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호 2017년 3월호 살림,살림

[ 세계의 전환마을-미국 뉴저지 주 제네시스 농장 ]

죽은 이는 씨앗·꽃·열매로 돌아온다

글 _ 사진 현경

미국 뉴저지 주의 블레어스타운에 있는 제네시스 농장은 가톨릭 신학자이며 우주론자, 문화역사학자인 토마스 베리 신부의 지구 철학에 깊이 영향을 받은 도미니크 수도회의 수녀들이 운영한다. 평신도들이 기부금을 모아 마련한 약 91만 4천 590m²(226에이커)의 넓은 땅에 산, 연못, 습지, 강 등 개발하지 않는 아름다운 자연과 유기농 공동체 농장, 도서관, 미디어센터, 세미나실, 휴양 숙소, 명상 장소 12곳이 있는 산책로, 기도하는 천막, 수녀 공동체, 사무실 등이 평화롭게 자리 잡고 있다.

 

 

유니언 신학대학원 학생들과 제네시스 농장을 방문하여 영성과 과학을 결합한 우주 중심의 세계관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축제를 여는 공동체 농장
제네시스 농장에서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지구를 존중하는 제례가 열리고 ‘지구 읽기’(Earth Literacy) 세미나를 하며, 공동체 농장 구성원들이 펼치는 씨뿌리기, 추수하기, 농작물 나눠 갖기 등의 축제를 연다. 이 공동체는 새로운 선물경제(gift economy)를 실험한다. 농장의 서점과 농작물 판매소에는 점원이 없다. 물건에 매겨 놓은 적정 가격을 보고 선택하여 비치해 놓은 장부에 자기가 가져간 물건의 이름과 양을 적고 무인 계산대에 있는 상자에 돈을 넣고 나오면 된다.
산책로에는 지금 지구가 겪고 있는, 또 지구의 지혜를 느낄 수 있는 설치미술로 명상하는 장소 12곳을 만들었다.
나는 이성적이고 사회정의 운동에 심취해 있는 유니언 신학대학원 학생들과 함께 이곳을 방문했는데, 이들이 이 길을 걸으며 어떻게 느낄지 정말 궁금했다. 지구의 기운은 강력했다. 논리적으로 이론을 따지던 학생들이 명상 중 성가를 부르기 시작했고 즉흥적으로 손을 잡고 함께 기도했다. 놀라운 광경이었다. 학교 교실에서 학생들을 불러내 2시간도 더 차를 달려 이 숲과 들로 온 보람이 느껴졌다.
제네시스 농장의 정신적인 지주인 토마스 베리 신부는 1914년에 미국에서 태어나서 2009년 94살로 이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우리 시대의 문화, 학문, 영성을 사람 중심에서 지구 중심으로 바꾸는 데 독자적인 공헌을 했다.
젊은 시절 문화사를 공부하고 중국어, 산스크리트어를 익혀 중국과 인도에서 유학한 경험이 베리 신부가 일생의 사상을 세우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세계종교, 물리학, 지리학 등에 심취했던 그는 고생물학자이며 신학자
인 떼이야르 드 샤르뎅 신부의 사상적 제자이다. 드 샤르뎅 신부는 진화론과 기독교 신학을 융합하여 창조에서 종말까지 하느님의 사랑의 현현 과정을 진화 과정을 통해 설명했다. 거기에서 예수의 삶은 그 사랑의 정점이다. 토마스 베리 신부는 드 샤르뎅 신부의 생물학적 접근에 물리학을 접붙였다. 최초의 빅뱅은 하느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이며 우리는 이 빅뱅으로부터 나온 별의 먼지들이 진화해 오페라를 부르는 존재로 지금 살고 있다. 우리의 DNA, 모든 세포 하나하나는 태초의 이 모든 경험을 기억하고 있다. 지금까지 이 광대한 우주 속에서 자신의 가치와 능력을 과대평가하며 살아온 인간들은 이제 이 거대한 우주 속에서, 지구 위에서 인간 외의 많은 주체들과 상호 연결되어 살아가는 한 존재일 뿐이라는 것을 깊이 깨달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전통을 재발견하여 새로운 의식 절차를 만든다. 죽은 이를 들꽃이나 과일나무로 기억하며 그들이 새로운 씨앗이나 꽃, 열매로 돌아오기를 기원하는 ‘기억의 나무’ 의식.

 

 

젊은 시절, 토마스 베리 신부와 논쟁
나는 개인적으로 토마스 베리 신부에게 큰 빚을 졌다. 1990년대 후반, 한 생태영성 토론회에서 베리 신부와 나는 신학적으로 날카로운 논쟁을 벌였다. 그때 젊은 신학자였던 나는 베리 신부가 여성, 원주민, 과학, 세계종교라는 4분야의 전통으로부터 현 문명을 변혁하는 지혜를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 담론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의 여성해방신학 관점에서는 베리 신부의 거대 담론, 좀 과하게 느껴지는 일반화가 많이 불편했다. 그의 철학이 너무도 자유주의적이고 낭만적으로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의 가난한 여성들의 구체적인 삶에 당신의 일반화된 거대 담론이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고 비판했다. 그리고 베리 신부가 생각하는 ‘여성성’이 여성을 이상화, 대상화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지구가 지금 침몰하는 타이타닉 호라면 당신은 맨 위 일등석에 탔다가 제일 먼저 구명보트를 타고 그 배를 탈출할 수 있는 소수의 특권층을 향해 강연을 하는 것 같다는 못된 말도 했다. 토마스 베리 신부와 나의 토론이 점점 날카로워지자 사회자가 우리에게 둘 다 좀 흥분을 가라앉히라고 중재에 나서기도 했다.
며칠 뒤, 나는 토마스 베리 신부에게 전혀 예상치 못했던 편지를 받았다. 편지에는 토론회를 끝내고 집에 와서 생각해 보니 내 비판이 다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씌어 있었다. 그래서 내 비판을 수용하지 못한 것이 후회되고 미안하다, 자신의 무례함을 용서해 달라, 자신이 보지 못한 것을 보게 해 줘서 고맙다고 했다. 이 편지를 받고 나는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확확 달아올랐다. 손녀뻘인 학자의 무례한 비판에 정중한 사과 편지를 쓴 베리 신부의 지성적·영성적 성숙함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그런 일이 있은 후 그의 사상을 더 깊이 알고 싶어졌다. 그래서 그가 세상을 뜨기 전 3년 동안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마다 한 번씩 그가 수도하는 곳에 가서 깊은 대화를 나누는 주말을 보냈다. 그때 나눈 대화를 《토마스 베리와의 4계절》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내려고 했는데 아직도 완성하지 못했다. 빨리 베리 신부에게 진 사랑의 빚을 갚아야 하는데, 세월이 속절 없이 빨리도 간다.

 

 

농장의 산책로에는 가톨릭의 ‘예수 수난의 12과정’에서 모티브를 얻어 ‘지구 수난의 12과정’을 설치미술로 만들어 명상하는 12곳을 만들었다.

 

 

과학과 영성을 함께 배워야 우리 자신을 알 수 있다
제네시스 농장의 관리자인 미리암 테레사 맥길리스 수녀는 토마스 베리 신부의 철학을 실천으로 표현하는 사람이다. 물질적인 면에서 우주와 지구가 어떻게 진화했는지 그리고 우리의 내면, 심리, 영적 차원이 어떻게 진화했는가를 함께 통전적으로 알고 물질적인 면과 영적인 면을 통합한 지혜를 갖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 자신이 지구의 깊은 표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고 한다. 그렇게 되면 작아 보이는 내 안에 우주 전체가 다 들어와 있다는 것을 알고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다 함께 연결되어 있는 하나라는 깨달음에 도달한다. 이러한 진실을 깨달은 사람들이 할 일은 모든 것이 온전한 하나라는 것을 직장에서, 가정에서, 농토에서, 예술과 정치에서, 매일의 생활 속에서 살아 내는 것이다.
미리암 수녀는 토마스 베리의 책 《지구의 꿈》(1988, 한국어판 2013)을 인용하며 지금 같은 위기의 시기에 우리가 할 일은 수억 년 된 우리의 유전자 코드에서, 지구에서, 우주에서 지구의 지혜를 듣고 그것을 우리 삶의 등불로 삼아 사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이러한 깊은 지혜는 우리 내면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꿈, 신화, 상징, 기도, 명상, 또는 의식의 다른 세계를 여행하며 얻을 수 있다. 우리가 지구를 죽어 있는 물질, 끊임없는 착취와 사용이 가능한 자원으로 보는 한 우리는 자신과 미래의 아이들을 죽이는 일을 계속할 것이다. 우리 내면 깊숙이 스며들어 있는 지구 이야기가 인간 중심이 아닌 지구 중심, 우주 중심의 이야기로 바뀌지 않으면 우리는 지속가능한 지구 문명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이 미리암 수녀의 생각이다.
지구 영성 지도자가 되고 싶은 사람들은 제네시스 농장에서 운영하는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공부할 수 있다. 성 토마스 대학과 연계한 석사학위 과정인데, 세계의 많은 환경 운동가들이 이 프로그램을 공부하고 자기 나라에 돌아가 지구를 살리는 운동을 벌이고 있다고 한다.

 

 

인간 중심이 아니라 우주 중심의 세계관을 생활로 실천하는 제네시스 농장에서는 햇빛발전으로 전기를 자급한다.

 

 

죽은 이를 들꽃이나 과일나무로 기억하는 의식
제네시스 농장은 지금 땅과 깊이 교감하는 영성 프로그램을 만들고 가르치는 데 집중하고 있다. 지구를 존중하는 오래된 의식을 재발견하여 미래지향적인 의식 절차를 만든다. 또 ‘기억’이라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가족이나 친구가 죽은 이를 들꽃이나 과일나무로 기억하고 그들이 새로운 씨앗으로, 꽃으로, 열매로 다시 지구로 돌아오는 것을 축하한다. 죽은 이를 위해 특정한 들꽃의 씨앗이나과일나무를 농장에 기증하고, 죽은 이의 재를 나무 밑에 거름으로 뿌리거나 들꽃 씨앗을 뿌릴 때 죽은 자의 이름을 부르며 그들을 기억하는 파종 의식을 한다. 그 기억의 정원의 중앙에는 토마스 베리를 기억하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인간 중심의 과잉 생산, 과잉 소비에 따른 욕심의 문화에서 지구와 우주 중심의 더 깊고 높고 넓은 상호 연결에 따른 사랑의 문화로 넘어가는 문명 전환마을의 역할을 하는 제네시스 농장.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더니 이 곳에 오니 다른 세상, 다른 시간 속으로 순간 이동을 한 기분이다. 지키는 사람이 없는 제네시스 농장의 서점에서 《나무와 말하는 사람》이라는 책을 사고, 농작물 판매소에서 꿀을 한 통 사서 다시 ‘괴물의 창자’ 속 같은 뉴욕 맨해튼을 향해 떠난다. 같은 시대에 살면서도 다른 시간 그리고 다른 차원, 높은 공간을 사는 공동체의 기운을 흠뻑 받고 나도 다시 온전한 꿈을 꾸게 되어 감사하고 감사하다.

 

제네시스 농장 genesisfarm.org
전화 1-908-362-6735

 

 

↘ 현경 님은 스스로 ‘살림이스트’라고 칭하는 여성·환경·평화운동가입니다. 미국 뉴욕 유니언 신학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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