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호 2014년 8월호 살림,살림

[ 책으로 떠나는 인문학 여행 ]

전쟁과 평화 공존은 어떻게 가능한가?

글 하승우

얼마 전 언덕에서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폭격을 관전하며 환호하는 이스라엘 청년들의 사진이 인터넷을 떠돌았다. 그리고 악마를 보았다, 전쟁을 즐기는 사람들, 지옥 등 이런 비난도 뒤를 따랐다. 맞는 말이다. 어떤 논리나 감정을 빌려 와도 저 장면을 정당화시킬 수 없을 것이다.

 

“그 아기들이 자라서 우리한테 폭탄과 총탄을 퍼부을 텐데요”

 

그런데 비난은 하더라도 저들이 타자의 죽음을 즐기게 된 이유도 밝혀야 한다. 그래야 그 다음을 이야기할 수 있다. 그리고 냉정하게 따지면 우리 역시 살육을 조장하는 영화, 게임, 미디어 속에 살고 있지 않은가? 우리 역시 세월호 참사 유가족을 수없이 모욕하는 사회에 살고 있지 않은가? 우리 사회에서도 일본의 재난에 환호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이젤딘 아부엘아이시는 팔레스타인 출신의 산부인과 의사이다. 뛰어난 의사이기도 했지만 그가 주목을 받은 건 2009년 1월 이스라엘의 로켓 공격으로 세 딸을 잃은 뒤에 《그러나 증오하지 않습니다》(2013)라는 책을 쓰면서였다. “내 딸들이 마지막 희생자가 되어야만 합니다.”라는 그의 호소는 전 세계 스무 개의 언어로 퍼졌다.

 

이 책은 이젤딘이 살았던 가자 지역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가자 지역을 이해하지 않으면 이젤딘이 딸들의 죽음에도 증오가 아닌 공존을 택한 이유를 알 수 없다. 가자지역에는 “8개의 난민 캠프와 두 도시, 가자 시티와 자발리아 시티”가 있다. 이젤딘은 자신이 살았던 가자 지역을 “지평선에는 이스라엘의 무장 항공기가 떠 있고, 머리 위로는 헬기가 날아다니고, 지하에는 이집트로 통하는 숨 막히는 밀수 터널이 뚫려 있고, 길에는 유엔의 구호 트럭이 다니고, 건물은 부서져 있고, 기반시설은 훼손되어 있는 곳”이라 묘사한다.

 

물자도 부족하고 제대로 교육도 받을 수 없고 일자리도 없고 지역을 넘나들려면 수차례 검문소를 통과해야만 하는 곳에서도, 이스라엘 탱크의 순찰을 위해 수백 채의 집을 불도저로 밀어버리는 곳에서도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살아야만 했다. 그러니 사는 것 자체가 증오를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는 조건이다.

 

이 책에서 서로를 바라보는 극단적인 심성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 이야기는 가자지역 동료들의 말이다.
“‘유대인 여자들의 출산을 왜 돕는 거죠? 그 아기들이 자라서 우리한테 폭탄과 총탄을 퍼부을 텐데요.’ 이를 악물며 이런 말을 하는 이도 있었다. ‘당신이 그런 일을 한다니 너무 화가 나는군요.’ 어떤 이들은 내가 새로운 점령군 세대의 탄생을 돕고 있다고 했다.” 동료들의 말에서 우리는 농도는 다르지만 테러리스트를 낳고 기르는 엄마도 죽여야 한다는 이스라엘 의원의 감정을 느낄 수 있다.

 

난민 캠프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밥벌이를 해야 했던 이젤딘도 이런 증오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지만 바로 그 때문에 그런 조건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그러려면 이스라엘과 함께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근본적인 신뢰나 유대감이 전혀 없기 때문에 이젤딘은 “팔레스타인인과 이스라엘인이 함께 발전하는 길은 풀뿌리 수준에서 공존하고 협력하며 제휴하고 공유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말한다. “서로에 대한 무지와 싸”우고 “심리적·물리적 장벽을 무너뜨려야 한다.” 지극히 정당한 이야기이다. 그러하기에 불순한 현실에 사는 우리는 이 정당성을 의심하게 된다.

경제논리에서 벗어나 머리와 생활이 함께 바뀌어야

따지고 보면 우리도 그러하지 않은가? 한국과 일본의 공존을 말하지만 마음 속에는 적대감이 숨어 있다. 서로 총칼을 겨눴던 남북한은 어떤가? 탈북자가 아닌 북한 주민들을 우리는 정녕 동포로, 공존의 대상으로, 나와 동등한 주체라고 여기는가? 서로의 속마음을 들어보고 그들이 생활하는 상황을 직접 보지 않으면 공존은 매우 어려운 과제이다. 어떻게 하면 그 벽을 무너뜨릴 수 있을까? 네가 먼저 벽을 무너뜨려야 한다고 위협하는 방식으론 불가능하다. 결국 내가 바뀌어야 하고 경제 밖으로 침투한 경제논리에서 벗어나고, 머리와 함께 생활이 바뀌어야 한다.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2002)의 저자로 알려진 더글러스 러미스와 《슬로 라이프》(2005)의 저자인 쓰지 신이치의 대담을 기록한 《에콜로지와 평화의 교차점》(2010)은 평화란 경제활동을 억제할 때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군수산업을 포함한 경제 그 자체가 일종의 전쟁이라는 인식”을 해야 자연에 대한 전쟁, 인간에 대한 전쟁을 중단시킬 방법을 개인이 찾을 수 있다. 내가 한들 어쩌랴 하는 무력감에서 벗어나 삶의 변화와 구조적인 변화를 연결시키려면, “자기가 살고 있는 사회를 전쟁 상태에서 평화 상태로 전환하는 운동에 참가”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텃밭에서 뭔가를 심어서 더 이상 타자를 착취하지 않는 농적인 생활에서 시작될 수도 있다. 우리 삶이 그러하듯 생태와 평화도 분리되지 않는다.

 

이들의 이야기도 무척 점잖게 들린다. 그런데 이들의 이야기에는 타자에 대한 인정이 깔려 있다. 내가 열심히 사니 다른 이들도 모두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폭력이 빠져 있다. 외려 “회사에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의 노고와 노력을 이해하고, 그 위엄을 인정하면서 논의할 수 있는 형태로 어떻게 비판할 것인가”라며 러미스는 자기 정당성만 가진 논리들을 비판한다. “아무것도 모른다”, “말이 안 통한다”는 말은 타자를 향한 게 아니라 사실 자기만족에 빠진 자기 자신을 향한 말이어야 한다.

 

그래서 정당한 논리일수록 배제당한 사람들의 삶을 외면하지 않도록 자꾸 뒤를 돌아봐야 한다. 예를 들어, 가난의 고통은 결핍만이 아니라 “상사가 아무리 보기 싫어도 이를 악물고 일해야 하고, 경멸당하고 무시당”한다는 점에서 온다. 위계적인 인간관계에서 상처를 받기 때문에 가난은 고통스럽고 자신을 경멸하게 만든다. 서로 상처를 주고받지 않고 위계적인 관계를 지배하려 들지 않고 그것을 깬다면 조금 더 공존에 가까워지지 않을까?

 

현재 한국을 둘러싼 환경은 만만치 않다. 중국을 견제하려고 주한미군에 미사일방어체계(사드, THADD)를 배치하려는 미국, 패권 의지를 가진 러시아, 일본과 중국의 충돌까지 예상하면, 동북아시아는 최고위험지역이다. 그럴수록 강대국을 동경하거나 안으로 움츠리지 말고 더 밖으로 가슴을 열어야 한다.



<그러나 증오하지 않습니다>
이젤딘 아부엘아이시 지음
이한중 옮김
낮은산 펴냄
2013년


<에콜로지와 평화의 교차점>
C. 더글러스 러미스, 쓰지 신이치 지음
김경인 옮김
녹색평론사 펴냄
2010년



↘ 하승우 님은 풀뿌리자치연구소 이음 운영위원으로 풀뿌리민주주의와 아나키즘, 자치와 공생의 삶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사회의 모순과 잘못을 지적하기 위해 날카롭고 까칠해야 하지만 삶의 방향은 우정을 향해야 한다고 믿는 ‘까칠한 로맨티스트’입니다. 오랜 수도권 생활을 접고 충북 옥천으로 가 자치와 자급의 삶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http://www.salimstory.net/renewal/sub/view.php?post_id=10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