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호 2015년 1월호 살림,살림

[ 책으로 떠나는 인문학 여행-지방자치 ]

누구의 정치를 두려워하는가?

글 하승우

지역, 지방자치, 그리고 민주주의
하승수 지음 / 후마니타스 펴냄 / 2007년

 

마을, 그 아름다운 공화국
송기숙 지음 / 화남출판사 펴냄 / 2005년

 

음란과 혁명
권명아 지음 / 책세상 펴냄 / 2013년

 

 

얼마 전 대통령 소속 지방자치발전위원회는 ‘지방자치발전 종합계획’을 발표했다. 지방의회의 권한을 강화하고 지방행정에 주민참여를 확대하며 기초자치단체에 자치경찰단을 설치하는 등 그동안 시민사회가 요구해온 방안들도 포함되었지만, 특별시와 광역시의 기초의회를 폐지하고 단체장과 교육감 직선제를 변형하는 등 지방자치의 흐름에 역행하는 내용들도 포함되었다. 이런 구상은 박근혜 정부의 독자적인 판단이 아니고 이명박 정부의 지방행정체제개편추진위원회에서도 비슷하게 제안한 바 있다. 이런 계획들이 추진되는 이유는 뭘까?

 

독재 정부는 어떤 식으로든 지방자치제도를 막으려 든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이승만 정부는 지방자치제도를 자기 이익에 따라 좌지우지했고, 1960년 4월혁명 이후에야 전면적인 지방자치가 실시되었다. 하지만 박정희의 군사쿠데타 이후 지방의회가 해산되고 단체장이 임명직으로 전환되면서 지방자치제도는 또 한 번 전면 유보되었다. 그리고 1987년 6월 항쟁 이후 지방자치제도가 부활하고 조금씩 진전을 보였다. 이런 흐름을 보면 독재 정부는 어떤 식으로든 지방자치제도를 막으려 든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하승수의 《지역, 지방자치, 그리고 민주주의》(2007)는 1987년 이후 지방자치의 흐름과 의미, 그 어려움을 파악하기에 좋은 책이다. 하승수는 한국 민주주의의 핵심과제를 “지역에서부터 풀뿌리민주주의를 실현해 나가는 것, 그것에 기반을 두고 관료주도적이고 중앙집권적인 정책 과정을 변화시켜 나가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지방자치제도는 이런 과제를 풀기 위한 좋은 ‘도구’이다.

 

궁극적인 해결책이 아니라 도구라고 말한 이유는 일제강점과 미군정, 군사독재 시기를 거치면서 한국의 지역사회가 심각하게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송기숙의 《마을, 그 아름다운 공화국》(2005)에서 다루는 “동네 사람들이 마을 단위로 하나로 뭉쳐 네 것 내 것 꼼꼼히 따지지 않고 살아가는” 공동체는 거의 사라져 버렸다. 그러니 지방자치제도를 실시한다고 풀뿌리민주주의가 바로 살아날 가능성은 적었다.

 

외려 지역사회의 강고한 기득권 지배구조와 “지역패권적 중앙정당이 공천권으로 지방정치를 좌우”하는 것, “지방자치제도와 선거제도가 지방자치단체장을 정점으로 한 기득권적 지배구조와 지역패권적 중앙정당에게 유리하게 되어 있”는 점, “민주화운동, 시민운동, 지식인들조차 국가권력을 중심에 놓고 사고하는 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점, “비수도권 지역의 경제적·사회적 침체를 명분으로 한 신개발주의는 지역 기득권 세력의 영향력을 더욱 강화”하는 점 등은 민주주의를 가로막아 왔다. 지방자치제도 실시 이후에도 한국은 강력한 중앙집권형 국가체제를 유지해왔고, 수도권으로의 집중현상은 계속되고 있으며, 소비적인 도시가 자립능력을 잃어버린 농촌을 지배해 왔다. 밀양과 청도의 송전탑, 제주도 강정마을 해군기지, 삼척의 핵발전소와 같은 현안은 이런 지배와 맞물려 있다.

 

그래서 지방자치제도는 궁극의 해결책이 아니라 민주주의라는 목표로 다가서기 위한 도구이다. 그러니 이 도구를 활용하려는 시민들이 계속 늘어나야 할 텐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이 책이 출판된 지 7년이나 되었지만 여전히 지방자치는 불안하고 위태롭다. 왜 이렇게 시민정치나 자치가 어려운지, 뭔가 설명이 더 필요하다.

 

자치와 민주주의를 외치는 이들의 내부에도 ‘풍속의 잣대’가 있다

 

권명아의 《음란과 혁명》(2013)은 역사를 더 거슬러 올라간다. 새로운 정치를 가로막는 힘의 기원은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풍속’이라는 개념으로 “근대적인거리나 문화공간뿐 아니라 그 이면까지 속속들이 장악”하려는 시도는 일제강점기부터 시작되었다. 특히 “풍속경찰이 작용하는 범위와 대상은 초기에는 주로 해당 지역사회의 토착적인 삶의 방식이나 성과 관련된 영업, 도박 등과 연관”되어 있었다. 지역적인 생활양식이나 관행이 풍기문란으로 매도되고, “특정한 주체의 형상과 그 동력으로서의 열정은 ‘부적절한 정념’ ‘불가해한 열정’ ‘병리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권력이 통제하려 했던 이 불온한 정치의 주체는 누구일까?

 

“풍속 통제의 기본이념은 이른바 청소년의 건전한 육성, 그리고 사회정화와 행복한 가정의 이념을 내포하고 있었다.” 해방 이후에도 이런 풍속 통제는 사라지지 않는다. 시민의 일상생활에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넓게 열어놓은 이런 통제는 어떤 면에서 더욱 강화되었다. 풍속 통제는 정치주체의 등장을 퇴폐와 허영, 방종으로 몰며 망국의 이미지와 뒤섞는다.

 

이 책이 자치를 직접 거론하지는 않지만 지방자치를 전면 실시했던 1960년 이후의 정치가 한계에 부딪친 이유를 엿볼 수 있다. 중고등학생까지 정권 퇴진 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1960년의 정치 열기가 왜 갑자기 식어버리고 군사쿠데타를 방치하게 된 것일까? 항쟁의 과정에서도 “비엘리트층의 열정은 ‘사회적 혼란’을 유발하는 부정적 정념으로 간주”되고 “진정한 민주주의적 요구와 ‘사회적 혼란을 틈탄 준동’을 구별해야 한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았다. 특히 한국전쟁 이후 발언권이 강화되던 여성의 “사회활동과 경제활동, 성과성과 결혼에 대한 관습을 거부하는 등은 ‘허영’과 ‘문란’이라는 이름으로 비난과 처벌의 대상이 되었다.” 학생이나 청(소)년들도 마찬가지로 풍기문란의 틀 속에 갇힌다. 그들은 여전히 관리의 대상이었고, 소년법은 “보호자, 학교, 사회복지시설 장(長)의 통고에 따라 소년원에 가둘 수 있게 만”들며 “그야말로 청소년에게서 모든 법적 권리를 박탈”했다. 이런 잣대는 “같은 행위라도 특정한 집단에 유독 금지되는 경우”를 만든다.

 

음란과 풍기문란을 자유와 대립하는 이런 잣대가 새로운 정치의 등장을 가로막고 있는 건 아닐까. 지방자치제도가 실시되어도 청(소)년과 여성의 능동적인 정치가 불가능한 것은 자치와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이런 풍속의 잣대가, 특정한 집단의 정치만을 인정하려는 태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힘을 가진 자들이 강요하는 제도 변화보다 그들이 예측하지 못하는 문란하고 음란한 정치활동이 아닐까. 물론 이런 활동만으로 세상을 바꾸기는 어렵다. 그만큼 현실의 기득권과 구조적인 장벽은 두텁다. 그 시도를 좌절시킬 힘은 금지되거나 정치적이지 않은 것들에서 정치적인 열정을 보고, 그것을 정치적인 판단으로 결집하고 제도 변화로 연결하는 것이다. 그래야 사람이 없다는 푸념을 넘어설 수 있다. 시간이 많이 남지는 않았다.

 

↘ 하승우 님은 풀뿌리자치연구소 이음 운영위원으로 풀뿌리민주주의와 아나키즘, 자치와 공생의 삶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사회의 모순과 잘못을 지적하기 위해 날카롭고 까칠해야 하지만 삶의 방향은 우정을 향해야 한다고 믿는 ‘까칠한 로맨티스트’입니다. 오랜 수도권 생활을 접고 충북 옥천으로 가 자치와 자급의 삶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http://www.salimstory.net/renewal/sub/view.php?post_id=11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