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호 2015년 1월호 살림,살림

[ 땅땅거리며 살다-전남 해남 참솔공동체에서 노지 채소 기르는 김필녀·임흥옥 씨 ]

“땅이 알아서 보답한다니께”

글 김세진 편집부 \ 사진 류관희

겨울철 농한기, 그나마 농부들이 쉴 수 있는 때라고들 한다. 어느 농부의 말마따나 “뜨끈한 아랫목에 누워 ‘인간 부침개’가 되는 때”인데, 해남의 농부들은 ‘부침개를 한 점 더 먹으려는, 형제 많은 집 아이의 젓가락’처럼 되레 바쁘기만 했다. 폭설을 헤치고 전라남도 해남 참솔공동체의 김필녀·임흥옥 씨 부부를 만나러 갔더니 밭에서 한창 노지 배추를 뽑고 있었다.

 


 

온 가족이 배추밭에 나왔다. 김필녀 씨가 배추를 댕강 자르면 임흥옥 씨와 아들 임지현 씨가 배추를 망에 담았다. 호흡이 척척이다. 임흥옥 씨와 김필녀 씨는 늘 일을 같이하다 보니 이제는 무언가 혼자서 하면 허전하다고 했다.

 

 


그들을 만나러 가는 날 새벽, 눈이 올 거라는 일기예보가 신경이 쓰여 이른 세 시에 눈이 번쩍 뜨였다. 창을 열었더니 서울에도 눈이 내리고 있었다. 서해안 쪽에 폭설 소식이 있던 차라, 도무지 해남까지 운전해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기차와 버스를 갈아타고 굽이굽이 가기로 동선을 바꿨다. 가는 길에 연신 차창에 눈바람이 부딪쳤다. 온통 하얗던 창밖은 전라도에 들어서서 달라지더니 해남으로 접어들자 신기하게도 푸릇푸릇해졌다. 배추밭 덕이었다.

 




 

 

 

 

 

 

 

 

2014년 배추가 잘 되었다. 토실하니 알이 꽉 찼다. '마음을 비우고 하늘이 주는 만큼만 하자'고 농사짓지만, 하늘이 이렇게 좋은 결과를 주면 흡족하다. 유기농농사를 하면서는 어느 작물이든 나누면 사람들이 귀한 걸로 여겨서 참 좋다. 

 

 

몰라서 시작할 수 있었던 농사


“지역마다 날씨가 너무 달라 오는 길에 다채로운 풍경을 보게 되었”노라는 ‘도시 사람’의 관조하는 듯한 소리에 임흥옥 씨는 “요 근래에 날씨를 도무지 종잡을 수 없다.”고 ‘농부의 말’로 대답했다.
“26년째 농사짓고 있는데 최근엔 매년 기후가 너무 달라 ‘이상기후’라는 걸 느껴요. 기온이 뜨거워져서 못 보던 벌레도 많이 생겼어요. 이러다가 아열대로 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어요. 겨울이면 삼한사온이라고 사흘 추우면 나흘 덥고 이래 날씨를 예측했는데 요즘은 도무지 알 수 없어요. 2014년에는 12월 들어 계속 눈비가 내려서 땅이 질퍽하니 일을 할 수가 없다니까요. 양파밭에 김을 매야 하는데 밭에 들어갈 수가 있어야지.” 태어나고 자란 해남의 이런 급격한 기후 변덕은 임흥옥 씨에게 낯설기만 하다.
그는 젊을 때 부산에서 직장을 다닌 몇 년 빼고는 해남에서 지냈다. 객지 생활을 하면서 같은 직장에서 김필녀 씨를 만났다. 임흥옥 씨와 김필녀 씨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에게 이끌렸다. 인연이라는 게 묘해서, 절로 닮은 사람을 찾게 되었단다. 같이 다니면 오누이냐는 소리를 듣던 부부가 임흥옥 씨 고향인 해남으로 돌아왔을 때 농사에 뜻이 있던 건 아니었다. 시골에서만 살아 젊은 여자를 만날 일이 없는 남동생에게 도시에 가서 짝을 얻어 오라고 잠깐 자리를 바꿔치기한 것이 이렇게 눌러앉게 되어 버렸다.
김필녀 씨는 경상남도 하동 출신이다. 1987년 열아홉에 일곱 살이나 연상인 남편을 만나, 스무살에 생판 낯선 전라도로 왔다. 농사짓는 부모를 보고 자랐지만 김필녀 씨 역시 농사에 대해 몰랐다. 그러던 부부가 농사를 시작한 것은 먹고살기 위해서였다. “돌아보니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몰라서 시작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자연스럽게 농부가 된 걸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그들 말대로 농부가 천직인지 지금 고추며 깻잎, 세발나물, 시금치, 배추, 무 등 밭농사 4만 2천975㎡(1만 3천 평)과 논농사 5만 6천198㎡(1만7천 평)으로 규모가 꽤 큰 농사를 짓고 있다.

 



 

한창 노지 배추 수확 때이다. 이 배추가 김장김치로 변해, 겨울을 나게 하는 귀한 음식이 될 것이다. 12월 들어 해남에 눈비가 계속 와서 땅이 무척 질었다. 노지 채소를 심어 김을 매야 하는데 걱정이라고 했다.

 

 


농약 중독을 겪고 시작한 유기농사


1991년 처음에 농사를 시작할 때 임흥옥 씨도 남들처럼 농약이며 제초제를 뿌렸다. 당시 농약이 얼마나 위험한지 몰라 아무런 안전 장비도 갖추지 않고 농약을 쳤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이유 없이 힘이 쭉 빠지곤 했다. 손을 들어 인사할 힘도 없어, 아는 사람을 만나는 게 두려울 정도였다. 누워 있어도 천장이 뱅글뱅글 돌고 어지러웠다. 힘도 곧잘 썼고 나이도 고작 30대밖에 안 되는데 왜 그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후에 농약 중독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게 바로 농약 중독 증세라는 것을 알았다.
짓는 이에게도, 먹는 이에게도 농약이 안 좋다는 것을 몸으로 알았으니 농사를 바꿀 수밖에 없었다. 유기농사를 시작하면서는 어려움의 연속이었다. 막막했다. 풀을 일일이 호미로 매다 보니 몸이 힘들어 부부가 싸우기도 많이 싸웠다. 지금은 여유가 생겨 “풀 입장에서도 지가 커야지 어쩔 것이여. 나는 할 수 있는 만큼만 하고 맡기는 거여. 많이 차분해졌지.” 이런 경지에 오른 김필녀 씨도 처음엔 풀이 작물보다 더 빨리 자라 속상했다. 동네 사람들이 “훈이네는 마늘밭이 잡초에 다 묻혀 버려서 먹을 게 있을란가 몰라.” 하며 수군대는 소리도 듣기 싫고 마음이 조급했다.
1995년 정농회를 알게 되면서 유기농사에 힘을 얻었다. 2003년에는 임흥옥 씨가 정농회 해남지회 총무를 맡을 정도로 열심이었다. 2004년 한살림과도 연이 닿았다. 동료를 얻은 건 큰 힘이 되었다. 농사 경력이 짧든 길든 나이가 어리든 많든 옆 사람이 스승이고, 누구에게나 배울 것이 있다고 생각해서 무엇이든 귀담아 들으려고 한다. 그래서 농사 경력 이십 년을 넘긴 지금도 농사 기술에 관한 교육이 열리면 빠지지 않으려고 애쓴다. 그런데도 매번 새로운 상황에 맞닥뜨리곤 한다. 몇 년 전 4월에는 고추 모종이 다 얼어 한 해 농사를 망칠 뻔했다.
모종을 옮겨 심기 바로 전에 짱짱해지라고 비닐을 벗겨 놓았는데 새벽 사이에 모조리 얼어버린 것이다. 3천966㎡(1 천200평)에 심을 고추 모종을 모조리 버리게 생겼다. 관행 모종이야 어디서든 살 수 있지만 유기농 모종은 살 수 없어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고 심장이 벌렁벌렁 뛰었다. 1월에 고추씨를 뿌려서 기르기 시작하여, 저항성을 높이고 역병에 걸리지 말라고 열대지방의 야생고추와 접목한 모종이었다. 이웃들에게 전화하고 농업기술센터에도 살리는 방법을 문의했지만 모른다고 했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얼른 모종을 하우스로 옮기고 계속 물을 주었다. 해가 나니 다행히 모종이 살았다. “아무리 오래 농사해도 한 치 앞을 못 본다는 말이 딱 맞아. 그런 경험을 하면 더 조심하죠.” 김필녀 씨는 겸손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한창 일이 많을 때, 김필녀 씨는 더더구나 바쁘다. 일하다가 들어와 일꾼들의 밥을 뚝딱 해서 내놓고 다시 밭으로 일하러 간다고 했다. 힘흥옥 씨는 그런 아내가 고맙고 안쓰럽다고 했다.

 

 

 

군대 다녀온 사람이 군대 이야기를 하면 끝이 없듯 임흥옥 씨도 농사 이야기를 시작하면 끝이 없다고 했다. 유기농사를 하면서는 그저 사는 이야기를 하는 건데 이야깃거리가 풍성하다고.

 

 

자연은 사람을 배신하지 않아


“우렁이가 비아그라보다 나은 것 같아. 어느 정도 크면 교미하느라고 일도 못해. 알도 엄청나게 까고. 아마 천연 정력제로 지정해도 될 걸. 누가 조사 한번 해 보면 좋겠네.” 대여섯 해 오리농법을 하고, 미강농법을 거쳐, 2008년부터는 우렁이농법으로 벼농사를 짓는 임흥옥 씨가 농담을 던졌다. 예닐곱 해 동안 우렁이를 가까이서 지켜보고 하는 말이다.
오리농법으로 농사지을 때는 족제비가 오리를 물어 가서수백 마리가 하루에 다 죽기도 했다. 오리를 관리하는 데 신경을 써야 하고 사룟값도 만만치 않게 들었다. 또 오리는 가고 싶은 곳만 가기 때문에 방치된 곳에는 풀이 자랐다. 논에 미강(쌀겨)을 뿌려 미생물이 증식하도록 해서 산소 부족으로 잡초를 죽게 만드는 미강농법도 어려움이 있었다. 필요한 쌀겨를 사야 했고, 골고루 뿌리지 못하면 풀이 났다. 우렁이는 활동성이 엄청나, 안 가는 곳이 없어서 풀을 골고루 맨다. 그는 벼를 심어만 놓고 농약이나 제초제는 물론 유기물이나 퇴비도 안 준다. 그런데 땅이 힘을 찾으니 그 어느 논에서보다 건강한 쌀을 낸다.
“신기하지. 2~3년 전에 벼멸구가 돌았는데 희한하게 우리 논만 멀쩡했어. ‘여기는 유기농논’이라고 써 붙이는 것도 아닌데 벌레가 어찌 알고 안 왔을까. 다른 품종도 아닌데 멸구가 거기는 가고 여기는 안 왔어. 우리 논은 처음에 모를 심을 땐 보기엔 별로야. 잘게 안 심고 여유 있게 심으니 하늘하늘해 보이고 늦게 자라서 키도 작고. 그런데 어느 정도 크면 우리 것이 훨씬 왕성하게 자라. 관행 벼들은 일직선으로 크는데 벳모가지도 잘고 약해서 꼬부라져. 우리 벼는 부챗살처럼 펼쳐 가는데 벳모가지도 토실하니 굵고 태풍이 와도 넘어질 걱정이 없고 해충도 피해서 가고.”
임흥옥 씨는 “땅만 살리면 땅이 보답한다.”고 했다. 겨우 한두 해 유기농을 해 보고 유기농사는 절대 못한다고, 이 세상에 유기는 없다고 말하는 건 ‘수박 겉핥기’라고 했다. 오래 꾸준히 해 보고 땅의 변화를 느낀 사람 입에서는 그런 소리가 안 나온다고.
“내가 현미경을 들고 미생물을 살펴본 건 아니지요. 그건 학술적으로 연구하는 사람들이 하면 되고. 우리는 현실에서 느껴요. 오랫동안 농약 안 치고 그러면서 실질적으로 아는 거죠. 참 신비해요. 벌레도 병해도 우리 밭만 안 와. 설령 조금 온다 해도 작물이 금세 다시 뿌리를 내리고 큰단 말이야. 땅이 살면, 땅은 우리들이 해 준 것에 대해 보답해요. 약으로는 절대 병을 이기는 게 아니야. 땅만 살면 되어요.”
임흥옥 씨는 그래서 유기농이 더 편한 농사라고 했다. 땅을 살리면 땅이 알아서 하고, 한여름 뙤약볕 아래에서 농약을 치지 않아도 되니 그렇다고 했다. 물론 풀을 일일이 매야 하고, 땅을 살리기까지 힘이 들지만 그 정도로 땅의 힘을 믿는다는 말이었다. 땅을 살리는 농사를 하면서 김필녀 씨는 스스로 많이 변했다.
“한 만큼만 먹자고 생각해요. 욕심을 가지고 있으면 유기농을 절대 못해. 관행농에서는 만약 백 평에 작물을 심는다면 그걸 다 먹으려고 하잖아. 그러니까 유기농이 어렵지. 큰 목표를 세우면 안 되고 자연스레 해야 해요. ‘더 나오면 나오고 안 나오면 안 나온다. 이게 내 생활이다’ 라고 생각해야지 안 그러면 사는 것 자체가 힘들어요. 얽매이고 스트레스 받으면서 어찌 살겠어? 마음 비우고 한 만큼만 먹자고 해야지. 그래도 못 먹고 그런 적 없어요. 편한 것에만 길들여져서 편하게만 농사지으려고 하면 관행농에서 못 벗어나요. 유기농도 하다 보면 편해져요.”
그들을 따라 나선 배추밭에는 “올해 들어 해남에서 가장 추운 날”이라고 말하게 하는 모처럼의 칼바람이 불었다. “그래도 올해 배추농사가 잘 되어 제법 알이 굵어요. 사는 게 이게 행복인갑다.” 그런 이들에겐 잠시 지나는 한겨울 칼바람쯤이야 무에 그리 무서우랴.

 

 

스무살 중반인 작은아들 임지현 씨는 부모님과 함께 농사를 지으면서 배우고 있다. 임지현 씨 친구들 중에도 읍내에 사는 이들은 이앙기나 콤바인도 모른다. 농사짓는 사람들이 늙고 줄어드는 것을 보면서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농업대에 진학하겠다고 했을 때 오히려 부모님이 놀랐다. 지금은 참 든든하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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