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호 2014년 7월호 살림,살림

[ 책으로 떠나는 인문학 여행 ]

상실의 시대에 성장은 가능한가?

글 하승우

한때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상실의 시대》가 유행이었다. 이제는 나오코, 와타나베, 미도리 같은 등장인물 이름이나 “지금 어디에 있는 거야?”라는 마지막 대사만 생각나고 줄거리는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당시 분위기는 느껴진다. 방황과 혼란, 뭐 이런 분위기가 당시 청년들의 감성을 자극하며 소설을 베스트셀러로 만들었다.

 

 

로스트 제너레이션 심리학
구마시로 도루 지음
지비원 옮김
클 펴냄
2014년

 

 

왜 젊은이들은 ‘썸타기’를 하는가


그 시대를 살던 청년들은 이제 기성세대가 되었고, 지금의 청년들도 방황과 혼란, 상실감에 시달리고 있다. 비슷한 감정이니 서로가 서로를 잘 이해할까? 드러난 현상으로 보면 그렇지는 않다. 외려 기성세대는 청년들의 반응을 잘 읽지도 못한다. 한때 《88만원 세대》(레디앙, 2007)가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지만 그건 기성세대와 청년세대의 ‘썸타기’ 정도였다. 2013년 말 철도 파업을 계기로 터져 나온 ‘안녕들 하십니까’ 열풍(이 내용은 《안녕들 하십니까?》(오월의봄, 2014)라는 책으로 묶이기도 했다)이 다양한 목소리를 드러냈지만, 우리는 보통 자기 식대로 목소리를 해석하니까. 그러니 이해는 불가능하다.

 

옆 나라 일본에서는 ‘로스트 제너레이션’이라는 말이 유행이라 한다. 구마시로 도루의 《로스트 제너레이션 심리학》(클, 2014)은 1970년대에서 1980년대 전반부에 태어난 세대, 소위 사다리를 걷어차인 세대를 분석한다. 저자는 무겁지 않게 이야기를 풀며 이 세대의 특성을 진단한다. 풍요를 들어서는 알고 있으나 경험하지는 못한 세대, 자아가 강하지만 그걸 표현하는 방법은 모르고 혼자 놀기의 달인이 된 세대, 제대로 나이 먹는 법을 잊어버린 세대, 이 세대는 고독하다.

 

그래도 이 세대는 방황하고 혼란스러워 하지 않는다. 성공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대신에 자기 속으로 깊이 빠져든다. 구마시로의 설명을 듣다보면 ‘썸타기’의 실체를 잘 이해하게 된다. 이 세대는 “특정한 이성 때문에 내가 얽매인다는 자각”을 버리고 “이성을 매개로 하여 자기도취에 빠지고 싶은 바람”을 가진다. 그래서 “자기 힘으로는 제어가 불가능한 이성보다는 순종적이고 제어 가능한 이성”을 선호한다. 이들은 절대로 “‘실패하거나 좌절할 위험이 있는 도전’을 하지않는”다.

 

책에서 흥미로운 부분은 자기애의 변화이다. 풍요로웠던 1980년대, 90년대 초반의 소비가 워크맨이나 컴퓨터 등으로 자기애를 충족시켰다면, 경제적인 여유가 없어진 90년대 청년세대는 자기만의 맛집으로 자기애를, 지금의 청년세대는 자기만의 가상게임이나 인터넷으로 자기애를 충족시킨다. 특히 자기애를 판매하는 지금의 다양한 상품들은 자기 것만 고집하는 취향을 강화하고, 결국 소통보다는 고집이 취향을 정당화한다. 이런 사회에서는 인간의 성장이 중단된다. 구마시로는 “젊은이이기를 그만두”고 “성장과 발달의 방식, 힘을 쏟을 곳을 변화시”키자고 제안한다. 센 척, 젊은 척 그만하고 주위를 한번 돌아보자는 거다.

 

청년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는 좋은 책인데, 뭔가 뒤끝이 찜찜하다.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기성세대는 자신을 닫아버린 이 세대와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할까?

 

 

절망의 시대를 건너는 법
오카다 도시오, 우치다 타츠루 지음
김경원 옮김
메멘토 펴냄
2014년

 

밥을 나누는 생존술


이런 고민을 도와주는 책이 있다. 사장이 아니라 사원이 월급을 내고 책을 내거나 이벤트를 진행하는 ‘FREEex’라는 회사를 경영하는 오카다 도시오, 대학교수이자 무도와 철학을 배우는 공간을 운영하는 우치다 타츠루(국내에는 《하류지향》(민들레, 2013)으로 많이 알려졌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담은 《절망의 시대를 건너는 법》(메멘토, 2014)이다.

 

둘은 대놓고 로스트 제너레이션 담론을 비판하면서 특정 세대보다 떼 지어 몰려다니지만 일이 생기면 뿔뿔이 흩어지는 ‘정어리 떼’ 같은 사회가 문제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로스트(lost)가 뜻하는 ‘과거의 풍요’란 존재하지 않았다고 본다. 1930년대의 대공황, 1960년대의 세계대전과 핵전쟁에 대한 공포, 1980년대 버블경제, 즉 등 따시고 배불렀던 시대, “현재의 노력은 반드시 미래에 보상을 받는다는 약속이 있었던 시대”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거다.

 

지금의 문제는 지나친 성과주의, 교양 없는 사회, 기분에 지배되는 ‘못해먹겠다 증후군’, 보람을 잃어버린 삶이지 상실이 아니란 거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우치다는 무도에 빗대어 방법을 설명한다. 왜냐하면 무도는 보상을 유예하지 않고 “동작을 연마하는 사이에 이미 즐거움을” 느끼는 활동, 자기를 알아가는 활동이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에 상실된 것은 정신이나 감정이 아니라 자아를 살찌울 수 있는 공동생활과 증여경제이다.

 

“지금 당연한 듯이 여기고 살아가는 문명적인 공간은 누군가 필사적으로 무질서를 세계 밖으로 쫓아내준 덕분”이다. 그러니 우리는 서로에게 감사하고 선물을 나눠야 한다. 마찬가지로 기성세대는 다음 세대에게 아낌없이 베풀어야 한다. 옛날 식객을 두듯이 사람을 길러야 한다. 그러면서 “스스로 배우는 시스템을 발견”하도록 하고 끊임없이 답을 찾아 가자는 거다.

 

특히 우치다는 공동 ‘생활’이 중요하다고 본다. “관념으로 맺어진 관계는 하룻밤에 우루루 무너지지만, 함께 기거하며 쌓아나간 관계는 쉽게 부서지지 않아요. ...신체를 기본으로, 생활을 기본으로 삼는 관계는 타성이 강하니까 손쉽게 변하지 않아요.” 일단 어울려 살다보면 자연스럽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경제란 단지 먹고사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성숙을 위한 일이다.

 

말만 많은 멘토를 버려라


물론 절망의 시대를 건너는 법이 이것 하나일 수는 없다. 자기애를 즐기며 살아온 사람에게 공동체가 매혹적인 유혹이라면, 이미 공동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에게 공동체는 탈출하고픈 곳일 수 있다. 함께 절망을 건너더라도 가끔씩은 혼자 앉을 의자가 필요하다.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보여주기, 우리 시대의 진정한 스승은 말이 아니라 삶으로 가치를 드러내야 한다. 말 많은 멘토들이 사회를 한 치도 바꾸지 못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절망의 시대를 건너려면 누군가는 노아의 방주를 만들어야 한다. 삶과 경험을 공유하되 낯선 것을 배제하지 않고 다음 세상을 위해 두루 태우는 방주를.

 

↘ 하승우 님은 풀뿌리자치연구소 이음 운영위원으로 풀뿌리민주주의와 아나키즘, 자치와 공생의 삶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사회의 모순과 잘못을 지적하기 위해 날카롭고 까칠해야 하지만 삶의 방향은 우정을 향해야 한다고 믿는 ‘까칠한 로맨티스트’입니다. 오랜 수도권 생활을 접고 충북 옥천으로 가 자치와 자급의 삶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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