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호 2014년 11월호 살림,살림

[ 책으로 떠나는 인문학 여행-폭력과 경쟁에 맞서기 ]

죽임의 정치와 정치의 죽음

글 하승우

‘애국어버이’들이 홍콩 시위를 보며 “저기도 ‘빨갱이’들이 있네.” 했다고 한다. 거참, 따지고 보면 중국 공산당 정부에 대항하는 시위이니 빨갱이들에 맞서는 시위 아닌가. 그런데도 시위만 벌어지면 무조건 빨갱이 때문에 나라가 망한다고 하는 분들, 아직도 우리 사회에 많다. 그런데 이들의 바람대로 빨갱이들이 사라지면 사회가 건강해질까?

 

왜 어떤 정치인은 다른 정치인보다 해로운가
제임스 길리건 지음 / 이희재 옮김
교양인 펴냄 / 2012년

신자유주의와 권력
사토 요시유키 지음 / 김상운 옮김
후마니타스 펴냄 / 2014년

자살과 살인을 증가시키는 보수정권


정신의학자 제임스 길리건은 “아니오”라고 외친다. 오히려 길리건은 “보수가 집권하면 왜 자살과 살인이 급증하는가?”라고 묻는다. 길리건은 《왜 어떤 정치인은 다른 정치인보다 해로운가》(2012)를 통해 미국에서 살인이나 자살이 늘어나는 시기가 모두 공화당 소속 대통령의 집권 시기와 겹친다고 지적한다. 왜 이런 결과가 나타나는 걸까?

 

길리건은 이 책에서 자살과 살인의 원인은 삐뚤어진 인성이나 불우한 성장배경, 나약한 의지가 아니라 바로 경제의 불평등이라고 지적한다. “해고는 살인이다”라는 구호가 있듯이 길리건은 “실업, 불황, 불평등이라는 서로 관련된 경제 변수 세 가지가 폭력 치사의 위험 요인이라고 생각할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다”고 주장한다. 문제는 이런 불평등이 보수세력의 집권 시기에 더 커진다는 점이다.

 

보통 경제를 핵심공약으로 내세우는 것은보수세력이지만 실제로는 이들이야말로 경제를 악화시켰다. “1900년부터 2010년 10월까지 미국은 민주당이 나라를 다스렸을 때보다 공화당이 정권을 잡았을 때 대략 3배 더 오래 불황을 겪었다. (중략) 불황은 공화당 대통령 때 17번 시작되어서 민주당 대통령 때 시작된 불황 6번의 3배에 육박했다.” 그런데도 왜 사람들은 공화당을 지지하는가? 불황으로 폭력이 늘어나면 “중상류층과 중하류층에 속하는 사람들도 저소득층에게 공포와 분노를 느끼면서 정작 나라 전체의 재산과 소득을 대부분 가로채는 것은 상류층이라는 사실은 알아차리지 못하고 넘어가는 것이다.” 한국의 상황도 그리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자살은 정치와 어떻게 연관될까? 길리건은 그 이유를 수치심에서 찾는다. 실직은 당사자와 그 가족에게 심각한 영향을 미치는데, “실직처럼 사람을 비참하게 만들고 버림받았다는 느낌을 호되게 안겨주는 경험도 드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경험은 수치 문화를 재생산하고, 사람을 우월한 존재와 열등한 존재로 나눠야 한다고 믿는 권위주의적 인격을 형성한다.

 

이는 평등주의적 인격을 파괴하며 폭력과 죽음을 불러온다. 결국 정치가 삶과 죽음의 경계를 가르는 역할을 한다는 주장이다. 길리건의 결론은 무엇일까? “21세기에 우리는 자살, 살인이라는 전염병을 막고 다스리려면 그런 전염병과 직접적으로 결부된 불평등, 치욕, 절망이라는 병인을 줄여서 청결한 정치·경제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그런 위험 요인에 이미 노출된 사람들을 치료하거나 처벌하는 데 우리의 한정된 자원을 쏟아붓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배울 필요가 있다.”

 

책에서 주장하는 내용들은 다소 치밀하지 못한 면들이 있지만 폭력이나 자살을 개인의 몫으로만 돌리고 처벌이나 감금을 강요하는 한국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지만 “이게 사는 건가”라는 말이 난무하는 한국사회는 살아남은 사람들에게도 끊임 없이 수치심을 강요한다. 그런데 공화당이 아니라 민주당을 택하는 선택만으로 정말 사회를 바꿀 수 있을까? 한국에서도 이런 논리가 먹힐까?



정치를 거세하는 신자유주의 권력



사토 요시유키의 《신자유주의와 권력》(2014)은 다른 각도에서 정치를 분석한다. 경제적인 것이 정치를 좌우하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권력은 개개인에게 직접 복종을 강요하거나 규율을 내면화시키지 않고 그들이 사는 환경에 개입한다. 즉 게임의 규칙을 설계하고 체제의 효율적인 작동을 꾀한다. 위기관리나 안전을 내세우는 신자유주의 권력은 “시장 원리의 내면화를 통해 자기-경영의 주체를 형성하고, 그런 주체 형성 모델에 적응할 수 없는 개인들을 가차 없이 사회 바깥으로 내던진다.”

 

신자유주의하에서 내몰리고 배제된 사람들은 법 밖의 사람들이다. 대한문이나 밀양, 강정마을에서 왜 경찰이 그토록 폭력적인가를 생각해 보면, 그들은 자신들이 법을 규정하는 치안의 담당자라 여기고 그에 반하는 자들을 비국민, ‘기민(국가로부터 버림받은 백성)’으로 여긴다. 경찰이 주장하는 법을 따르지 않는 순간 그것이 고착된다. ‘순수한 국민’이라는 규정을 거부하면 통치의 대상이 아니라 폭력의 대상이 된다.

 

이런 배제는 폭력만이 아니라 경쟁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경쟁이 자연스럽다는 우리의 인식과 달리 “신자유주의적 통치는 사회의 모든 국면에 경쟁 메커니즘을 구축하고 그에 따라 사회를 통치하려고 한다.” 즉 국가가 나서서 경쟁체제를 만들고 사영화(민영화)처럼 경쟁이 필요치 않거나 경쟁하지 않던 영역에도 경쟁 논리를 강요한다. 이윤을 위해 노동을 유연화시켜 실업을 예외 상태가 아니라 정상 상태로 만든다. 그렇게 불평등한 경제체제를 만들고 그에 대한 책임을 개인의 몫으로, 즉 열심히 일하지 않은 ‘당신 탓’으로 돌린다. “사회적인 것의 해체가 산출하는 정치적 공백을 통해 사회체의 구석구석까지 시장원리와 경쟁원리를 채우는 신자유주의의 통치기법이다.” 사회를 시장으로 대체하려는 이 통치에 어떻게 맞서야 할까? 공화당에서 민주당으로 갈아타는 것으로 저항이 가능할까?

 

요시유키의 해법은 무엇일까? 그는 “다수자성에 속하는 사람이 항상 스스로를 소수자성으로 계속해서 생성 변화시키고, 소수자성에 속하는 사람들조차도 항상 생성 변화와 탈복종화를 계속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나 스스로 소수자의 위치에서 그들과 손을 잡고 소수자들도 끊임없이 권력이 요구하는 복종이나 사회적 배제에 맞서는 것, 그것만이 가능한 정치라고 주장한다.

 

“이제 나는 다를 거야”, “나는 열심히 사니까”, “나는 저들과 달라” 이런 말들로 위안을 삼을 시기는 지나갔다. “나도 위험하고 너도 위험해”, “열심히 살아도 우린 매트릭스 속에 갇혀 있어”, “내가 바로 저들이야”라는 자각과 이렇게 자각한 사람들의 조직화가 정치의 죽음에 종언을 고하고 다시 정치의 심장을 뛰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우리 모두가 강정이고 밀양이고 청도이다”, “우리가 노동자이고 농민이다”라는 구호가 필요한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 하승우 님은 풀뿌리자치연구소 이음 운영위원으로 풀뿌리민주주의와 아나키즘, 자치와 공생의 삶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사회의 모순과 잘못을 지적하기 위해 날카롭고 까칠해야 하지만 삶의 방향은 우정을 향해야 한다고 믿는 ‘까칠한 로맨티스트’입니다. 오랜 수도권 생활을 접고 충북 옥천으로 가 자치와 자급의 삶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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