을 잡아서는 다음 날 아침 역시 쌀 위에 올려서 보냈다. 초복, 중복, 말복마다 고생이었다. 일일채소를 시작하면서 유정란과 닭은 다른 생산지로 넘겼다. 대신 알타리무·열무·상추·쑥갓·아욱·근대·케일 등을 기르다 보니 새벽 네 시면 농사일을 시작해야 했다. 처음에는 쌀농사와 같이 하다 풀 뜯을 시간도 없어 몇 해 지나 쌀농사를 접었다. 채소농사 때문에 지은 비
닐하우스 빚 갚는 데는 십 년 넘게 걸렸다.
그리고 고추장. “고추가 많이 남았다는 거야. 해 지나면 못쓰니까 한살림 실무자들이 나보고 고추장 담가 달래, 우리집 고추장이 맛있다고. 나는 죽어도 못한다고 했는데 글쎄, 우리 남편이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거여.” 20여 년 전인 당시는 생산자도, 소비자도 많지 않을 때였다. 부탁을 거절할 수가 없어서, 남은 고추가 아까워서 울며 겨자 먹기로 고추장 생산을 시작했다. 첫 해에 한 항아리를 담갔는데 주문량은 반 되(약 0.9ℓ)였다. 게다가 날이 더워지면 끓어 넘치고 뻥뻥 터지고 난리였다. “그렇게 버려 가면서 4~5년 했어. 품값은커녕 재료비도 안 나오지. 힘들어 죽겠는데 소득은 둘째 치고 버리는 게 너무 많으니까.” 다행히 한살림 물류센터가 생기고 냉장시설에 고추장을 보관할 수 있게 되면서 생산은 안정됐다.
“쌀이고 채소고 가공물품이고, 한살림 일을 내가 다했다니까. 나만큼 아는 사람이 없어. 나는 발 벗고 나서서 같이한다는 생각으로 했지, 남편 따라 한다는 생각은 안 했거든. 뒷짐은 안 졌어.”

 

 
고 최재두 씨와 김영희 씨 부부. 왼쪽은 큰아들, 오른쪽은 막내아들이다. 누구 아내, 누구 엄마로만 불리는 것이 때로는 섭섭하기도 했지만 언제나 가족이 가장 소중했다. 특히 제대로 돌봐 주지 못했는데도 올곧게 자란 아이들에게 늘 고맙다.

 

 


 

 

 


 

 

 

 

 

 

 

 

 

 

 

 

 

한살림 하면서 제일 즐거웠던 때가 언제냐고 물었더니 단오잔치를 꼽았다. 성미마을 느티나무에 그네도 묶어 타고, 생산자 소비자 할것없이 한데 어울렸다. 김영희 씨도 확성기를 들고 한몫한 모습이다.

 

 

단오잔치하며 정 나누던 게 그리워


마을 사람들과 공동체를 꾸려 함께 농사짓는 것도 쉽지 않았다. 1990년대 초 다섯 명이 같이 하다가 이런 저런 이유로 모두 나가고, 결국 김영희 씨 부부만 남아 계속했다. 유기농이라는 생각을 같이 하는 것과 함께 일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당시에 마음고생이 정말 심했어. 일은 하다가 힘들면 쉬기라도 하는데 이건 그럴 수가 없잖아. 그에 비하면 농사짓는 건 아무것도 아니야.” 묵묵히 견디다가도 가끔 화나는 마음이 들 때마다 남편은 “지는 사람이 이기는 사람”이라고 그이를 다독였다.
힘든 기억은 즐거운 기억으로 잊힌다. 김영희 씨는 마을의 커다란 느티나무 아래에서 단오잔치할 때가 그렇게 좋았단다. 버스 전세 내서 타고 온 소비자조합원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도 하고 점심밥도 같이 먹고, 생산지를 둘러보며 각자의 어려움도 허심탄회하게 나누었다. 한살림의 규모가 커지면서 그때처럼 정을 나누지 못하는 게 못내 아쉽다. “앉아서 먹기만 하면 몰라. ‘물품이 왜 이러냐, 점점 나아져야지’ 말하는데, 생산자들도 당연히 다 좋게 만들고 싶지. 그런데 공산품이 아니니까 늘 좋을 수는 없거든.” 그래도 믿어주고 힘을 주는 사람들이 훨씬 많기에 여기까지 왔다. 신념과 자부심보다도 “고맙다”는 한마디에 힘을 얻어서 하고 또 했다. “한살림은 믿음 없으면 될 수가 없어.”

 



 

 

 

 

 

 

 

(좌)"음식 맛은 장맛"이라더니, 단촐한 점심밥상의 맛이 놀랍다. 김영희 씨의 며느리 박현선 씨가 신김치 썰어 넣고 끓인 청국장찌개에 밥 한 공기 뚝딱. 여기서 만든 고추장에 찍어 먹는 노란 겨울배추가 달았다. (우)예전에는 생산자로 남편 이름만 올라가는 게 일반적이었단다. 최근에 부부 이름을 함께 올리는 추세라고 하니, 참 잘된 일이다. 고추장 만드는 것만으로도 일이 버겁지만 30년 넘게 유기농으로 갈아온 땅이 아까워서 모농사를 계속 짓고 있다.

 

 


 

 

 

 

 

 

 

 

 

 

 

(좌)항아리 모양이 들쑥날쑥한 이유를 물었더니, 고추장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20년 동안 하나 둘씩 사 모아서 그렇단다. 오랜 세월 김영희 씨의 정성을 듬뿍 받은 항아리들은 반질반질 윤이 났다. (우)김영희 씨네 3대가 모였다. 김영희 씨와 아들 최성호. 며느리 박현선 그리고 올해 아홉 살 된 손자 최희철. 어린이집에 간 손녀가 빠진게 아쉽다. 박현선 씨는 "자식들 키우면서도 현실에 타협하지 않은 어머님이 정말 대단하다"며, 그 뜻을 배우고 이어가고 싶다고 말했다.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많으면 많은 대로


올해로 한살림이 시작된 지 30년. 김영희 씨는 시간이 흐르고 규모가 커지면서 좋은 뜻들이 퇴색되는 건 아닌지 걱정스러울 때가 있다. “왜 먹어야 되는지를 모르니까 그래. 환경도 땅도 생각 안 하고, 무조건 내 몸에 좋은 거 먹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아.” 예전처럼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많으면 많은 대로 생산하고 소비했으면 좋겠다. 농사라는 게 일 년 열두 달 풍족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수요에 비해 공급량이 적어도 생산자를 무리하게 늘리지 않고 초심을 지켜 가면 좋겠다.
한살림이 큰 것도 좋지만 무엇보다 자식들이 잘 커준 게 제일 좋다. 잘 보살펴 주지도 못했는데 아이들은 하나 삐뚤어지지 않고 자랐다. “우리 애들한테는 많이 미안해. 돈이 없어서 해준 것도 없고, 농민운동한다고 만날 집에 놓고 다니고. 두 내우가 다 나가서 돌아다니니까 애들이 저들끼리 밥을 먹었는지 우쨌는지도 몰랐어.”
지금은 아들 최성호 씨와 며느리 박현선 씨가 함께 고추장을 담그고 무농사를 짓는다. 너무 힘들어서 내 자식한테는 절대 안 물려주리라 생각한 일인데, 아들은 배워보겠다고했다. 아들 내외의 ‘러브스토리’도 대단하다. 한살림청주 실무자였던 박현선 씨가 마음에 든 최재두 씨가 내 며느릿감이라고 여기저기 소문을 냈고, 그 인연으로 그들은 진짜 부부가 됐다. 서동요의 선화공주처럼 졸지에 ‘최회장 댁 며느리’가 된 셈이다. “아들이 들어와 살면 장가 못 갈 줄 알았어. 남편이 며느리를 딱 찍어서 데려왔으니 고맙지.”
막내아들을 손수 짝지운 남편은 2008년 세상을 떠났다. 간암 판정을 받고 병원에 갔다가 열흘 만에, 너무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었다. “너무 눈물이 쏟아져 가지고 어디 가서 남편 이야기를 못했어. 육십뿐이 안됐었는데, 너무 아까워.” 남편이자 일생의 동지였던 이를 떠나보낸 마음이 오죽했을까. 누굴 봐도 어딜 가도 남편이 생각나 한동안 두문불출했다. 아들 내외가 없었다면 일도 다 접었을 것이다. ‘어떻게 하면 한살림이 제대로 될까’ 생각뿐이던 남편의 빈자리는 그렇게 컸다.
유기농사지으며 30년 한살림을 일구어 온 농부들이 얼마남지 않았다. 돈이 얼마가 되든 빚에 허덕허덕 하든 한평생 ‘살리는 사람 농부’로 살아온 이들 덕분에, 지금 우리가 “앉아서 잘 먹고사는” 것 아닐까? 김영희 씨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진짜 생산자와 소비자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지를 생각하게 됐다. 그이의 말대로 “내 몸 위할 줄만 알다간 우리 땅과 환경이 절단 나는 건 금방”일 텐데, 우물쭈물 아무 것도 하지 않기엔 남은 시간이 너무 짧은 것만 같다. 그 이를 지금이라도 만나서 정말 다행이라고, 돌아오는 내내 가슴을 쓸어내렸다.


http://www.salimstory.net/renewal/sub/view.php?post_id=11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