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호 2014년 7월호 살림,살림

[ 땅땅거리며 살다-전남 담양 대숲공동체 한현미·김동주 씨 ]

“기계는 척척인데 뱀이 무서워”

글 김세진 편집부

“내가 감농사지어서 하는 얘기가 아니고, 언제부턴가 사과랑 배가 이상하게 안 달아요. 감은 진짜 많이 먹거든요. 그런데 늘 맛있고….나이 들어서 단 게 좋은가?” 전남 담양 대숲공동체에서 감농사짓는 한현미 생산자의 표정이 진지했다. 그는 농사가 천직이라 생각한다. 힘들기는 해도 다른 일 할 생각을 한 번도 안 해 보았고 그 일이 너무 좋아서다.

 


 

 

자꾸 보면 닮는다더니 정말 그런 걸까? 감이 변한 건지, 그가 변한 건지 한현미 씨의 건강한 혈색은 그러니깐 윤기 좔좔 흐르는 감빛깔과 닮아 있었다.

 

 

대나무가 유명한 지역 아니랄까봐 담양에 들어서자, 가로수마저 대나무였다. 이런저런 나무들 사이로 대나무도 자연스레 섞여 자란 것 같았다. 선비들이 유배 왔던 지역이라 꼿꼿한 나무들이 저리 흔한 것일까? 산자락을 휘감아난 길을 따라 언덕을 넘어 안쪽으로 조금 더 가자 마을이 펼쳐졌다. 사방이 산에 둘러싸여 있어서 은신처 같기도 하고 아기자기한 아름다움이 있는 이 곳은 시목마을. 한문을풀면 감나무마을인 이곳에서 한살림 생산자들이 정말 감농사를 짓고 있다.
한현미 생산자는 오토바이를 타고 나타났다. 일하다가 우리가 도착했다는 전화를 받고 서둘러 오는 길이라 했다. 쭈그려 앉아 길가에 핀 잡초를 보며 이것은 산딸기, 저것은 비름 하면서 ‘온통 먹을거리들이네’ 생각하고 있던 나는 조금 놀랐다. 오토바이가 다가와 방향을 잡고 멈추는 동선, 흙 묻은 작업복을 입고 빨간 장화를 신고 내리는 라이더의 모습이 꽤 근사했다. 말은 안 했지만, ‘멋있다!’
그는 시원하게 악수를 청하더니 집 안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그리고 얼린 대봉을 내왔다. 이번에는 참지 못하고 ‘우와’ 소리를 내고 말았다. 어쩌다 맛본 뒤로 매년 가을에 대봉을 얼리는 시도를 하지만 길게 가야 겨울날이면 없어져버리고 말지 않았던가? 더운 날 얼린 대봉이라니. 그것은 이가 시리게 사각거렸고 입에 넣자 바로 목으로 넘어갈 정도로 부드럽고 달았다. 그러고 보니 윤기 좔좔 흐르는 감빛깔은 한현미 씨의 건강한 혈색과 닮아 있었다.

 



 

 

 

 

 

 

 

 

 

 

(좌)김동주 생산자의 어머니 권애순 씨가 손수 밥상을 차려 주었다. 부엌과 집앞 텃밭은 어머니 담당, 농사일은 김동주 씨와 한현미 씨 담당이라고 했다. 손님이 왔다고 평소에 먹던 잡곡밥 대신 하얀 쌀밥이 나왔다. 집앞 텃밭에서 손수 농사지은 열무며 감자며 갓이며, 기르는 닭이 낳은 달걀이 밥상에 올라와 순식간에 두 그릇을 비웠다. (우)얼린 대봉을 한 수저 떠 입안에 넣었다. 이가 시리게 사각거렸고 혀에 닿자마자 바로 목으로 넘어갈 정도로 부드럽고 달았다. 올여름 첫 호강이다.

 

 

손해 보고 말아 삐는 우직한 농사


한현미 씨는 1988년 스물일곱 되던 해 김동주 씨와 혼인하여 시목마을로 왔다. 혼인을 얼마나 서둘렀는지 신혼여행을 다녀온 뒤에야 시목마을에 처음 와 보았다. 차로 20분 거리인 창평에서 나고 자랐으면서도 못 와 본 마을이었다. 당시 시목마을은 포장도로가 없어 소나무가 우거진 오솔길을 지나야 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김동주 씨를 소개받을 때 한현미 씨는 홀로 서울에서 10년째 직장생활을 하며 돈을 벌고 있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어머니를 여의고 할머니 곁에서 자란 그는 세 동생의 맏이 노릇을 톡톡히 했다. 한현미 씨는 김동주 씨가 고향 근처에 사는 것도, 첫인상이 선한 것도 좋았다. 두 사람은 얼굴을 본 지 보름만에 혼인했다.
시골 농부와 결혼하려는 사람이 없어 서른 셋까지 홀로였던 김동주 씨는 여섯 살 아래 신부를 맞았다. 김동주 씨는젊은 시절 잠깐 마을을 떠나 인근 도시에서 타이어를 실은 7~8 t 트럭을 운전하는 일을 했지만 아무래도 농사일이 좋아 고향으로 되돌아왔다. 한땅에서 자라고 농사도 지어 시목마을이라면 땅과 사람까지 잘 아는 그를 마을사람들이 신뢰했다. 더구나 시목마을은 금령 김씨 집단촌인데다 김동주 씨는 항렬이 높은 편이었다. 그는 젊을 때부터 이장일을 하며 마을 살림을 맡았고 군농업경영인회 부회장도 했다. 그리고 2002년부터 12년 동안 군의원과 도의원을 지냈다. 정치에 뜻이 있던 게 아니었기에 세 번을 거절했는데, 사람들이 농촌은 농부가 지켜야 한다며 강권했다.
친구가 저녁 먹으러 오라고 해서 간 자리에서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다가 그를 설득했다. 그렇게 의원이 된 그는 필요한 곳에 수로를 놓고 유기농명인지원조례 등도 만들어 친환경 농사를 계속할 수 있는 바탕을 만들었다. 그러면서도 시간 나는 대로 농사를 계속했다.
“정치를 하면 다들 목에 힘이 들어가고 껄렁껄렁하게 다닌다고들 하는데 저이는 안 그랬어요. 낮에 일을 보고 저녁에 와서 논두렁도 만들고 울타리 치고 모쟁이 하고…. 바지런한 게 어느 정도냐면, 사람들하고 모임하고 어쩌다 술이 떡이 되어 새벽에 집에 들어와도 다섯 시면 일어나서 소 밥을 줬다니께. 한 번도 나한테 대신 소 밥 주란 소리 안 해. 진짜 그건 대단해.”
가족들은 가족들대로 매사에 조심했다. 새로운 농기계가 들어오면 정부 지원을 받을 수도 있는데 혹여나 문제가 될까 신청도 하지 않았다. 올해 26살인 첫째 김미영 씨 아래두 살 터울씩 3녀 1남의 자녀가 있으니 농어촌다자녀 신청을 하면 고등학교 등록금 면제 받을 수도 있었는데 그것도 마다했다. 번번이 “내가 좀 손해 보고 말아삐지” 이렇게 생각했다. 그 정도로 우직했다.
남들이 어렵다고 회피하는 유기농사를 짓는 것도 그 우직함 때문일는지 모른다. 시목마을에서 나고 자란 동갑내기 라상채 씨와 김동주 씨는 2000년 함께 논농사를 유기로 시작했다. 라상채 씨는 농약 때문에 몸이 아팠고, 김동주씨는 친환경농업교육관에서 하는 교육을 받고 유기농사를 결심했다. 두 사람은 쌀겨농법이니 EM당밀농법이니 우렁이농법 등을 배우러 전국을 돌아다녔다. 서울 가락동공판장에서 종이상자를 깔고 자면서 정진영 씨와 유달영 씨의 강의를 들었고, 조한규 씨의 자연농법 교육을 받으러 부부가 같이 가기도 했다.
유기농사를 먼저 시작한 두 가족은 2002년 시목마을이 유기농 시범 마을로 선정되기까지 밤마다 이웃을 설득하러 다녔다. 수확량이 적고 힘든 친환경농사를 왜 지어야 하는지 마을 사람들은 처음에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후 감농사를 하면서도 남들이 다 관행농으로 지을 때 저농약을 시작했다. 한살림광주지부가 생기던 2004년, 마을에서 12농가 중 5농가가 저농약 감농사를 시작했다. 몇 년 전부터 이들 중 4농가가 유기농 감농사를 짓고 있다.

 

 

한현미 씨는 스스로 게으른 농부라 했다. 시골에서는 보통 새벽 네 시에 일어나 하루를 시작하는데 자기는 여섯 시에야 일어난다고. 그 게으른 농부의 허리춤에 딱 붙에있는 가방엔 항상 전지가위와 관주시설을 고정하기 위한 끈과 가지를 유인하기 위한 끈, 그리고 과일을 따서 까먹기 위한 작은 칼이 들어 있다. 그걸 챙기고 과수원에 들어가 그는 눈에 보이는 대로 이 일, 저 일을 한다.




속없이 흥만 있는 언니


김동주·한현미 씨는 1만6천520㎡(5천 평) 벼농사와 1만9천830㎡(6천 평) 감농사를 하고 있다. 벼는 전부 유기농, 감은 절반은 저농약, 절반은 유기농이다. 특히나 과실 농사는 벌레가 잘 먹고 열매가 작아 유기농사가 어렵다. 저농약이라도 제초제나 생장조절제를 사용하면 안 되고 일부 농약은 살포할 수 없다. 허용된 농약도 1년에 5회 이하로 뿌려야 한다. 김동주 씨 부부가 최초로 감도 유기농으로 지어 보자고 농사를 시작한 지 3~4년이 되었다.
“원래 유기농 시작하고 2~3년이 제일 힘들재. 처음에 감이 이매니밖에 안 하는 게 상품이 아니여, 너무 잘아버리니께. 한 나무에 감이 8개 열렸는데 씨 있는 거 빼면 먹을 게 없어. 너무 수확량도 적고 해서, 몇 번 말해 볼까 생각도 했어. 우리도 그냥 합시다, 이렇게. 그런데 뭐, 술 두 번 먹을 거 한 번 먹으면서 농사하자 생각했재.”
이야기를 들어 보니 이게 술 좀 줄인다고 될 일인가 싶었다. 우선 이맘때, 그러니까 장마 전에는 감을 솎는 작업을 한다. 한 가지에 너무 많이 달리면 영양이 분산되기 때문에 실한 것들을 빼고는 따준다. 열매에 붙어 있는 시든 꽃잎도 따줘야 거기에 벌레가 들어가지 않는다. 그는 감을 솎으면서 가지가 갈라지는 부분을 가위로 긁었다. 그곳에 둥지를 트는 벌레들이 있어서다.
비가 올 때 할 수 있는 일은 풀베기다. 1년에 서너 번 한다. 7월 중순까지는 방제 작업을 한다. 병해충을 막기 위해 코팅이 되도록 친환경약재인 황토 유황을 뿌린다. 풀을 베고 물 대는 작업을 계속하다가 10월 25일 경에 수확을 시작한다. 20여 일간 수확하고 25일 저장한 뒤 5일 동안 수분을 뺀 감이 도시 조합원에게 간다. 겨울에도 쉬지 않는다. 눈이 오기 전에 퇴비를 살포하고, 12월에는 나뭇가지를 자르고 방향을 틀어주는 작업을 한다.
철장을 설치하기 전엔 이 밭에 가끔 멧돼지도 나타났다. 멧돼지는 간 보듯 열매 하나를 한 입 베어 물고는 또 그 옆에 있는 다른 열매를 먹었다. 가지를 잡아채서 부러뜨리기도 하고, 지렁이를 먹으려고 퇴비를 뒤집어 놓기도 했다. 멧돼지가 뒷발질한 땅은 움푹 패여, 예초기를 사용하기에 위험하다. 산 위쪽 소나무에서 총체벌레가 오면 감잎이 꼬시라져 떨어져 버려 감을 수확할 수 없게 된다. 이 벌레들은 페트병에 모아서 압사해서 태워버려야 한다. 장마철이 지나면 감잎 뒤쪽 털에 습기를 머금어 탄저병이 생기기도 한다. 탄자 포자는 쉬 퍼지기 때문에 옛날에는 병이 생긴 가지를 자르면 모아서 다른 곳에 버리기도 했다.
“약 한번 치면 해결될 것을, 눈 까맣게 뜨고 감이 떨어지는 것을 그냥 바라보고 있어야 하니까 속이 타재. 말하자면 친환경재재는 한방 요법이여. 병을 당장 없애는 게 아니고 나무 자체를 건강하게 하는 거라 더뎌. 마늘을 갈고 우려서 영양을 주고 은행을 삭히고 황토 유황 등을 희석해서 뿌리재.”
고수는 고수인 것이 그런 것에 연연하면 속상하기 때문에 “에이, 탄저 와 버렸어” 이러면서 동료 생산자들과 수다로 푼다고 했다. ‘가을에 감 딸 때 할 일이 줄어버렸으니 좋네.’ 이렇게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게 사실 한현미 씨의 힘이다.
동료들은 그런 그를 ‘속없이 흥만 있는 언니’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현미 씨는 동네 풍물패에서 상쇄를 맡아올 정도로 흥이 있고 분위기를 잘 돋군다. 농촌여성지도자들의 모임인 생활개선회 활동도 하고, 대숲공동체 총무도 맡고 있다. 여성이 최초로 한살림 생산자공동체 총무가 되었다.

 




 

 

 

 

 

 

 

 

 

 

 

(좌)진동이 상당해 몇 시간 몰면 손이 떨려 밥을 제대로 못 먹는다는 예초기에 그가 시동을 걸더니 거침없이 전진했다. 그가 지나간 자리에 맨 흙이 드러났다. 일 년에 서너 번 풀을 매지만 귀리와 해바라기는 일부러 심기도 한다. 해바라기꽃을 보고 모인 벌들이 암수 감꽃을 자연수정한다. 귀리는 어느 정도 자라면 노랗게 변하며 눕는다. 그것이 썩으면서 토질을 개선한다. (우)내 눈엔 다 아까운 감. 일손을 돕겠다고 큰소리쳤으나 어떤 감을 솎아야 할지 알 수 없어 멍하니 서 있는 내게 그는 먼저 난 감과 가지에서 세번째와 네번째 잎 사이에서 난 중간치 감을 남겨두어야 한다고 했다. 내가 볼 수 없는 무언가를 그는 보는 게 분명했다. 

 

 

예초기·트랙터·굴착기쯤이야


“형수가 여자여?”라고 말할 정도로 남자 후배들은 그를 편하게 대한다. 여자라고 연약한 척하지 않는 그에 대한 칭찬이다. 무거운 것을 번쩍 들고, 굉장한 소음을 내는 덜덜거리는 농기구들을 겁 없이 몬다. 수확철에는 감을 출하할 때까지 자연 숙성하고 포장하는 과정에서 22~30kg 과실바구니를 열 번 정도 올리고 내려야 한다. 그 일을 그는 거뜬히 한다. 콤바인이며 트랙터 모는 솜씨도 수준급이니 그의 말대로 어찌 “가끔 남자들이 운전하는 게 답답”하지 않겠는가. 그는 굴착기를 사서 퇴비 뒤집는 것을 해 보고 싶다. 아마 공업사를 했던 아버지 덕에 기계를 좋아하게 된 것 같다고 했다. 건조기 지붕이 바람에 날아간 적이 있는데 고소공포증이 있는 남편 대신 그가 지붕에 올라가 피스를 박았다.
사실 이들 부부의 대화는 은근한 데가 있는데 김동주 씨가 지붕 “고쳐야 되는데. 고쳐야 되는데…”라고 말하면 한현미 씨가 딱 알아듣는 식이다. 신혼 때부터 시어머니와 같이 살면서 어른 앞에서 절대 애정 표현을 하지 않는 것이 김동주 씨의 철칙이라, 뭐든 조금 은근하다. 가끔 섭섭할 만한데도 한현미 씨는 티 안 내고 알아서 제 일을 척척 해낸다. 후배 남자 생산자들은 그런 아내를 두었다고 김동주씨를 부러워한다. 주위 여성 생산자들은 처음에는 “여자가 뭐 그런 것까지 해?” 하더니 요즘은 “나도 가르쳐 줘. 자네가 하는 거 보니까 쉬워 보여” 라고 한다. 덕분에 지금 이 마을에는 흔히 남자일이라고 구분되던 기계 다루기를 척척 해내는 여성들이 여럿이다. 진동이 상당해 몇 시간 몰면 손이 떨려 밥을 제대로 못 먹는다는 예초기에 그가 시동을 걸었다. 씩씩해 보이기만 하는 그가 예초기를 좋아하는 이유는 사실 따로 있다. “왜 그런지 몰라. 기계는 안 무서운데 뱀이 그렇게 무서워요. 풀이 무성한 데서 뱀을 발견하면 그 쪽에는 사흘 동안 가지도 않아.”
겁먹은 표정이 어린아이 같았다. 순수한 그가 생산자공동체 총무를 맡으니 좋은 점이 있다. 조용하던 여성 생산자들도 의견을 말한다. 인복이 있어 주위 어른들에게 사랑을 많이 받아 감사하다고 했다. 일하다가 이웃 밭에 놀러가기도 하고 그렇게 얼 얼싸, 전라도 말로 아닌 것처럼 설렁설렁하게, 그렇게 농사지으면서 살 거라고 했다. 그 얼얼싸한 맛이 올 가을 맛볼 감에도 담겨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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