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호 2014년 9월호 살림,살림

[ 안녕하세요 ]

“핵의 피해는 대물림 되어요” 한국원폭2세환우회 한정순 회장

글 김세진 편집부 \ 사진 이득



한국원폭2세환우회(환우회) 한정순 회장은 ‘눈물 젖은 라면’을 먹어본 사람이다. 서 있지 못할 정도로 아픈 몸을 억지로 일으켜 생계를 책임지고, 뇌성마비 자녀를 뒷바라지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아픈 사람, 없는 사람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안다. 몇 달 전, 그를 만나러 나섰다가 몸이 안 좋아 아무래도 되돌아가야겠다고 급작스레 전화를 걸었는데 “몸은 괜찮나? 건강해야 뭘 해도 한다. 미안해 하지 말고 푹 쉬어라”고 했던 그다.

 



 

한정순 씨는 원폭 2세들 이야기를 하면서 많이 울었다. 이토록 호탕하게 웃을 줄 아는 그의 얼굴을 앞으로 더 많이 보고 싶다.

 

 

경남 합천에 있는 ‘평화의 집’은 1945년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질 때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자녀들, 즉 원폭 피해자 2세를 위한 공간이다. 여파가 대를 이어 나타나고, 2세 중 많은 사람이 이런저런 병을 앓고 있다. 원폭 피해자 1세들은 1992년부터 부족하나마 일본 정부에서 보상금과 병원비를 지원받고 있지만 2세들은 아직 사각지대에 있다. 한국에 2세 환우들은 7천 명 정도이고 그중 스스로 2세임을 드러내고 환우회에 속한 사람은 1천 300여 명이다.
평화의 집을 찾아갔을 때 마침 미술 심리치료가 열려서 환우회 회원들이 와 있었다. 한정순 씨는 점심으로 낼 국수에 얹을 달걀을 부치고 호박을 채 썰면서도 틈틈이 미술 치료 선생님에게 회원들이 어떤 그림을 그렸는지 물었다.
“우리 회원들이 내가 하는 밥을 좋아해요. 나도 밥 한 끼는 꼭 해 줘야지 하는 마음이 있고. 혼자는 챙겨 먹지도 않고 맛도 없지만, 별거 아니라도 이렇게 같이 먹으면 맛있잖아. ‘국수 한 그릇의 행복’이라고 알아요? 엊저녁부터 육수를 만들어 놨지. 면발도 아주 오돌오돌하게 잘 삶았는데 기자님이 자꾸 말을 거는 바람에 불었잖아. 안 그러면 더 맛있을 텐데….”



발로 걷지 못하면 손바닥으로


지금은 이렇게 건강하게 회원들을 챙기지만 한정순 씨도 이전에 많이 아팠다. 인공관절을 넣는 수술을 하고서야 다시 걷게 되었다. 병명은 대퇴부무혈성괴사증. 대퇴부 쪽으로 피가 돌지 않아 뼈가 썩는 병이다. 중학교 때부터 나타난 증세가 시간이 지날수록 심해져 생활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다리 통증이 너무 심해 손바닥으로 방바닥을 밀어야만 움직일 수 있을 정도였다. 덕분에 그의 손바닥엔 굳은살과 피딱지가 생겼다.
“큰아들이 뇌성마비로 태어났어요. 남편과 이혼하면서는 스스로 생계를 유지해야 했어요. 남의 집에서 빨래를 했는데 쪼그려 앉을 수 없어서 그냥 욕실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 일했죠. 너무 힘들어 죽으려고도 했어요. 먹고 같이 죽을 생각을 하고 마지막 남은 라면을 끓여서 아들 입에 넣어주는데 눈물이 났어요. 후드득, 자기 얼굴에 눈물이 떨어지는 게 신기했는지 아이가 까르르 웃더라고요. 그걸 보고 ‘아이가 무슨 죄인가’ 싶어 마음을 고쳐먹었죠.”



여섯 형제자매 모두 아파


어려운 시절을 겪은 건 한정순 씨만이 아니었다. 그의 형제자매들도 어릴 때부터 아팠다. 한정순 씨의 첫째 오빠는 일본에서 태어나자마자 죽었다. 한국에서 태어난 첫째와 둘째 언니는 뇌경색, 셋째 언니는 한경순 씨와 같은 대퇴부무혈성괴사증, 그 아래인 오빠는 심근경색과 협심증이고, 막내 동생은 30대에 이빨이 전부 내려앉았다.
“형제들끼리 모이면 이야기했어요. 핵폭탄이 떨어질 때 부모님이 히로시마에 있었던 탓에 우리가 아픈 게 아닐까 하고. 막연하게 그리 생각한 거죠. 어머니는 우리가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걸 싫어해요. 자녀들이 자기 때문에 아프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은가 봐요. 우리는 원망하지 않는데.”
1945년 8월 6일 원폭 투하 때 한정순 씨 부모는 히로시마에 살고 있었다. 돈을 벌기 위해 가족이 일본에 건너갔던 것이다. 투하 당시 집이 무너지는 바람에 한정순 씨 어머니는 벽에 깔렸고 척추가 휘어 평생 고생했지만 다른 병을 앓지는 않았다. 이후 한국에 돌아왔고 지금껏 살아 있는 한정순 씨 형제들은 모두 한국에서 태어났다.
한정순 씨도 2004년 텔레비전에서 <해방 59년 끝나지 않은 식민지의 고통, 원폭 2세>라는 다큐멘터리를 보고서야, 고통의 원인을 명확하게 알았다. 다큐를 통해 알게 된 원폭2세환우회 모임에도 한걸음에 달려갔다. ‘이런 아픔을 겪은 게 나 혼자만이 아니다’는 걸 알고 위안을 받았다. 환우회 2대 회장인 정숙희 씨는 한정순 씨와 병명도, 증상도 똑같았다. 이들을 만나면서 한정순 씨는 다른 사람을 위해 살고 싶어졌다. 2005년부터 환우회 총무로, 2008년부터는 회장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내게도 일어날 수 있었던 일


“환우들 중에 힘들고 어려운 사람이 참 많아요. 40~50대 중에는 희귀병을 앓는 사람이 많은데 치료를 못 받아 일찍들 죽어요. 20~30대에는 정신질환이 있는 경우가 많아요. 가정방문을 하면 별일이 다 있어요. 중환자실에서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병원비를 걱정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관절염 때문에 손과 발 마디가 퉁퉁 부어오르다가 변형되었어요. 임신만 하면 유산되는 이도 있고. 이야기하다가 서로 부둥켜안고 엄청 울어요.”
한정순 씨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그는 특히 힘든 사정을 알 만한 사람들이 냉대하면 속상하다고 했다. 원폭 피해자 1세들 중에는 ‘한국원폭2세환우회’라고 찍힌 우편물을 집에 보내지 말라는 사람도 더러 있다. 원폭 피해가 대를 이어 나타난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하며 “알려지면 혼삿길만 망친다”고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원자폭탄이 일본에 떨어졌는데 왜 한국 사람들이 피해를 입었냐?”고 묻기도 한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기운이 빠진다. 이렇게나 모르는 것이 놀랍다.
1940년대에 일본에 간 사람들 중에는 스스로 일하려고 간 사람들도 있지만, 강제 징용으로 끌려간 사람들도 많았다. 그 역사를 ‘남의 일’ 취급하는 사람들을 보면 속이 상한다.
그가 바라는 건 거창하지 않다. 그저 함께 밥을 먹고 생활하는 공간이 있으면 좋겠다. 원폭 1세들이 모여 사는 ‘합천원폭피해자복지회관’ 같은 곳이 2세들을 위해서도마련되면 좋겠다. 환우회 회원 중에는 홀로 생활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많다. 언제까지나 부모가 그들을 돌볼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 정신지체장애인들이나 몸이 아픈 사람들이 모여 살면 서로 의지도 되고, 실질적으로 독립할 수 있을 것이다.
환우회는 ‘원폭 피해자 및 피해자 자손 지원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원폭 피해자 2·3세에게 먼저 의료· 생계를 지원하고 후에 진상을 규명한다는 내용이다. 그나마 2012년에 합천군과 경상남도에서 ‘원자폭탄 피해자 지원조례’가 통과되어 치료에 힘을 보태고 있지만 아직 역부족이다.
“핵은 정말 무서운 거예요. 저는 4대째 대를 이어 피해 입은 사람도 보았어요. 핵은, 시작이 어디인지 알지만 끝을 알 수 없는 무서운 대물림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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