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호 2017년 3월호 [특집] 환절기

[ 얼치기 농부의 봄맞이 ]

절망과 희망이 뒤엉킨 생명농사의 길

글_사진 홍진희

며칠 동안 따뜻하더니 엊그제는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비 그치면 곧 봄이 되겠지 했던 기대도 무색하게 어제부터 찬바람이 일더니 우수인 오늘은 한겨울 바람이 몰려온다. 해마다 겨울에서 봄으로 건너가는 이맘때마다 자주 겪어 온 일이다.

 

 

봄이 오기 전 밭에 꿈틀대는 생명들
한살림 생산자가 된 지 스무 해가 훌쩍 넘었다. 처음에는 지금처럼 주 산지별 농사 품목이 정착되지 않고 생산자·생산지별로 빠듯하게 생산·공급 계획을 세우다 보니 십여 년 동안 하루라도 빨리 준비해서 작물을 심어 보려고 요맘때 이것저것 실험을 많이 했다. 수막 재배로 조금 일찍 농사를 해 보려고 이중·삼중 비닐하우스에 보온용 물주머니를 설치하고 터널용 활대를 꼽고 속비닐까지 씌워 놨다가 된추위에 놀라 겨우내 키워 놓은 모종을 다시 며칠씩 늦추어 심던 일. 날씨가 채 따뜻해지기 전에 모종을 심어 놓고 얼어 죽을까 봐 늦은 밤까지 애달아하며 동동거리던 일. 얼치기 농부로 살아가며 허술한 시설에 조금이라도 일찍 작물을 심고 수확을 앞당겨 보려고 억지 부리던 그 많은 시간들. 지금 생각해도 머리가 쭈뼛거리고 몸이 긴장되는 게, 어렵긴 어려운 시절이었나 보다. 한 해도 수월하지 않고 긴박하던, 겨울도 아닌, 봄도 아닌 시절이 나에게 길고 긴 환절기로 있었다.
그동안 작물도, 농사법도, 농장의 모습도 참 많이도 달라졌다. 외부 의존을 줄이고 자립성을 키워 가는 농사의 길. 몇 개 남지 않은 비가림하우스엔 수막 없이 겨울나기를 할 줄 아는 채소들이 부직포에 덮인 채 더디 자라고 있고 노지에서도 겨울을 날 줄 아는 작물들은 비닐을 벗긴 하우스 여기저기 언 땅에서도 생명을 이어 나가고 있다. 3월 말에 심을 자주감자가 햇빛 목욕을 시작하고 5월 노지 밭에 심을 고추·가지 씨앗은 이제야 아랫목 따뜻한 곳에서 싹을 틔우려 한다.
언제부턴가 농사 절기가 늦춰진 노지 밭에는 아직도 고추, 옥수수, 수수, 넝쿨 콩의 대궁과 잔재물이 내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스산한 삭풍 가시고 햇살 좋은 3월이 되면 밭에 직접 씨앗을 심는 작물들의 씨앗을 챙기고 씨고구마를 묻으면서 쉬엄쉬엄 치워 나가게 될 것이다. 엊그제 비에도 아직은 언 땅이지만 쪽파가 푸릇푸릇해지고 양지 바른 곳 냉이와 지칭개가 조금씩 자라나는 걸 보니 곧 땅이 풀릴 것이다. 언 땅이 풀리면 잠시 질척했다가 발에 밟히는 대로 함박눈을 밟는 것처럼 푹푹 발자국이 난다. 마치 큰 기계로 갈아 놓은 흙처럼 온 대지의 흙살이 부드러워지고 부푸는 것이다.
해동이 되면 들뜬 흙에 가뭄 피해가 있을까 봐 밀·보리밭은 밟아 주고 도라지·쪽파·마늘밭도 다독여 준다. 그맘때쯤엔 냉이도, 밭의 뿌리 얕은 잡풀들도 술술 잘 뽑힌다. 겨울을 난 흙은 얼었다가 풀리면서 새 생명을 품을 준비를 자연의 힘만으로 저절로 하게 된다. 그 흙에 서늘한 기온에도 자라나는 시금치와 상추 씨앗을 뿌리고 완두콩과 감자를 심고 조금 지나 더 따뜻해지면 무와 당근 등 뿌리채소 씨앗 받기를 위해 장다리 박기(월동 작물에서 씨앗을 받기 위해 봄에 다시 심는 일)를 하고 토종 고추를 직파하고 앉은뱅이 강낭콩을 심고 물오른 포도나무 가지를 쳐서 꺾꽂이를 해야 할 것이다. 얼었다 풀린 새
땅에서는 이렇듯 꽃 피는 봄이 오기 전에 먼저 온갖 생명이 꿈틀거리고 작은 농사일들이 시작된다.
올해 우수 지나 닥친 된추위도 겨울 끝자락 지나가는 추위려니 하다 보니 예전의 그 긴박함과 애달픔만 있는 건 아니다. 어둡고 아팠던 환절기는 생명 잔치를 준비하는 설렘과 기대로 차올라 힘겨움만 있는 건 아니다. 분명 지금의 겨울은 예전의 겨울이 아니다. 평균기온이 많이 올라갔고 비도 더러 내려, 눈 많고 소스라치던 추위가 훨씬 덜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물질문명의 온갖 달굼 때문에 지구온난화가 급격하게 진행됨을 실감한다. 지역에서 봄작물을 밭에 심는 시기만 보아도 전보다 많이 앞당겨져서 겨울과 봄 사이 환절기에 더욱 서둘러서 농사일을 하는 것을 볼 때도 이런 변화를 실감한다.

 

 

겨울 추위가 채 물러가기 전부터 땅의 생명들은 꿈틀거린다. 이때 농부의 일도 바쁘다. 노지 밭과 비가림하우스 여기저기에 겨울을 살아 낸 월동채소가 푸르른 잎을 내밀고 있다.

 

 

생명농사의 절망과 희망이 뒤엉킨 지금
1980년대 우루과이라운드로부터 본격화된 농산물 시장 개방은 일곱 번째 정권을 거치면서 주도면밀하게 진행되더니 30여 년 만에 전면화되었다. 쌀도 잡곡도 과일도 기호 작물들도, 건강식품과 가공식품도 전 세계에서 물밀듯 밀려든다. 이 중에는 씨앗이 유전자 조작되거나 재배·보관·운송 과정을 거치며 화학농약 등에 오염되어 생명을 해치는 것들이 늘어났다. 좋은 먹을거리 생산과 나눔을 통한 농업살림운동을 위해서 한살림을 포함한 여러 생협이 수십 년 동안 눈물겹게 노력해 왔지만, 이제 와 한국 농업의 현실을 보면 성과가 크다고 보기 어렵다.
유기농업의 성과 또한 씨앗부터 농자재, 시설, 농사 방식에 이르기까지 해외, 외부 의존율이 너무도 높아 시간이 흐를수록 위태로워지고 있다. 유기농사를 짓는 농부의 평균연령을 봐도 노령화 때문에 현재 수준의 농지 규모와 생산량을 언제까지 지켜 나갈 수 있을까 걱정될 정도다. 가슴이 답답하고 암담해지는 현실이다.
그런데 한편으로 도시와 산업 중심의 문명사회 속에서 생태적으로 각성하여 새로운 삶을 찾는 열망이 커지고 있다. 도시에서 농사를 배우고 농촌으로 귀농·귀촌하려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음은 또 희망이다. 이렇듯 생명농사를 두고 절망과 희망이 뒤엉킨 현실, 이것이 농사로 보는 현재 한국의 환절기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저성장 시대가 왔다고 한다. 산업문명이 여러 가지 여건이 어려워져 양과 질 모두에서 확장되기 어려운 위기의 시대를 맞이한 것이라고 받아들여진다. 전 사회적으로 외형적인 성장이 어려워지고 내실을 기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면, 외부 의존을 줄이고 자급을 키우는 삶으로의 대대적인 전환이 필연적이다. 전환을 얘기할 때, 자급농사는 많은 일들 중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일이다. 문명사를 살펴보면 사람의 노동이 전제되긴 하지만 특별한 재난의 때 말고는 자연은 인류가 시시때때 온갖 먹을거리로 자급할 수 있도록 베풀어 왔다. 이 땅에서도 다르지 않다. 농사는 시대에 따라 다양하게 변해 왔지만 소유에 따르는 압제가 큰 무리가 안 된다면 그야말로 만민의 주인된 삶을 가능케 하는 가장 중요한 영역이었다. 현재의 농사는 또 변하여 농지 소유관계에 따르는 임대 비용보다 오히려 자연력을 이용하지 않고 자본주의적으로 운영하면서 늘어나는 여러 가지 비용이 더 큰 압제가 되어 가는 상황이다. 진정 비용을 줄이는 농사는 제철농사이며 유기-자연농업이다.
지금 2017년, 한국 농업은 겨울도 봄도 아닌 환절기에 있다. 겨울비와 강추위가 교차하는 시절을 지나고 맞이하는 새봄에는 도시의 수많은 사람이 땅과도 만나고 마을과도 만나고, 자급농사를 주제로 농민들과 크고 넓게 어우러지면 좋겠다.

 

 

↘ 홍진희 님은 한살림 청주생산자연합회 뿌리공동체에서 오이, 고추, 파, 수박 등을 토박이씨앗으로 농사짓고 있습니다. 1991년 가을부터 부모님을 도와 농사를 시작해서 1993년부터 유기 농사를 배워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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